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하필 나보고 번데기를 먹으라고 권할까? 번데기같이 주름진 늙은이에 맞는 음식이란 뜻인가? 자문자답하며 나도 모르게 이마를 쓱 문질러보고 탁자 밑으로 내 손을 흘깃흘깃 들여다보았다. 내 손을 보니 윤기 없는 피부에 늙은이의 상징인 검버섯이 군데군데 피어나고 살갗이 주름 주름하다. ‘늙기는 늙었나 보다.’ 체념한 듯 혼자 중얼거려본다."
번데기와 주름살 - 한현수
“번데기 잡수세요.” 술안주로 내놓은 번데기 접시를 젊은이가 무심코 내 앞에 밀어 놓는다. 오랜만에 가진 회식자리 탓인지 시끌벅적하게 환담을 나누고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한 젊은 여자 회원이 또 윗사람을 공경한답시고 “번데기 드세요.” 하며 권한다. ‘번데기!’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며 후- 하고 한숨을 쉬어본다.
왜 하필 나보고 번데기를 먹으라고 권할까? 번데기같이 주름진 늙은이에 맞는 음식이란 뜻인가? 자문자답하며 나도 모르게 이마를 쓱 문질러보고 탁자 밑으로 내 손을 흘깃흘깃 들여다보았다. 내 손을 보니 윤기 없는 피부에 늙은이의 상징인 검버섯이 군데군데 피어나고 살갗이 주름 주름하다. ‘늙기는 늙었나 보다.’ 체념한 듯 혼자 중얼거려본다.
번데기를 비교한 말들이 생각난다. 키가 작은 사람을 가리켜 “뻔데기만 한 사람”, 꼬마사내 생식기를 가리켜 “뻔데기만 하네.”라고 한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올라 별생각이 다 들고 가슴이 답답하며 놀리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얼굴이 다 화끈거린다.
“그려 나는 늙어서 뻔데기나 먹을랑게…….”라고 한마디 했더니 갑자기 웃음바다가 되고 “선생님도 별소리를 다하시네요.” 하고 위로를 한다. 번데기 이야기는 한참 동안 야한 이야기를 섞여가며 꽃을 피웠다.
나는 시골에서 청년시절까지 자라며 대대로 이어 농촌 부업으로 해오던 누에고추 생산과정을 자세히 보았다. 그런 탓인지 번데기만 보면 고향생각, 어머니 생각이 난다.
누에 성장과정을 보면 참 신기하다. 알에서 깨어나 네 번의 잠을 자며, 탈바꿈 후에 입에서 실을 토하여 하얀 고치를 짓고 번데기로 변한다.
그렇게 변한 번데기는 한동안 죽은 듯 지내지만 마침내 자신의 몸을 감싸고 있는 허물을 벗고 아름다운 나방으로 다시 태어난다. 이렇게 완전변태 과정을 겪은 나방은 알을 낳은 후 죽는다고 한다.
이와 같이 한 마리의 멋진 나비나 곤충들이 알에서 유충, 번데기 과정을 거쳐 성충이 될 수 있듯이, 사람도 유년 시절 청년시절을 거쳐서 노년기를 맞아 황혼을 아름답게 수를 놓으며 생을 마감한다.
나는 할아버지, 어르신이란 반갑지 않은 존칭을 들으면서부터 가끔 거울을 들여다보며 한숨을 내쉬는 버릇이 생겼다. 언젠가부터 이마에 세월의 나이테 같은 주름살이 늘고 골이 깊어만 가기 때문이다. 어디 주름살뿐이랴. 희끗희끗 머리는 반백이 다되어간다. 거기다 세월 탓인지 3년 전에 맞춰 낀 돋보기안경을 써도 점점 시력이 약해져 눈을 게슴츠레 뜨고 얼굴을 찡그려야만 잔글씨를 읽을 정도다. ‘또 도수를 높여 안경을 바꿔 끼어야 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어느 유머 퀴즈에서 들은 문제가 생각난다. 노인이 외출할 때 꼭 준비해야 할 세 가지 물건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의 대답이 돋보기, 틀니, 보청기라고 한다.
요즘 부쩍 ‘세월에는 장사 없다.’라는 말이 실감이 난다. 사람이나 동물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나무도 고목이 되면 다닥다닥 껍질만 생기고 삭은 가지가 생기며 꽃과 잎이 작아진다.
그래도 마음은 청춘인지 젊은 척 흉내를 내려고 하고, 매사에 참여하고 싶어 기웃거려진다. “늙어갖고 그냥저냥 살죠 뭐…….” 하고 농담 삼아 건네던 젊은 여자 회원 멘트가 귓전에서 맴돈다. 그런가 하면 노년기에 한 가닥 희망을 주는 ‘사무엘 울만’이 쓴 <청춘靑春>이란 시구절이 생각난다.
청춘이란/ 인생의 어느 시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마음가짐을 말한다./ (중략) / 나이를 먹었다고 해서 사람이 늙은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관한 관심을 잃을 때 사람은 늙은 것이다/ 세월은 피부에 주름살을 남기지만/ 정열을 잃은 사람은 마음에 주름살이 잡힌다./ (후략)
‘늙었다고 포기하고 후회하지 말자.’ 지난날 몸도 마음도 푸르고 윤기 나는 삶의 세월이 있지 않았던가. 주름살이 늘고 피부가 거칠어지고 푸석한 생활이 됨은 세월이 주는 선물이요 연륜이라고 생각하자. 마음가짐을 새롭게 하고 꿈과 용기를 갖고 도전하자. 그래서 나는 가끔 <청춘> 이 시를 읊으며 힘을 내곤 한다. 몸은 늙었어도 마음은 청춘으로 생각하고 여생을 보내고 싶기 때문이다.
오늘 회식자리에서 번데기 드시라는 말에 잠시나마 오해했던 나의 편협하고 옹졸한 생각과 태도에 후회가 된다.
노인이란 말을 세월과 인생의 계급장으로 생각하고 편견과 과거에서 벗어나 시대에 맞게 새롭게 태어나고 생각과 삶을 바꿔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한현수 -------------------------------------------
≪수필과비평≫ 등단, 저서: ≪내 고향 토담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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