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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과비평 2013년 4월호, 사색의 창] 에스프레소(espresso) - 이현수

신아미디어 2013. 5. 2. 08:24

"나는 커피의 향내에 어울리지 않는 우울하고 둔중한 삶의 무게를 느끼곤 한다."

 

 

 

 

 

  에스프레소(espresso) 이현수


   ‘바리스타(barista)’란 단어를 내가 처음 들어 본 것은 아마 30여 년 전 일일 것이다. 소위 ‘양촌리 다방’에서 에그커피나 쌍화차를 즐겨 마시던 시절, 바리스타가 원두커피를 끓여준다는 말은 들어본 적도 없었다.
   술을 좋아하던 P 교수는 취기가 거나해지면 불란서로 유학 보낸 딸 이야기를 가끔 꺼내곤 하였다. 그 딸아이가 아르바이트를 하려고 ‘바리스타인지 뭔지’ 하는 일을 배우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때는 바리스타란 말이 무슨 뜻인지, 어떤 직업을 말하는지도 모르고 막연히 짐작을 하면서 들었다. 처음에는 자랑하는 말인가 생각했더니, 몇 번 듣다 보니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았다. 생소한 그 말의 의미도 모르거니와 어떤 일을 하는 것인지도 잘 모르는데, 천리타국에 유학을 보낸 딸아이가 그런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선배 교수는 수치스럽게 여기고 있었던 것 같다. 유별난 선비의식을 지니고 있었던 그 P 교수는 애지중지하는 딸아이가 음료 조리를 하는 서비스 업종에서 일한다는 사실을 쉽게 용인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 시절 대학 교수의 봉급으로 유럽 유학생 자식을 둔다는 것은 언감생심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요즈음 소위 커피전문점이란 곳에는 으레 바리스타가 한 사람쯤 있다고 한다. 그 P 교수의 따님은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사는지 불현듯 궁금해진다. 요즈음 이름 있는 바리스타는 상당한 대우를 받는다는데, 그때 배웠던 그 기량을 잘 활용하면 아마 그녀는 지금쯤 우리나라 제일의 바리스타로 각광을 받고 살 수도 있으련만, P 교수도 타계하고 말았으니 알 길조차 없다.
   며칠 전 우리 내외가 제자들에게 점심 대접을 받고 그녀들이 자주 다니는 커피전문점으로 함께 갔다. 졸업한 지 오랜 세월이 지난 50대 후반의 제자들이 가끔 우리 내외를 불러내어 이런저런 세상사는 이야기도 하면서 식사 대접을 하곤 한다. 그날따라 짙은 커피 향내가 이국정서를 자극하는 운치 있는 분위기가 좋았다. 메뉴판에 보이는 커피의 종류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다. 그 가운데 어느 것을 고를지 몰라 망설이다가 평상시 맛보지 않은 커피를 시키고 싶었다.
   쭉 커피 이름을 훑어내려 가는데 ‘에스프레소’라는 썩 매력적인 이름이 눈에 띄었다. ‘옳다.’ 하고 그걸 시켰더니 제자들의 표정이 약간 의외라는 듯 심상치 않았다. 속으로 ‘앗차!’ 싶었지만 한 번 내친김이니, 모른 채 버티기로 했다.
   한참 있다가 가져온 것을 보니, 웬걸 다른 사람들 앞에 놓인 찻잔과는 달리 내 앞에 놓인 커피 잔은 유난히 작았다. 마치 옛날 장 종지 비슷한 조그만 잔에 진한 홍삼 엑기스와 흡사한 것이 조금밖에 들어 있지 않았다. 남들은 커피 잔을 들어 유연히 마시는데 나는 어찌할 줄 몰라 머뭇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주위를 곁눈질하며 망설이다가 잔 곁에 놓인 티스푼으로 조금 떠서 입에 넣어보았다가 소스라치게 놀라 엉겁결에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무슨 커피 맛이 그리 쓰고 독하게 혀를 자극하는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이런 내 모습을 본 일행은 드디어 폭소를 터뜨렸다. 미리 일러주고 싶었지만 내가 무안해할까 봐 그냥 두고 본 것이 탈이 되었다고 실토를 하였다. 데운 물로 희석을 해서 두 컵을 더 만들어 마셔도 소태맛인 것을 모르고 함부로 잘난 체하려다가 망신을 당하고 말았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에스프레소는 커피 원액으로 여기에 무엇을 첨가하느냐에 따라서 아메리카노가 되기도 하고, 카푸치노 또는 라떼가 되기도 한다는 것이었다. 그 집의 바리스타는 제법 커피 맛을 알고 있는 마니아가 온 줄 알고 아마 정성을 들여 에스프레소를 만들어 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내 입 안에 남아 있던 그 쓴맛의 자극은 점차 약화되어 고소한 뒷맛으로 변하면서 커피 향의 여운과 함께 상쾌한 기분을 느끼게 하는 조화를 부렸다. 에스프레소는 이런 맛에 길들여진 커피광들이나 즐길 커피 진액임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이렇게 말하다 보니, 내가 제법 커피를 즐기는 생활을 하는 것처럼 오해를 받을지도 모르겠다. 솔직히 고백하거니와, 나는 커피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어쩌다 분위기에 어울리느라 한두 잔이라도 마시고 나면 뱃속이 편치 않는 순 토종산 체질이기 때문이다. 하루에 두어 잔의 커피는 치매 예방에도 도움이 된다기에 가능한 한 순한 커피라도 마시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나의 체질은 쉽게 순치되지 않는다.
   가끔 외식이라도 하는 날, 식후에 마시는 한 잔의 커피는 입맛을 개운하게 해 주어서 좋다. 비가 오거나 눈(첫눈이면 더욱 좋지.)이라도 내리는 날, 또는 무슨 일이 손에 잡히지 않고 마음이 뒤숭숭할 때, 때론 음악을 들으면서 홀로 마시는 한 잔의 커피는 인생의 우수를 더욱 짙게 해주어서 좋다.
   그러나 요즈음 마치 유행처럼 길거리마다 커피집들이 날로 늘어나고 있는 현상을 보는 마음은 별로 유쾌하지가 않다. 한 집 걸러 또 한 집, 제각각 유명한 프랜차이즈 커피전문점임을 내세우면서 호화로운 인테리어를 과시하고 있는 거리를 지날 때면, 무언가 모를 괴리된 감정의 골이 깊어지고 있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나는 커피의 향내에 어울리지 않는 우울하고 둔중한 삶의 무게를 느끼곤 한다.

 

 

이현수  -----------------------------------------
   ≪수필과비평≫ 등단,  수필집: ≪당신의 뒷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