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리적이지 못한 나도 현실에 부합해 논리적인 척 그 틈에 끼여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내게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처럼 늘 어색하다. 논술이라는 말은 나에겐 또 다른 타인의 시선이며, 언제든지 벗어던지고 싶은 나의 포장이었다. 가치관과 현실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나는 녹지도 못하고 어정쩡해진 눈덩이가 되어버린다."
쉼표 - 현주
차 앞 유리에 쌓였던 눈이 녹다가 그대로 얼어버렸다. 며칠 동안 서울에 다녀오느라 제때 치우지 못했더니 바퀴 주변에도 얼음 턱이 생겼다. 가장자리부터 살살 떼어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한번 굳어버린 차가움은 며칠이 지나도 줄어들 줄 모른다. 1월의 어린 햇볕이 감당하기엔 버거운 일이었나 보다.
일주일이 지나도록 눈을 껴안고 있는 건 내 차뿐이었다. 혹시 비슷한 처지의 차가 있는지 둘러보아도 찾을 수 없으니 괜히 마음이 불편해졌다. 가끔 내가 소수에 속해졌다는 이유만으로 불안할 때가 있다. 타인의 시선으로 스스로를 보기 때문에 그 불안감은 더 커지는 듯하다. 마음 한구석에 숨어있는 타인의 시선은 별것 아닌 일에도 나를 한없이 작아지게 만든다.
눈송이는 평범한 일상에 작은 쉼표를 찍는다. 잠시 우리의 일상을 덮게 하고 첫사랑을 만난 듯 설레게도 한다. 생각나는 사람들에게 눈이 온다는 소식을 속보처럼 문자로 날렸다.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라 할지라도 짧은 문장에 감추어진 즐거움은 숨길 수가 없다.
추억과 현재가 공존하는 마법 같은 순간이 지나면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다. 그렇게 쌓인 눈은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사라질 것이지만 기다려 줄 여유가 없다. 미처 녹지 못한 눈덩이는 점점 골칫덩어리로 변한다.
아이의 독서 활동지 한 귀퉁이에 남겨진 낙서들도 눈덩이가 된다. 독서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만큼 아이들이 읽어야 할 필독서도 늘어만 간다. 혹시 나의 어설픈 지도 때문에 아이들이 책읽기나 글쓰기를 지겨운 학습으로만 느끼는 것은 아닐까. 논술과 토론 기술이 중시되는 분위기 탓에 진심으로 귀 기울여 듣는 법을 잊어가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논리적이지 못한 나도 현실에 부합해 논리적인 척 그 틈에 끼여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내게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처럼 늘 어색하다. 논술이라는 말은 나에겐 또 다른 타인의 시선이며, 언제든지 벗어던지고 싶은 나의 포장이었다. 가치관과 현실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나는 녹지도 못하고 어정쩡해진 눈덩이가 되어버린다.
시장바닥에 앉아 뜨개질하는 할머니를 본 적이 있다. 직접 만든 수세미나 덧신 같은 소품을 팔고 있었다. 할머니는 코바늘에 지나가는 바람을 걸어 구멍을 만들고 햇빛을 엮어 무늬를 만들었다.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자신이 가진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나도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도 끝까지 놓지 않을 행복한 일을 하고 싶다.
사람들은 현실을 무시할 수 없다고 한다. 세상일에 어리바리한 나를 답답해 할 때도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 틈에서 나 하나쯤은 타인의 시선을 내려놓을 수만 있다면 현실적이지 못하게 살아도 괜찮지 않을까.
일을 그만두는 친구에게서 책장 하나를 얻었다. 구석에 오랫동안 방치해두었던 상자를 꺼냈다. 안에 뭐를 넣어두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찌그러진 종이상자였다. 그 안에 넣어 둔 책들을 꺼내서 책장의 칸칸을 채워나갔다. 대부분 애들이 보다 만 참고서에, 내가 읽다 만 책이었다. 책 사이에 끼워 둔 책갈피가 그대로 있다.
책을 읽기 시작할 때의 호기심이 줄어들면서 글자 하나하나가 무겁게 느껴질 때가 있다. 무조건 완주에 목표를 둔 마라토너처럼 그 무게를 고스란히 이고 책을 읽어 나갈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단, 책갈피를 끼워둔 후 먼지가 뽀얗게 앉을 때까지 잊어버리면 안 되겠지만 말이다.
내가 걸어가는 길 위로 눈송이 같은 삶의 쉼표를 많이 발견했으면 좋겠다.
현주 ---------------------------------------------
≪수필과비평≫ 등단.
'월간 수필과 비평 > 수필과비평 본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수필과비평 2013년 3월호, 기획연재] 한국 현대수필의 문체론적 성찰 - 김상태 (0) | 2013.04.17 |
|---|---|
| [수필과비평 2013년 3월호, 수필의 전범을 찾아서] 수필집 ≪서재여적≫의 성격과 수필문학사적 자리 - 오양호 (0) | 2013.04.16 |
| [수필과비평 2013년 3월호, 사색의 창] 번데기와 주름살 - 한현수 (0) | 2013.04.15 |
| [수필과비평 2013년 3월호, 사색의 창] 축하중 - 정명희 (0) | 2013.04.15 |
| [수필과비평 2013년 3월호, 사색의 창]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있는 능력 - 임성숙 (0) | 2013.04.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