"글의 서술양식은 ‘말하기’와 ‘보여주기’로 이루어진다. 문장의 형태가 산문인 소설은 물론이고, 문장의 형태가 운문이었던 시가 산문 형태로 문장구조를 차용하면서 그리고 운율보다는 이미지를 중시하게 되면서 시 장르도 ‘말하기’와 ‘보여주기’ 방식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이러한 담론은 그동안 소설 즉 서사학에서 주로 논의되어 왔다. 수필학에서는 본격화되지 못했던 것으로 안다. 하지만 ’수필 쓰기’의 서술방식도 이 두 가지 방식에서 제외되지는 않는다."
말하기와 보여주기 - 유한근
글의 서술양식은 ‘말하기’와 ‘보여주기’로 이루어진다. 문장의 형태가 산문인 소설은 물론이고, 문장의 형태가 운문이었던 시가 산문 형태로 문장구조를 차용하면서 그리고 운율보다는 이미지를 중시하게 되면서 시 장르도 ‘말하기’와 ‘보여주기’ 방식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이러한 담론은 그동안 소설 즉 서사학에서 주로 논의되어 왔다. 수필학에서는 본격화되지 못했던 것으로 안다. 하지만 ’수필 쓰기’의 서술방식도 이 두 가지 방식에서 제외되지는 않는다.
서사학에 대한 관심과 이론은 플라톤의 ‘디에게시스diegesis’와 ‘미메시스mimesis’의 권위적인 이론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이를 이어받아 새롭게 환기된 것은 제라르 주네트와 S.채트먼의 화자이론에서부터이다. 주네트는 ‘화자담론’에서 플라톤은 서술방식을 두 가지로 구분하고 있음을 전제하고, “시인 자신이 발화자이고, 그 외의 사람은 누구라도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게 하려는 방식”을 ‘순수서사-디에게시스’라고 규정한다. 그리고 “실제로는 시인 자신이 말을 하면서도 다른 인물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꾸미거나 이미 발화된 말을 다루고 있는 것처럼 하는 방식”을 ‘미메시스’라 말하다. 그리고, 그는 디에게시스를 서사, 미메시스를 극과 동일시하고 있다.
이러한 화자 담론은 시점point of view과도 긴밀한 관계를 지니고 있지만, 19세기 말에 와서는 영미비평계의 ‘요약summary’과 ‘장면scene’ 혹은 ‘말하기-설명telling’과 ‘보여주기-제시showing’라는 새로운 용어로 담론이 지속된다. ‘말하기’가 화자의 중재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이야기 방식이라고 할 때, ‘보여주기’는 연극처럼 사건이나 대화를 직접 제시함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말하는 주체는 없어지고 독자가 직접 경험하고 있는 듯한 환상에 빠지도록 유도하는 이야기 방식인 셈이다. 따라서 이 담론들은 소설의 이야기를 통한 소통 방식을 설명하는 데 사용되어 왔던 것이다.
이들 이론가들의 일부인 예컨대 러보크는 ‘보여주기’의 방식이 ‘말하기’ 방식보다 독자와의 소통 문제에서 효과적이라 주장하기도 했지만, 부스는 러보크와는 달리 ‘말하기’가 효과적인 표현 방식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말하기-보여주기’ 방식을 이분법 혹은 대척적인 방식으로 대립시키기보다는 글의 성질에 따라 양식의 적법성을 판단해야 할 것이다. 또는 작가의 개인적인 취향에 따라 다르게 차용되어야 할 것이다. 주네트가 이 두 개의 발화양식은 서로 상호보완적 관계에 있으며 동일한 개념일 수 있다는 말에 유의할 필요도 있다. ‘말하기’는 서술 행위(narration) 혹은 서술체이며 ‘보여주기’를 묘사행위(description) 혹은 담화로 설명하는 것도 유의해야 할 것이다.
인간은 서사적 존재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이 의미하는 것은 인간은 스스로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어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존재를 뜻하며, 남의 이야기나 자신의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이야기하는 존재라는 의미이다. 이런 점에서 서사학의 화자담론은 수필을 감상하고 이해하는 데 있어서도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그러나 ‘말하기’와 ‘보여주기’의 방식은 작가에 따라 또는 독자에 따라 그 선호도가 다르기 때문에 그 경중을 판단할 수는 없지만, 그에 대한 효과적인 측면은 가늠해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 점을 전제하고 이달의 작품을 일별한다.
병원에 한 여자가 사고를 당해 입원을 한다.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여자는 과거의 기억을 모두 잊어버렸다. 젊은 담당의사의 치료를 받는 동안 두 사람 사이에 연정이 싹튼다. 여자가 끼고 있던 반지, 어느 날 그 반지를 사랑의 징표로 남자에게 준다. 그러나 모든 러브스토리가 그렇듯이 행복도 잠시다. 우여곡절 끝에 여자는 잊어버렸던 과거의 기억을 되찾게 되고 자기가 환자였던 시간, 젊은 의사와의 아름다웠던 기억은 깡그리 잊어버린다. 사랑했던 여인이 준 반지를 그녀에게 되돌려주는 남자. 여자는 그 반지를 받아 아무렇지도 않은 듯 자기의 손가락에 낀다.
“아, 이 반지.”
짧고 무심한 한마디만 긴 여운을 남긴다.
이만희 감독의 영화 <망각忘却>의 대충 줄거리다. 한 시대 천재라는 소리를 듣는 이 감독이 만든 <만추晩秋>는 최고의 찬사를 받는 영화다.
-선산곡의 <망각> 서두 부분
위에 인용한 선산곡의 <망각>은 작가 자신의 이야기가 아니라, ‘망각’이라는 언어에 대한 인식과정을 그대로 서술한 수필이다. 이 수필은 위의 인용문처럼 이만희 감독의 영화 <망각>의 줄거리 소개로부터 시작된다. 영화의 줄거리를 소개하는 문장이기 때문에 ‘말하기’ 방식이 효과적일 것이다. 그러나 위의 대사 부분 “아, 이 반지”와 “짧고 무심한 한마디만 긴 여운을 남긴다”는 ‘보여주기’ 방식을 혼용하여 쓰고 있다. 영화의 한 ‘장면scene’, 스틸 한 장을 보여줌으로 해서 생동감 있게 전달하기 위한 표현 방식이다. 그러나 작가가 이 수필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망각은 슬픈 일이며 불행한 일이다.’라는 메시지이다. “망각. 어떤 조건에 의해 기억을 잃어버렸거나 아니면 잊히지 않는 일을 잊고 싶어 들먹이는 말, 그것은 어차피 슬픈 일이 아닌가. 더러 잊어버리고 싶은 것이 많은 게 우리들 인생사다. 이 세상 살아가는 사람들 더러는 잊고 싶은 상처를 지니고 있었을 것이고 그 상처들은 되살아남으로 덧을 내는 것이다. 오늘날 사회 문제되고 있는 치매도 곧 망각이니 슬픈 일 이전의 불행이다.”가 그것이다. 이 표현 구조는 전형적인 ‘말하기’ 방식인데, 메시지를 비유하지 않고 직설적으로 전달할 때는 ‘보여주기’보다는 효과적임을 알 수 있다. 작가 자신의 이야기가 아니라, 남의 이야기 혹은 관련 이야기를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있어서 ‘말하기’의 방식이 적당하다. 문장 기술의 네 양식 중 설명과 논증의 방식이 그것이다.
이양주의 수필 <생각이라는 병>은 두통이 심해 찾아간 약사의 말 “아가씬 생각이 너무 많아 탈이네요.”라는 말 한마디에서 고은 시인의 말 “생각이야말로 병이다.”란 말을 떠올리게 되고, 그것을 통해서 ‘생각’이라는 정체불명의 사념을 존재론적으로 인식한 수필이다. 그리고 이에 대해서 독자를 설득시키기 위해 자신의 빨래 체험을 끌어온다.
내겐 빨래하기를 즐기는 습성이 있었다. 그 당시엔 세탁기가 없어서 일일이 손빨래를 하던 시절이었다. 기분 우울한 날이면 마치 의식을 치르듯 빨래를 즐겼다. 내가 빨래와 하나가 되는 느낌이랄까. 일상에 후줄근해진 몸과 마음을 물에 푹 담그고 비비고 헹구어 빨랫줄에 걸쳐 축 늘어뜨릴 때면 무거운 자아를 걸쳐놓는 느낌이 들었다. 신선한 바람에 흔들리고 햇빛에 말리면서 뒤에 찾아오는 말쑥함은 한결 가벼워진 자아로 새로운 옷을 갈아입는 듯한 느낌이 들어 좋았다. 하나 그때도 생각은 그 순간에 완전히 몰입하지는 못했다. 공연히 일어난 딴 생각에, 때론 허망한 생각에 잡혀 근심하고 걱정하면서, 현재 시제는 빨래 중이었으나 생각은 과거나 미래에 빠져 있기가 다반사였다.
그날은 휘영청 하니 달이 참으로 밝았다. 나는 주로 하루의 일상이 끝나는 밤이면 빨래를 하였다. 빨래를 하려고 커다란 통에 물을 받아 놓았는데, 거기! 달이 들어 있었다.
한 번도 발견하지 못한 온전한 모습으로. 시간이 정지되고 바람이 완전히 멈추어버린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 나도 주변도 모든 것이 달물에 빠지고 달물에 젖어 하나가 된 느낌이 들었다.
-이양주의 <생각이라는 병> 중에서
위의 인용문은 온전한 ‘보여주기’ 방식은 아니다. ‘말하기’ 방식을 혼용한 문장으로 써내려가고 있다. 그러나 서사의 내러티브를 살려 소설문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묘사행위를 잊지 않고 쓴다. 그럼으로 해서 읽는 맛을 낸다. 빨래하면서 생겨나는 생각들, 그 사념을 심리묘사하듯이 서술하고 있다. “문제는 산다는 것이다. 살아 있는 건 생각이 살아 있는 것이라고 스스로 신념을 가지는 나이였다.” “생각은 시시각각 대상을 바꾸며 쫓아다녔다. 나중엔 대상이 문제가 아니라 ‘쫓아다님’ 그 자체에 묶이고 있었다. 이것은 아니다. 구속이다. 집착이다. 벗어나야 한다. 자유롭고 싶다고 속에서 소리치고 있었다.” “그때의 체험을 이후로 단순하게 산다는 것, 평범 속의 진리를 발견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두통에서 벗어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등과 같은 문장은 사건이나 상황에 대한 묘사가 아니라, ‘말하기’ 방식을 통해서 독자들에게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렇듯 이양주의 이 수필<생각이라는 병>은 제목이 시사한 바,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 메시지를 ‘말하기’ 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짤막한 에피소드를 보여주며 자신의 내면 모습을 ‘보여주기’ 하고 있다.
이에 비해 피귀자의 <소리>는 작품 제목만 보면 이 수필의 주제를 짐작하기 어렵다. 많은 생각을 가능하게 한다. 독자의 생각을 열게 한다. 그리고 서두 부분부터 ‘보여주기’ 방식을 취한다.
너는 누구냐
바람인가. 바람인가 보다. 바람이 일어선다. 어느 순간부터 세상에는 바람만 존재하는 듯 전깃줄이 윙윙 운다. 아니, 보일러가 돈다. 그도 아니면 냉장고 모터 소리인가. 소리를 잡기 위해 집안을 헤집지만 고요한 밤, 식구는 잠들었고 소리는 어디에도 없다.
등을 붙이고 눕자 하루치 피로가 몰려왔다. 눈꺼풀이 저절로 감긴다. 꿈이런가. 바람이 귓속을 휘감는다. 들릴 듯 말 듯 은밀하던 소리가 점점 커진다. 다시 일어나 집안에 소리가 날만한 곳을 찾아 샅샅이 뒤졌지만 어디에도 비슷한 소리는 없다. 누웠다 일어나기를 수없이 반복하자 잠은 저만치 달아나 버리고 시시각각 예민한 촉수가 돋아난다.
수많은 도르래가 돌아간다. 하늘이 암갈색으로 물들고 두꺼운 구름이 몰려온다. 모래먼지가 입안에서 서걱거리고 숨이 턱턱 막힌다. 폭우에 들풀이 일어나듯, 어둠을 삼킨 검은 파도가 밀려온 듯 갑자기 강렬한 폭발음이 귀를 때린다. 고막이 찢어질 듯 거대한 소리에 화들짝 놀라 벌떡 일어섰다. 순간 거대한 소리는 숨어버리고 드러누우면 또다시 소리가 소리를 부르고 소리에 갇혀 누웠다 일어서기를 반복했다.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우주 저편에서 메아리치며 다가오는 지진 해일의 소리가 이럴까. 두려움에 휩싸인 순간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이럴 수가, 이 거대한 소리의 근원이 바로 귓속이라니!
-피귀자의 <소리> 서두 부분
작가의 귀에 들리는 ‘소리’의 정체를 ‘바람’ ‘냉장고 모터 소리’인지 의혹해 하는 것으로 수필은 시작된다. 작가는 귀에 들려오는 소리의 정체, 그리고 그것에 대한 인식을 감각적으로 그려가고 있다. ‘보여주기’ 방식으로 써나간다. 그런 뒤 그 소리의 근원이 자신의 귓속임을 알게 된다. 그것이 ‘이명耳鳴’ 임을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너(이명)를 해체하고 말리라” “너를 어쩌랴”라는 고딕체 표기 단락에서 작가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게 된다. 노화의 한 현상인 ‘이명’ 그것은 “소멸하든가 파괴하는 것 외엔 존재하는 것이 불가능할 것 같은 절망”, 그 인식을 갖게 되는 자신의 내면을 ‘말하기’ 방식으로 처리한다. 그리고 마지막 고딕체 표시 단락 ‘너를 어쩌랴’에서는 “수없이 많은 날을 고통 속에서 보낸 뒤에야 빛이 보인다. 시앗 본 아낙처럼 왜 추방하려고만 애태웠을까. 자리를 내어주고 나니 배시시 꽃잎이 피어난다. 어두웠던 마음을 간질이는 따스함이 온몸으로 전해져온다. 5월의 햇살처럼 천사의 미소처럼”이라는 감각적 표현 구조를 통해 “자라나는 번뇌를 가라앉히기 위해서는 정신의 휴식이 필요하리라. 허둥대지 말고 당황하지 말고 내어 준 자리에 연연하지 말자. (…) 조급함을 내려놓고 천천히 느리게 자장가 속으로 침잠하리라. 불청객, 나을 수 없다면 너를 껴안으리.”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이명’이라는 소리의 정체를 독자들에게 이야기해주고, 그것을 극복하는 치유의 방법을 제시해주는 이 수필의 모티프는 일반적으로 ‘말하기’ 방식이나 에피소드를 통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식으로 독자들에게 전언하려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수필은 ‘말하기’와 ‘보여주기’를 같이 보여주면서, 디테일한 부분에서는 ‘보여주기’에 많은 비중을 주어 미학적 표현구조를 실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편성희의 <달팽이가 오는 시간>는 제목부터 독자의 궁금증을 일게 한다. ‘달팽이’는 무엇을 표상 혹은 비유하는 것일까. 그리고 ‘그것이 오는 시간’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의혹하게 한다. 호기심을 갖게 한다. 제목만 보아서는 이 수필의 내용을 쉽게 짐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추상적 개념이 함유하고 있는 의미를 해명하기 위해, 이 수필은 아래에 제시한 서두 부분에서처럼, ‘체인점’ 종업원 이야기, 동네 골목길을 다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여주기’ 방식으로 전개한다.
그 동네 엘리아에 들어섰을 때 종업원은 마치 나를 어제 보고 오늘 또 만난 것처럼 친근한 인사를 건네왔다. 나도 그를 어디선가 본 것만 같은 착각이 든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곳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체인점 안 종업원의 모습은 우리 동네에서 나와 같이 지내다 온 사람처럼 그렇게 낯설지 않다.
반듯하게 다듬어진 도랑을 따라 사람들이 걷는 모습이 보인다. 길보다 낮은 길을 걷는 사람들이 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곳, 대도시의 그런 낯섦이 나와는 일치하지 못하는 부대낌을 준다. 빈틈이 없이 메워져 있는 하늘과 땅, 그 도시 안에 들어선 나는 벌써 침묵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이 동네 어디엔가 골목길을 찾아 안쪽 깊숙한 곳에 자리한 사람 을 만나러 급하게 올라온 나는 미아처럼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다.
-편성희의 <달팽이가 오는 시간> 서두 부분
작가인 ‘나’는 체인점 ‘엘리아’에 치즈스틱과 커피를 놓고 ‘그’를 기다린다. 그 모습을 ‘보여주기’ 방식으로 그린다. 영화의 한 장면을 보여주듯이. 여기에서 독자는 ‘그’라는 정체에 대해서 궁금해 하게 된다. 그 궁금증으로 그 다음 문장을 읽게 된다.
치즈스틱이 굳어가고 커피의 양은 줄어들고 있다. 그가 문을 열고 들어와야 할 시간에 그 동네에서 오래 묵은 한 사람이 방금 방에서 나온 차림 위에 낡은 잠바를 걸치고 이어폰을 귀에 꽂은 채 들어와 커피 한 잔을 시켜 들고 한쪽 구석으로가 자연스럽게 앉는다. 항상 그곳이 그의 자리였던 것처럼 앉자마자 가방을 풀고 한 권의 책을 꺼내 책장을 넘기기 시작한다. 그러다 갑자기 마른 햇살을 돌돌돌 말듯 중얼거리며 콕콕콕 활자를 씹는 소리를 내다가 천천히 커피를 마시면서 참고서를 넘기는 자연스런 모습에서 나는 순간 절망을 안는다. 저 청춘이 녹아나는 시간, 침묵 안에서 부서지는 음악 소리를 혼자 들으며 세상을 잊어가는 욕망의 허물어짐에 두려움을 느낀다. 세상 앞에 홀로 서 있는 모습이 곧 나이며 골목길을 걸어 내려오고 있는 그일 수도 있다.
-편성희의 위 수필
그 공간에 낡은 잠바를 걸친 한 사람이 들어와 커피 한 잔을 시키고 한쪽 구석에 앉아 책을 본다. 그 모습을 “갑자기 마른 햇살을 돌돌돌 말듯 중얼거리며 콕콕콕 활자를 씹는 소리”로 표현한다. 그리고 그 “자연스런 모습에서 나는 순간 절망을 안는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위의 인용문에서 보듯이 영상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하고 하나의 영화 장면을 보는 듯하다. 작가는 그 상황을 감각적으로 묘사하여 보여준다. 그리고 작가는 위의 인용문에 이어 “묵은 도시 안에서 새 꿈을 꾸는 사람들은 낯선 것을 대신하는 침묵에 익숙해지면서 스스로의 구멍으로 파고들어가고 있다. 침묵이 만들어내는 무한한 공간에 집을 지으며 사유의 시간을 만들어 가고 있다. 그곳에 살면서 또한 그곳에 있지 않은 듯 그곳의 거리는 비밀스럽게 요란하며 낯설고 고요하다”로 표현한다. 여기에서 “침묵에 익숙해지면서 스스로의 구멍으로 파고들어가”는 새 꿈을 꾸는 사람들이 ‘달팽이’일까? ‘스스로의 구멍’이란 ‘달팽이 집’을 말하는 것일까? 그러나 ‘그’의 존재는 아직도 오리무중이다. “후회하지 않는 모습으로 당당하게 내 앞에 나타나 다시 태어나기라도 한 것처럼 약간의 허풍을 떨면서 어떤 형식을 빌어서든지 아주 반갑게, 놀라운 표정으로 왠일이세요? 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그’의 정체는 불명이다. “그 알 수 없는 도시를 찾아온 나를 향해 그 땅의 점령자처럼 인사를 건”네었으면 하는 ‘그’는 이 수필 분량의 반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지금의 이 쓸쓸함을 잊”게 해줄 ‘그’는 아직 없다. 내레이터인 작가가 친구로부터 질타받은 “세상의 명료함의 정당성을 들어 (…) 부정확한 것에 대한 확인과 지극한 애정의 표현을 과감하게 보여야 한다”는 그 대상은 아직도 안개 속에 있다.
그런 뒤, 이 수필에서는 종반부에 들어서면서 비로소 ‘달팽이’에 대한 언급이 등장한다.
그저께 밤까지 내가 잠든 사이에 밤마다 내 창을 타고 다니며 그림을 그리는 달팽이를 어젯밤에는 만나지 못했다. 날이 새도록 불이 켜있는 창을 달팽이는 어느 구석에 숨어서 지켜봤을까, 느린 촉수를 이리저리 바지런하게 굴렸을 달팽이, 자신의 정체를 결코 드러내는 일 없이 내가 잠든 사이에 환상의 그림을 창 가득 그려놓고 미끄러지듯 숨어버리는 달팽이가 낯선 사람의 출현으로 빛에 떠밀려 어느 구석에 숨어 있다가 내게 올 기회를 놓쳐 버렸다. 끈끈한 액을 밀어내며 자신의 마음을 풀어쓰는 비밀의 문자들을 어젯밤에는 어디에다 감춰뒀을까, 그것이 사랑이었거나, 절망이었다 해도 나는 다 받아 주었을 텐데 쓰지 않고 숨겨 두었을 문자가 못내 궁금하다.
-편성희의 위 수필
작가가 잠든 사이에 창에 그림을 그리는 달팽이. 어느 구석에서 나를 지켜보는 달팽이. 자신의 마음을 풀어쓰는 비밀의 문자를 감춘 달팽이. 문자의 내용이 사랑이든 절망이든 작가가 수용할 수 있지만 자신을 숨기고 있는 달팽이. 그 달팽이가 표상하는 것은 무엇일까? 더 읽어보자.
잠자고 있는 나를 보면서 침묵으로 그렸을 광활한 세계의 펼침을, 아침이면 잠에서 깨어나 침대의 언덕에 앉아 그 미묘한 길의 흔적을 따라 한참을 보게 된다. 어둠 안에 존재하는 것들을 사랑한다 하면서 고단하여 휴식을 취하고 있을 달팽이의 이름을 불러보기도 한다. 어쩌면 서로가 서로에게 연민을 느끼는 순간이기도 하다.
골목길을 바쁘게 내려와 우리 앞에 와서 서툴게 인사를 나누는 그는 달팽이의 집에서 막 나온 모습과 같다. 세상을 아직도 즐기지 못하는 청춘의 고뇌가 묻어나 보인다. 어디쯤에서 약속된 미래는 오고 있는 것일까, 끊임없이 미래를 당겨보고자 하지만 더디게 세상은 다가오고만 있다. 그의 슬픔의 밑바닥에는 어떤 노래들이 고여 있을까, 언제쯤 나는 그의 노래를 생경하게라도 들어볼 수 있을까. 그의 내부 깊숙이 숨겨진 신비로움을 발산할 기회는 오고는 있는 것일까.
-편성희의 위 수필
여기에 이르러서 달팽이의 존재, 그 실루엣을 그릴 수 있는 단서를 발견하게 된다. “어둠 안에 존재하는 것들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고단하여 휴식을 취하고 있을” 달팽이. “세상을 아직도 즐기지 못하는 청춘의 고뇌가 묻어나”는 달팽이. 슬픔이 고여 있을 노래를 신비로움으로 발산하는 달팽이. 그것은 작가에 있어서의 뮤즈muses? 문학혼? “아주 어두워져야 밖으로 나오는” 그 무엇. “어둠을 같이 건너온” 고민, 작가의 상념이 ‘달팽이’로 표상된 것일까? 아니면 그 이상의 그 무엇, 고도god일까? 이 수필의 제목인 ‘달팽이가 오는 시간’은 위의 인용문에 있는 것처럼 “서로가 서로에게 연민을 느끼는 순간”일 것이다. “빛이 되고” 마는 그의 밤의 세계. 청춘의 절대적인 힘, 절망이라는 것을 반짝이게 하는 그것. 그것은 작가의 문학혼일 것이다. 그래서 작가 편성희는 “유리창 가득 스미는 빛이 내는 반짝임을 싸안으며 어딘가로 무한 질주”하게 된다. “놓고 온 사람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하지만 그것이 아닐 수 있다. ‘그’라는 존재는 특정한 한 사람일 수도 있다. 예컨대, 엉뚱할지는 몰라도 ‘실업자 청년’ 혹은 그것과 맞먹는 ‘좌초한 영혼을 가진 사람’들을 표상하는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해석을 가능케 하는 이 수필의 상징구조 혹은 은유구조는 ‘말하기’가 아닌 ‘보여주기’ 방식에 비중을 두어 표현해주었기 때문이다. ‘보여주기’는 독자의 상상력을 요구한다. 그 이전에 작가의 상상력을 요구한다. ‘보여주기’ 방식으로 문장을 서술할 때는 비유구조와 상징구조를 먼저 생각해야 하고 작가적 상상력을 필요로 하게 된다. 그런 반면 독자에게도 그것들을 강조한다. 그런 점에서 좀 더 문학적이지는 않을까?
이와는 달리, 허창옥의 수필 <지금 정말 좋은 것은>은 말하기에 치중한 수필이다.
플라타너스 가지들이 바람에 건들건들 흔들린다. 가지들이 건들거릴 때 넓고 푸른 잎사귀들도 앞과 뒤를 이리저리 뒤집으며 바람을 즐긴다. 보이지 않지만 그 뿌리도 이때 세포를 한껏 열고 토양을 만족스럽게 받아들일 터, 우듬지의 마지막 한 잎조차 그 숨결을 놓치지 않고 깔깔대고 있으려니. 지금 저 나무를 하염없이 바라보며 근심을 내려놓는다. 천상과 지상 사이에 바람이 있고 햇살이 있어서 나무가 살아있다. 나도 살아있다. 살아있음이 좋다.
등짐이 무겁다. 고뇌에 짓눌린다. 병고가 괴롭다. 만만치 않은 문제들이 산적해 있으나 다 헛소리다. 지금 숨 쉬고 문자판을 두드리면서 세상의 온갖 소리를 듣는 것이 정말로 좋다. 소리라! 그랬다. 한때는 소리가 싫어서 고요를 넘은 적요를 원했었다. 때에 따라, 곳에 따라 혼자 있기를 그래서 모든 소리가 멎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하지만 이즈음 소리들이, 온갖 소리들이 점점 좋아진다. 소리가 좋아진 건 아흔의 할머니가 텔레비전 볼륨을 한껏 올려놓는 까닭을 짐작하면서부터이다. 소리는 할머니에게 매순간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장치였다. 할머니는 적막이 싫었다. 소리가 멈춘다는 건 곧 죽음을 의미했던 게다. 꼬맹이들의 재재거리는 말소리가 세상을 채운다. 수다에 열 올리는 파마머리 여자들의 시끌시끌한 말소리에는 사람살이의 인정이 배어있고, 온갖 애환이 서려있다. 시시비비 언성을 높여서 이 할망구 저 영감탱이! 삿대질하는 어르신들 아직도 정정하시다. 그 소리들이 없는 세상은 상상도 하기 싫다. 소리들이 좋다.
-허창옥의 <지금 정말 좋은 것은> 서두 부분
허창옥의 수필 <지금 절말 좋은 것은>의 서두 부분 2단락을 인용했다. “플라타너스 가지들이 바람에 건들건들 흔들린다.”다로 시작되는 첫 단락은 ‘보여주기’이고, “등짐이 무겁다.”로 시작되는 두 번째 단락은 ‘말하기’ 방식으로 기술되어 있다. 그리고 그 다음의 문장들도 ‘말하기’ 방식으로 작가가가 말하고 싶은 메시지를 속도감 있게 보여주고 있다. 이 수필의 첫 단락은 나무와 바람과 햇살을 묘사하여 ‘모든 생물이 살아있음’을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한 서술방식을 취한다. 그리고 두 번째 단락부터는 이 수필의 제목 ‘지금 정말 좋은 것은’을 속도감 있게 설명하기 위해 ‘말하기’ 방식을 차용하고 있는 것이다. ‘아흔 할머니와 텔레비전 볼륨’ ‘신명나는 우리 가락들’ ‘작가의 낮잠과 게으름’ ‘온갖 소리’들을 설명하여 작가가 ‘지금 정말 좋은 것은’ 무엇인가를 이야기하기 위해 ‘말하기’ 방식에 비중을 두어 기술해나간다.
‘말하기’와 ‘보여주기’는 속도pace와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다. ‘말하기 혹은 요약하기’는 속도가 늦는 반면에 ‘보여주기 혹은 장면’은 속도가 빠르다. 또한 문장의 운율도 내러티브의 속도를 좌우하는데 간결하고 단순한 문장은 속도를 높이고, 문장이 길고 층을 이루면 속도는 늦춰지게 되어 있다. 이러한 것들도 ‘말하기’와 ‘보여주기’와도 깊은 관련이 있다.
한편, ‘말하기’와 ‘보여주기’는 즉시성immediacy과도 관련을 가지고 있다. 즉시성은 사실주의를 고수하는 수필의 경우에는 핵심적인 개념일 수 있다. 즉시성은 작가가 체험한 이야기 속에 독자가 존재한다는 느낌을 가질 때 감동을 배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는 ‘보여주기’ 방식이 효과적이다. ‘말하기’는 즉시성을 띠기 어려운 반면에, ‘보여주기’는 즉시적인 효과를 내기 때문이다. 하지만 속도감을 고려할 때 ‘말하기’ 방식 또한 간과할 수 없게 된다.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 메시지를 직설적으로 전언하는 데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가의 상상력 문제와 ‘보여주기’ 문제와의 유기적 구조는 주목해야 할 문제이다.
유한근 ------------------------------------------------
동아일보 신춘문예 평론부분 당선, 시집 ≪사랑은 흔들리는 행복입니다≫ 외. 평론집 ≪문학의 모방과 모반≫, ≪현대불교문학의 이해≫, ≪한국수필비평≫ 등 다수. 명상언어집 ≪별과 사막≫. 동화집 ≪무지개는 내 친구≫ 등 저서 논문 다수, 만해불교문학상, 한국문학평론가협회상, 신곡문학상 대상, 여산문학상 등 수상, 현 디지털서울문화예술대학교 교수. 종합문예지 ≪인간과문학≫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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