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대선은 ≪삼국지≫를 연상할 정도로 치열한 싸움을 끝내고 대통령을 뽑았다. 유비처럼 덕을 갖춘 지도자가 관우의 의리와 제갈량의 지혜를 가진 참모들을 얻어서 남북을 통일할 기반을 갖추어 나간다면 삼국지는 한낱 중국의 소설이 아니라 우리의 현실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다시 읽은 ≪삼국지≫ - 최문석
≪삼국지≫를 다시 읽어보기로 했다.
스승으로 모신 제갈량이 스무 살이나 나이가 어리다는 사실과 아우로 거느린 관우가 오히려 나이가 많다는 사실을 새롭게 알았을 때 이 같은 일이 가능한 유비의 매력이 과연 무엇이었는지 새롭게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중학생 때 김용환 선생이 그린 만화 <코주부 삼국지>를 만난 이후 그 인물들의 매력에 빠져 수 차례 틈만 나면 <삼국지>를 읽은 탓에 술자리에서 ‘삼국지’ 이야기만 나오면 나는 제법 권위자인 양 큰소리를 쳤다. 그때마다 유비보다는 조조의 인물을 높이 평가한다고 열을 올렸다. 조조는 실력이 있다느니 저서가 있다느니 문학을 안다느니 하면서 사대주의적 유가의 생각에 젖어서 막연히 유비를 존경하는 것이라 몰아세우곤 했다. 그런데 나이 때문일까. 아니면 요즘 세상의 각박한 인심 때문일까. 좀 어수룩하여서 남에게 속을 줄도 알고 손해를 보면서도 세상의 이익을 위해서 일하는 이들의 아름다움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도서관에서 빌려온 시공사 판 ≪삼국지≫에는 지도와 그림이 많고 청소년들을 위한 관직이나 용어의 설명이 많아 공부를 해 가면서 읽을 수가 있었다. 막연히 도원결의의 장면만을 연상하고 있던 나는 그 결의가 도원이 있던 유주현의 탁군 장비의 집에서 있었으며 그 위치가 중국의 후한 13주와 비교하여 어디쯤인지를 살펴 갈 수가 있었다.
≪삼국지≫를 흐르는 최고의 가치는 덕성과 의리로 요약할 수 있으며 그 상징적 인물이 유비와 관우이기 때문에 소설은 조조를 간웅으로 비하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유비의 덕을 나타내는 최고의 장면이 장판교 싸움이라 생각된다. 그때 유비는 조조에게 크게 져서 형주의 유표에게 몸을 맡기고 그의 호의로 신야라는 작은 성에 머물면서 삼고초려로 제갈량을 막 참모로 모신 후다. 하후돈이 거느린 십만 대군이 신야를 치러오는 것을 제갈량의 화공으로 간단히 물리친 후라 관우 장비마저 제갈량을 신뢰했다. 그러나 조조가 직접 오십만 대군으로 공격을 해오는 데는 신야를 버리고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양양으로 가려 했으나 유표의 아들 유종이 이미 조조에게 항복하여 성을 바친 후라 유비는 백성을 이끌고 양양대로를 따라서 강릉으로 가고 있었다. 십만이 넘는 백성을 삼천 명 남짓한 군사로 하루에 십 리나 겨우 가고 있는 형편인데도 나를 따르는 백성을 어찌 버리고 갈 수 있느냐는 유비의 고집을 꺾을 수 없어 결국은 장판에서 조조 군에 부인을 잃고 아들은 조자룡이 겨우 구해 살려내었다.
장비가 스무 명 정도의 군사로 말꼬리에 나뭇가지를 달아 숲 속에서 먼지를 일으키며 싸우자고 소리치는 바람에 조조 군이 놀라 되돌아가고 유기에게 군사를 빌려온 관우의 도움으로 강릉을 포기한 채 겨우 하구로 가서 적벽대전을 치르게 되는 사연이다. 비록 패하여 목숨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백성과 함께하겠다는 애민정신이 바로 유비의 덕이며 이러한 정신이 결국 촉나라를 세우고 중국사람들의 숭앙을 받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 진심을 담은 겸양의 정신이 있다. 서주를 맡아달라는 도겸의 청을 물리치고 소패에 머문 일이라든가 조조가 온다 할 때 제갈량까지 나서서 유표가 죽은 후 채 부인과 그의 동생 채모가 짜고 맏이인 유기에게는 초상난 일을 알리지도 않고 둘째 아들 유종을 후계로 세운 일을 핑계 삼아 양양을 치고 대항할 것을 권했지만 유표와의 옛일을 말하고 그 아들을 사로잡고 땅을 뺏으면 훗날 저승에서 형님을 뵐 수 없다며 결국은 신야를 버린 일이 다 유비의 덕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관우는 의리의 상징이다. 도원결의를 할 때 관우는 나이를 드러낼 처지가 아니었다. 고향에서 힘깨나 쓰는 인간 하나가 사람을 못살게 굴어서 그를 죽이고 몸을 피해 세상을 떠돌고 있을 때였다. 도원결의에서 형으로 모신 유비를 평생 받들어 싸움터를 헤매었다. 대표적인 사건이 조조를 떠나 그를 막는 여섯 장수를 목 베며 유비를 찾아간 사건이다. 유비가 서주성에서 조조에게 패하여 뿔뿔이 흩어질 때 관우는 가족들이 있는 하비성을 지키고 있었다. 하비성이 함락당하고 흙산에서 조조 군에 포위되어 어쩔 수 없을 때 조건을 들어 항복했다. 황제에게 항복하는 것이며 유비의 가족을 돌보아야 하며 유비의 소식을 알면 곧바로 떠날 것이란 세 가지였다. 조조는 여포가 타던 적토마까지 주면서 온갖 후의를 베풀지만 원소와의 싸움에서 안량과 문추를 베어 조조의 은혜를 갚고 유비가 원소에 의탁하여 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형수들을 모시고 떠난 것이다. 원소가 자기 장수를 죽인 것을 알고 있으므로 목숨까지도 위태로운 일이 아닌가? 그러나 후일 적벽대전에 패해서 조조가 쫓겨 관우에게 목숨이 달렸을 때 군령을 어기고 살려 보낸 일 또한 의리를 위해서 목숨을 건 일이 아니던가. 중국 사람들은 관우를 무사의 성인으로 섬긴다. 우리나라에도 관우의 사당이 여러 곳 있어서 동대문 밖에서 어릴 때 놀러 갔던 기억이 있다.
유비는 제갈량을 얻기까지는 기반이 될 땅을 갖지 못한 채 여기저기로 떠돌았다. 어릴 때 동문수학을 한 공손찬을 비롯하여 조조 원소 도겸 유표 등을 찾아가 도움을 받으면서 생명의 위협을 여러 번 느끼기도 했다. 제갈량의 지혜로 조조와 손권의 싸움에서 어부지리를 얻어 겨우 형주를 차지하고 촉나라를 세울 기반을 잡은 셈이다. 조조 군사들을 몇 번을 물리친 제갈량은 실력이 있다. 그리고 병서를 써서 저서를 남기고 명문 출사표는 읽을 때마다 우리를 감동시킨다. 어찌 보면 <삼국지>는 조조와 제갈량의 싸움이라 해도 크게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유비는 스무 살이나 어린 제갈량을 스승처럼 극진이 대우하여 아들까지도 섬기는 의리를 지키게 했다. 마지막에 아들들을 부탁하면서 나라를 다스릴 능력이 안 되면 제갈량이 직접 나라를 차지해도 좋다고까지 말하면서 신뢰를 보였다. 그러한 신뢰의 바탕 위에 그들은 꿈이 같았다. 개인의 영달이나 재물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천하를 평정하여 한나라를 부흥시키고 백성을 편안히 하겠다는 큰 뜻이 통했기에 끝까지 의리를 지키는 것이라 생각된다. 이러한 정신은 위나라를 치러 가면서 후주 유선에게 올린 출사표에 절실히 드러난다. “부디 폐하께서는 저에게 역적을 치고 한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일을 맡겨주십시오. 만약에 이루지 못하거든 저의 죄를 다스려 돌아가신 황제의 영전에 알리십시오.” 대를 이은 충성과 신뢰에 가슴 벅찬 글이다.
이번 대선은 ≪삼국지≫를 연상할 정도로 치열한 싸움을 끝내고 대통령을 뽑았다. 유비처럼 덕을 갖춘 지도자가 관우의 의리와 제갈량의 지혜를 가진 참모들을 얻어서 남북을 통일할 기반을 갖추어 나간다면 삼국지는 한낱 중국의 소설이 아니라 우리의 현실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최문석 ------------------------------------------
'월간 수필과 비평 > 수필과비평 본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수필과비평 2013년 5월호, 지상에서 길찾기] 대를 위한 소의 희생 - 구근 (0) | 2013.07.01 |
|---|---|
| [수필과비평 2013년 5월호, 세상마주보기] 어머니의 보따리 - 최장순 (0) | 2013.06.24 |
| [수필과비평 2013년 5월호, 세상마주보기] 삐치는 50대 욱하는 60대 - 임동옥 (0) | 2013.06.21 |
| [수필과비평 2013년 5월호, 세상마주보기] 살바도르 곤잘레스 - 윤석희 (0) | 2013.06.21 |
| [수필과비평 2013년 5월호, 세상마주보기] 고지리 - 소진섭 (0) | 2013.06.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