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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과비평 2013년 5월호, 사색의 창] 상처, 그 이름 앞에서 - 안경덕

신아미디어 2013. 7. 11. 09:06

"상처와 대항하고 이겨내는 방법은 몇 단계를 거친다. 태어날 때의 고통은 힘찬 울음으로, 유아기는 말로, 청년기에는 힘으로, 어른이 되면 지혜로 표현한다. 사물은 사람과 달리 만들어지기까지 잘리고, 깎이고, 달구어져야 제대로 된 이름을 얻는다. 견고하면서 온전한 물건일수록 상처의 부피가 큰 편이다. 이를테면 조각가의 예리한 칼날을, 대장간의 뜨거운 불꽃을 감내한 만큼 품질의 우수성이 뛰어나다. 어찌 보면 글쓰기도 이와 같다. 다 쓴 글을 읽고 또 읽고, 군더더기를 솎아내고 가지를 쳐내는 퇴고 과정을 수없이 거쳐야 문장이 매끄러워지지 않던가."

 

 

 

 

 

 

 상처, 그 이름 앞에서    -  안경덕


   어릴 적에 얼굴을 다친 적이 있다. 냇가에서 오빠와 오빠 친구가 물장난을 하다 던진 돌이 내 얼굴에 날아들었다. 아픈 통증보다 철철 흐르는 붉은 피가 더 무서워 얼마나 크게 울었는지 모른다. 잔물결로 일렁이던 냇물도 어찌할 바 몰라 수군거리는 듯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 울음에는 손자와 손녀를 편애하는 할머니께 손녀를 똑같이 사랑해 달라는 간절함이 숨어 있었다. 그 사고로 오른쪽 입술 위에 열두 바늘을 꿰매는 큰 상처가 났다.
   이 흉터는 내게 지울 수 없는 상흔이다. 아직도 몹시 피곤하거나 심한 몸살을 할 때 작은 경련을 일으킨다. 아마도 흉터 속에 그때의 울음이 잠자고 있는 모양이다. 그럴 때마다 눈물을 바가지로 흘렸던 기억이 생생하다. 좋은 기억은 세월 따라 희미해지지만. 이 흉터를 머플러로 은근슬쩍 가릴 수 없는 것 또한 상처다. 여기에 세상이 할퀴고 간 것, 삶의 쓴맛이 남긴 것, 선입견, 열등감, 자격지심 등을 껴안고 산다.
   상처와 대항하고 이겨내는 방법은 몇 단계를 거친다. 태어날 때의 고통은 힘찬 울음으로, 유아기는 말로, 청년기에는 힘으로, 어른이 되면 지혜로 표현한다. 사물은 사람과 달리 만들어지기까지 잘리고, 깎이고, 달구어져야 제대로 된 이름을 얻는다. 견고하면서 온전한 물건일수록 상처의 부피가 큰 편이다. 이를테면 조각가의 예리한 칼날을, 대장간의 뜨거운 불꽃을 감내한 만큼 품질의 우수성이 뛰어나다. 어찌 보면 글쓰기도 이와 같다. 다 쓴 글을 읽고 또 읽고, 군더더기를 솎아내고 가지를 쳐내는 퇴고 과정을 수없이 거쳐야 문장이 매끄러워지지 않던가.
   글과 말은 남에게 뜻을 전달한다. 하나 한번 내뱉은 말은 다시금 돌이킬 수가 없다. 무심코 던진 말이 날카로운 창과 가시가 될 수도 있고, 그 상처에 바를 부드럽고 순한 연고도 될 수 있다. 말에도 계급이 있다. 말을 글 다듬듯 하면 옥이요, 마음에 날을 세워 쓰면 칼이라고 했다. 말을 할 때는 상대가 받을 위안이나 상처의 부피를 알지 못한다. 말에서 받는 위로는 보약이 되고, 상처는 박힌 못을 빼낸 자국처럼 가슴에 남는다. 언제 받게 될지 모르는 것이 상처다. 그 예방 차원으로 핀셋과 소독약, 약솜을 소지해야 되리라. 생채기가 나면 염증을 닦아내고, 곪지 않도록 소독을 하게 말이다.
   언제부턴가 인권 침해가 빈번하다. 무인 카메라가 밤낮 사람을 감시하느라 두 눈을 부릅뜨고 있다. 무인 카메라는 주로 도로에 높게 세운 철재 막대기나, 은행창구, 백화점, 대형 상가, 지하 주차장 등의 천장에 설치해놓았다. 이것들과 눈이 마주치면 무언가 모를 묘한 감정이 인다. 불법을 다스리기 위한, 법을 위반한 사람을 찾아내는 탐지기이지만 어쩐지 그 눈빛이 곱지만은 않다.
   인생이란 상처 속을 걷는 것 같다. 이처럼 개인의 사생활이 노출되는 데다, 도처에 도사리고 있는 이런저런 사고의 위험성이 늘 뒤따라 다닌다. 상처가 될 많은 요소들을 미연에 따돌릴 수 없는 게 현실이다. 하지만 상처가 때로 삶의 주축이 되기도 한다니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이슬비도 상처를 받는다고 한다. 무엇이든 상처를 받는다는 뜻이다. 조용하고 가녀린 이슬비의 상처는 무엇일까. 여린 빗줄기를 흔드는 바람일까. 그렇다고 보면 햇빛엔 구름이, 구름엔 비가 되겠다. 잔잔한 호수에 돌을 던지면 파문이 인다. 호수에 상처를 준 것은 돌이다. 하지만 돌을 던진 사람이 돌보다도 먼저다.
   아들이 첫돌을 막 지났을 때 공중목욕탕에서 미끄러졌다. 여리고 보송보송한 이마를 다쳤다. 나는 피투성이 된 아이를 급한 대로 포대기에 싸안고 내 옷은 입는 둥 마는 둥 병원부터 찾아 나서야 했다. 젖은 머리에서 흘러내리는 물과 눈물이 범벅됐다. 터진 살을 꿰맬 때 아이가 악을 쓰며 운 울음이 내 가슴에 파편처럼 박혔다. 지금도 불쑥불쑥 그날의 통증이 찾아온다. 돌이킬 수 없는 일을 당한 것은 내 잘못인데 목욕탕 바닥이 너무 미끄럽다고 불평을 해댔다.
   어디 그뿐인가. 어제는 내가 자동차가 오가는 대로 옆 인도에서 앞으로 사정없이 넘어졌다. 양 손바닥과 팔꿈치에는 피멍이 들었고, 무릎이 깨진 것과 면바지가 뚫어진 면적이 같았다. 보도블록의 벌어진 틈보다 내 가슴이 더 휑했다. 길을 새로 포장한 지 얼마나 된다고, 왜 아귀가 어긋나느냐고, 넘어진 것은 순전히 내 탓이건만 애꿎은 길에다 대고 생트집을 부렸다. 철없었던 그때의 아기 엄마 수준을 삼십 수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넘지 못한 것이다.
   예전에 할머니가 어린 손자 손녀가 문에 부딪히면 문에다 ‘땠지, 땠지.’ 땅에 넘어지면 땅에다 ‘땠지’라고 했다. 그 말이 아픈 아이한테는 위로가 됐겠지만 그 ‘땠지’ 문화가 낳은 것이 내 잘못을, 남 탓하는 버릇을 만들지는 않았을까. 이 또한 내가 할머니 탓을 하고 있다. 타성에 젖어 낡은 인식을 깨지 못한 내 스스로가 민망스럽다.
   “내 탓이오.”라는 문구에는 상당한 의미가 담겼다. 원망과 미움이 없다. 대다수 사람들은 좋은 일, 잘한 일은 본인 덕이고, 나쁜 일 못한 일은 남 탓을 하지 않는가. 내 탓은 온전히 마음을 비운 뒤에야 할 수 있으니 자신을 탓하는 게 어찌 쉽겠는가.
   ‘한쪽 눈을 잃어도 그나마 다행’이란 말처럼 무슨 일이든 아래로 견주면 마음이 편하다. 내 얼굴의 흉터는 시냇가의 옛 추억이라고 하고 싶다. 그때 내가 아침마다 오빠와 동생들을 쭉 거느리고, 면경같이 맑은 냇물에 걸레를 씻고 세수를 한 것과, 두레상에서 옹기종기 앉아 아침밥을 먹고 나란히 학교 가는 것이 마냥 즐거웠다. 그리고 무릎을 다친 것도 나이가 든 탓이라고 하고 싶다. 길에서 무단히 넘어진 일도 젊었을 때는 없었기 때문이다.
   추억엔 정이 묻어난다면, 상처는 불청객이다. 그리고 흔적은 인생길에 남기고 싶은 것이리라. 상처, 그 이름 앞에서 나는 언제나 다소곳해진다.

 

 

안경덕  ---------------------------------------
   ≪수필과비평≫ 등단.  수필집: ≪나무들의 왈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