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과비평>에서 김상태교수님의 '한국 현대수필의 문체론적 성찰'을 기획연재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독자들에게 많은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블로그에서 본문 중에 있는 한글 옛글자의 표현이 어려워 공란으로 표시되어있으니 이점 양해를 바랍니다.(도서에는 표시가 되어있으니 도서를 참조부탁드립니다.)
한국 현대수필의 문체론적 성찰 - 김상태
1. 고전 수필
일찍이 필자는 “문학은 언어로 표현되는 창조적 예술”이라는 정의를 내린 바 있다. 그런데 언어는 두 가지 표현수단을 갖고 있다. 일상생활에서 말로 쓰는 언어와 표기문자로만으로서 쓰는 경우가 그것이다. 한국문학의 경우 오랫동안 이중적인 언어생활을 해 왔다. 훈민정음이 창제되기 이전과 그 이후가 그렇다. 실제의 생활에서 일반 대중이 쓰는 언어와 표기하는 문자 사이에는 큰 간극이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문학도 언어를 통해서 이루어내는 예술이라는 점에서 그 이전과 그 이후를 분명히 구분해야 한다. 현대에서의 문학개념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대중의 언어로 표현된 것만을 지칭한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선조들이 오랫동안 정성을 쏟아서 표현했던 귀중한 유산을 우리 문학에서 치지도외置之度外할 것인가. 우리의 고전문학은 9할 이상이 한자로 표기된 문학일 것이다. 더구나 당시로서는 나라의 엘리트들이 한문으로 기록된 문학만을 진정한 문학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문학 작품이란 인류의 귀중한 유산이기 때문에 다른 언어로 표현된 작품이라고 해서 폐기 처분할 것은 못 된다. 그런 점에서 국자로 쓰인 작품만을 우리 문학이라고 단정하자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다른 언어로 표현되기는 했으나 우리 선조들의 정서가 담겨 있다는 점에서 우리의 귀중한 문학 유산으로 간주하는 낙착이 된 듯하다. 그러나 문체론적 관점에서 볼 때는 그 일상생활에서 대중이 쓰는 언어로 표현한 문학과 그렇지 못한 작품을 분명히 구분할 필요가 있다. 한문으로 표현한 문학은 한문의 문체적 관점에서 보아야 할 것이고, 그 국자로 표현한 작품은 국문의 문체적 관점에서 보아야 할 것이다. 본고는 국문의 문체 관점에서만 논하기로 한다.
수필도 문학의 한 장르인 이상 두 가지 견해가 상존할 수밖에 없다. 정음 창제 이후 우리 국자로만 기록된 작품만을 우리의 수필 작품이라고 단정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문학적 유산에는 너무나 큰 공백이 생기게 된다. 당시의 엘리트들이라고 할 수 있는 사대부들의 작품은 거의 제외되고 아주 소수의 여인들이 쓴 작품밖에 거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 고전문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의 대부분은 우리 문학의 범위를 확대하고 있다. 양쪽을 다 포함시키고 있는 것이 대세이기 때문이다.
장덕순의 <한국수필문학사>를 보면, 우리 수필문학의 효시를 혜초의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있다. 이어서 최고운, 김부식, 이규보, 최자, 이제현, 서거정, 성현 등이 남긴 작품을 모두 우리의 수필 문학의 유산으로 간주하고 있다. 장 교수는 ‘실록’에 실려 있는 ‘표류기’나 실제 경험해서 기록한 몇몇 선비들의 ‘표류기’를 기행 일기의 백미百媚로 단정하고 있다. “15세기의 지리산 등반 기행”으로 쓴 김일손의 <두류기행록>도 우수한 수필 작품으로 꼽고 있다. 여러 선비들의 일기도 수필 작품에 포함시키고 있다. 이이의 <석담일기>, 이순신의 <난중일기> 등은 표기된 문자만 보지 않는다면 훌륭한 수필 작품임에 틀림없다. 상소문이나 ‘행장’, ‘유훈’ 등도 물론 훌륭한 수필 작품이다. 이렇게 본다면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한자로 기록된 수필 작품에서 제외시킬 수 없을 것이다. 이 외에 이덕무의 <북한산 기행>, 박제가의 <묘향산 기행>, 체재공의 <관악산 기행> 등 실학자들의 기행문 등이 훌륭한 수필 작품으로 거론되고 있다.
장 교수는 김인겸의 <일동장유가日東壯遊歌>를 수필 작품에 포함시키고 있다. 이 작품은 비록 ‘가歌’로 표제되어 있으나, 그 내용은 기행일기라는 것이다. 운율을 가졌다고 해도 너무나 일률적이라 큰 의미가 없을 뿐 아니라, 필자의 정감을 담기보다 눈에 보이는 사실의 기록에 충실하다고 해서 수필로 보고 있다.
우리의 국자로 쓰인 수필 작품은 이 저서의 맨 끝에 실린 <의유당 관북유람일기>와 내간뿐이다. 고전문학자들이 한자로 기록된 수필 작품을 우리 문학의 유산으로 포함시키지 않을 수 없는 안타까운 심정을 이해하고도 남지만 문체론적인 관점에서는 한자로 기록된 수필을 우리 문학으로 포함시킬 수 없다. 실제의 언어생활과 다른 문자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체론적인 관점에서는 다룰 수가 없다. 이상의 두 장르 외의 작품으로 박두서의 <요로원야화기要路院夜話記>를 고전수필로 다룰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2. 의유당 관북유람일기
<의유당관북유람일기>는 신대손의 아내 의령 남씨의 창작으로서 창작 시기는 1769년 즈음이다.1) <의유당관북유람일기>의 원본은 지금 전해지지 않고, 다만 가람 이병기의 주해본이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2) 필자도 류준경의 주해한 동명의 교주본을 보고, 이 글을 쓰고 있다. 이 작품은 함흥부 안에 있는 ‘낙민루’, ‘북산루’, ‘무검루’ 등을 유람한 ‘낙민루’와 ‘북산루’와 ‘귀경대’의 월출을 구경한 <동명일기>로 되어 있다.
함흥 만세교와 낙민뉘 유명다 더니 긔튝년 팔월 념 일 낙을 떠나 구월 초 이일 함흥을 오니 만세교 댱마의 문허지고 낙민누는 서흐로 성 밧긴듸 우하문 전형은 서울 흥인 모양을 의디야시대 둥글고 적어 계유 독교 간신히 드러가더라.
그 문을 인여 성 밧그로 빼그어 누를 지엇듸 두 층으로 대를 무으고 아라이 싸올녀 그 우희 누 지어시니 단청과 난간이 다 퇴락야시대 경치 정쇄야 누 우희 올라 서편을 보니 셩쳔강의 크기 한강만고 믈결이 심히 고 됴촐디 새로 지은 만세교 믈 밧그로 놉희 대여자히나 소소 노혀시니 거동이 무디게 휘온 듯고 기리 니로기 이 편의로셔 저 편지 가기 오리라 대 그럴니 업서 삼니 죡여 뵈더라. 강가의 버들이 례리하 대 그럴니 업서 삼니 죡여 뵈더라. 강가의 버들이 례로 만히 서고 녀염이 즐비여 별 결이 야시니 몃 가구믈 모를러라.
누상 마루쳥 널을 밀고 보니 그 아래 아득대 닥다리 노코져리 나가 문이 바히 적으대 침침야 시 못보다. 밧그로셔 아득히 우러러 보면 놉흔 누 두 층으로 무어 정를 지어시니 마치 그림 속 졀 지은 것 더라. (낙민누) 39
류준경 교수의 교주본:
함흥만 만세교萬歲橋와 낙민루樂民樓가 유명하다 하더니, 기축년己丑年 염사일念四日 서울을 떠나 구월 초이일 함흥을 오니, 만세교는 장마에 무너지고 낙민루는 서쪽으로 성 밖인데, 누하문樓下門 전형全形은 서울 흥인문을 의지하였으되, 둥글고 작아 겨우 독교獨轎가 간신히 들어가더라.
그 문을 인하여 성 밖으로 빼내어 누각을 지었는데, 두 층으로 대를 쌓고 아득히 쌓아 올려 그 위에 누각을 지었으니, 단청과 난간이 다 퇴락頹落하였으되 경치는 정쇄精灑하여 누각 위에 올라 서편을 보니, 성천강의 크기 한강만 하고 물결이 매우 맑고 깨끗한데 새로 지은 만세교가 물 밖으로 높이 대 여섯 자나 솟아 놓였으니, 모양이 무지개 흰 듯하고 길이는 이르기를 이편에서 저 편까지 가기가 오 리라 하되 그럴 리는 없고 족히 삼사리는 되어 보이더라. 강가에 버들이 많이 서 있고, 여염이 즐비하여 별결이듯 하였으니, 몇 가구인 줄 모르겠더라.
누각 위 마루청 널을 밀고 보니 그 아래가 아득한데 사닥다리를 놓고 저리 나가는 문이 아주 작은데, 침침하여 자세히 못보다. 밖으로부터 아득히 우러러 보면, 높은 누각을 두 층으로 쌓아 정자를 지었으니 마치 그림 속에 절(寺)을 지은 것 같더라.
원문이라고 했지만, 독자의 편의를 위해 현재 쓰고 있는 학교문법에 따라 띄어쓰기를 했으며(당시는 죽 붙여 쓰는 줄글이었다.) 아래 ‘’자는 그대로 두었지만 이중 초성은 쌍자음으로 썼다.
이 글에서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종지終止가 “…더라.”이다. 이 종지는 수필에서뿐 아니라, 고소설 대부분이 이런 투의 종지를 사용하고 있다. “…더라.”에는 시제가 나타나지 않고 있다. 김동인이 그의 <근대소설고>에서 이광수의 문체를 공격하면서 이러한 애매한 종지 대신에 자신은 과거시제를 썼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한국 근대소설 문체 정립에 있어서 자신이 이룩한 공헌이라고 자랑하고 있는 점에는 일리가 있다. 사실 서술문의 고문체와 근대문체를 구분하는데 큰 분수령은 무시제적인 종지와 시제를 다소 의식한 문체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보다 자세한 고구考究가 필요하다.
이광수의 ≪무정≫에서 쓰인 언어나 ≪창조≫나 ≪백조≫ 동인지에 쓰인 언어까지 현대 문장어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지 모르지만 대체로 1930년대에 확립된 문장 언어와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문장 언어와는 큰 격차가 없다. <관북유람일기>는 1769년경에 쓰였다고 하니, 140년이라는 시간적 격차가 난다. 따라서 시간에 의한 문체의 차이를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어휘, 조사법 등이 달라서 일반인들이 알아보기 어렵기 때문에 전문가에 의하여 주석본이 나온 것이다.
이 작품에서 연결어미로서 “…하더니”, “…오니”, “…밖인데”, “…의지하였으되” 등이 쓰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종결어미로서는 “…가더라.”가 쓰였다. 다음 단락도 첫 단락보다 좀 길기는 하지만 형태는 같다. 과연 단락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한 문장 한 단락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븕은 우흐로 흘흘 움여 도대 처음 낫던 븕은 긔운이 백지 반 장 너배만 반시 비최며 밤 던 긔운이 해 되야 커가며 큰 쟁반만 여 붉웃붉웃 번듯번듯 뛰놀며 젹색이 왼 바다히 끼치며 몬져 붉은 기운이 가새며 해 흔들며 뛰놀기 더욱 로 며 항 고 독 것이 좌우로 뛰놀며 황흘이 번득여 낭목이 어즐며 븕은 긔운이 명낭야 첫홍색을 헤앗고 텬듕의 쟁반 것이 수레박희 야 믈 속으로셔 스러디고 처음 븕어 것 비최던 거 모혀 소혀텨로 드리워 믈 속의 풍덩 빠지 듯시브더라. (동명일기) 77
류준경 교수 교주본:
그 붉은 위로 흘흘 움직여 도는데, 처음 났던 붉은 기운이 백지 반 장 넓이만치 반듯이 비치며, 밤 같던 기운이 해 되어 차차 커가며, 큰 쟁반만 하여 불긋불긋 번듯번듯 뛰놀며, 적색이 온 바다에 끼치며, 먼저 붉은 기운이 차차 가시며, 해 흔들며 뛰놀기 더욱 자주 하며, 황홀히 번득여 양목이 어지러우며, 붉은 기운이 명랑하여, 천중에 쟁반 같은 것이 수레바퀴 같아 물속으로부터 치밀어 받치듯이 올라붙으며, 항, 독 같은 기운이 스러지고, 처음 붉어 겉은 비추던 것은 모여 소혀처럼 드리워져 물속에 풍덩 빠지는 듯싶더라.
이 글은 “…듯싶더라.”는 종결어미 앞에 “…비치며”, “…가며”, “…뛰놀며”, “…끼치며”, “…가시며”, “…하며”, “…뛰놀며”, “…어지러우며”, “…올라붙으며” 등 9개의 연결어미가 있다. 어느 작품 어떤 문장을 보아도 이 패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이 문장의 주어는 “기운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주어에 이처럼 9개의 서술어가 연결어미로 이어져 있다. 따라서 점착적粘着的인 느낌을 준다. 어쨌든 현재의 문장으로서는 매우 어색한 패턴임에 틀림없다.
이때 패수 우희 녯도읍은/ 진실로 해동 됴흔 따히로다.
긴 성과 큰 들은/ 텬하의 뎨일강산이로다.
플은 디와와 붉은 난간은/ 구 의 무수 다락집이로다.
이에 절이 강 북편의 이시니/ 일 일흠을 관서의 쳔히 엿도다.
청뉴벽과 금슈봉은/ 몸과 형세 긔특미 싀원하고
을밀대 능나도/ 안계동창하미 도다.
(영명사 득월루 상량문)
인용한 글이 별로 길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5 문장으로 되어 있다. 앞의 글들과는 운율이 다른 글이다. 가사에서 흔히 애용되던 3·4조 내지 4·4조의 전통적인 운율은 아니지만, 분명히 운율을 느낄 수 있다. 필자가 /로 표시해서 앞과 뒤의 대립으로서 리듬을 느끼도록 하고 있다. 또 하나 주의해서 볼 것은 종결어미가 전부 “…로다”, “…도다”로 되어 있는 점이다. 이 어미는 감탄을 나타낼 때 쓰는 어미다. 이 글은 내용은 산문이지만, 운율로 볼 때 과연 산문이라고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3. 국문 내간內簡
내간은 대체로 두 가지로 구분한다. 궁중과 사대부의 내간이다. 일반 서민의 내간도 존재할 것으로 충분히 상상할 수 있으나 실제로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다. 당시 서민들은 한문뿐 아니라 국문도 쓸 수 있는 사람이 드물었다. 따라서 기록된 작품을 가질 수도 없었다. 궁중의 내간은 상당히 많이 남아 있다. 선조, 효종, 인선왕후, 숙종 등의 편지가 전하고 있어 궁중 내간 문학의 주종을 이루고 있다. 장덕순 교수의 말처럼 문예문이 될 수 없는 글일 수도 있지만 지금 남아 있는 국문 편지는 아주 귀한 자료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수필문학의 유산으로 간주해도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
글월 보고 됴히 이시니 깃거노라 나도 무이 인노라 쳔장은 나라 이리하어옵스니 이제 어 겨레 며 군인 나힌 어디 가 어리 왜적도 해 전라도 티려다 긔별도 이시니 더욱 심심야 노라. 보내 것 화라. (선조) (이하 장덕순, <한국수필문학사>에서 재인용)
우선 눈에 띄는 어투는 “…노라” 형의 종지형이다. 임금의 말투라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다.
쥬상이 지통중 포 심녀로 디내시고 로 미령옵서 셩톄 손샹하옵시기 니올거시 업온대 충현궁오시 일 옵고 지통을 겸와 병이 이러 위즁올분 아니오라 셩궁 위옵 념녀가 졀와 붓더옵고 못가시게 오니 이제 즉시 가려옵시니 지졍을 생각셔 동가젼의 셩빙옵고 알외게 옵소서. (혜경궁 홍씨)
작자는 <한중록閑中錄>의 저자 혜경궁 홍씨라는 점에서 그 필력을 충분히 인정할 수 있다. 임금의 문체와는 다르지만, 당시 궁인들이 쓰는 문체를 짐작할 수 있는 글이다. 겸양보조어간 “오”를 많이 쓰고 있는 것을 특히 볼 수 있다. “붓더옵고 못하시게 오니 이제 즉시 가려옵시니 지졍을 생각하셔 동가젼의 성빙옵고” 라고 쓰는 것은 편지체에서 주로 쓰이는 것 같다.
사대부의 내간도 크게 다르지 않지만 자세히 관찰하면 그 어투에 차이가 난다.
아 무닙 가을재 상셔여더니 진시 드러갓더니잇가
오간 긔후 평안심 엇더오니잇가 너이 졈심고 뇽인내로 가오니 갈록 졈졈 머러가오니 아무리 져어여 견디노라여 어렵오니다 차담 행담 너허봉표여 이찬이 가대 주어보내이다 일본 가온후 진셔 편지 못 주어 보낸다 오니 미리 긔별오니 혹 친고의 편지라도 드려보내지 마소서 이복이 양지참지 다려가이다 띄가 둘이 젹오니 그 돈의 모단 띠 나만 쟝만여 두었다 아무 신편의 부쳐 보내쇼서 총총 이만 알외오며 내내 관해하여 부디부디 몸 됴섭쇼서 병환 없시 겨쇼서 (이봉환의 편지)
현대에는 거의 사라지고 있는 겸양보조어간 “”, “” 등이 자주 쓰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오니잇가” 등의 종지사도 지금은 거의 쓰고 있지 않는 어투다. 궁중인의 편지보다는 보다 친근감이 묻어나고 있다.
1930년대만 해도 국문 편지를 어떻게 쓰면 바르게 쓸 것인가에 대한 모범 편지가 유행이었다. 대가들이 저술한 <편지 쓰는 법>, 혹은 <모범편지>등이 출간되어 시중에 많이 팔리고 있었다. 필자가 중학생 시절만 해도(1945-55) 이 이 모범편지를 보고 편지 쓰는 법을 배우라고 선생님들이 권고했던 것을 들었던 기억이 난다. 편지 쓰는 것까지 쓰는 법을 배우라고 한 것은 종래에 내려오던 문체관의 반영이라고 생각된다. 한문학에서는 ‘문체’를 익히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이때의 문체 개념은 오늘날처럼 개성에 의한 문체 개념이 아니고, 형식에 의한 문체 개념이었다. 가령, 論, 說, 辭, 策, 章, 奏, 賦, 頌 등은 각기 그 형식에 맞는 문체가 있다. 그 형식에 맞지 않는 문체를 쓰는 경우에는 무식한 사람으로 취급받았던 것이다.
당시 편지의 문체는 일상어보다 정중하게 쓰였고, 상대를 높이고, 자기를 낮추는 보조어간을 많이 쓰는 것이 보통이었다.
어마님 상살이
문
안 알외고 일기 고로디 못온대 평치 못오신 긔후 엇더하오신 문안 아고져 라오며 날포
한후 낫자오시디 못오시니 하졍의 민망 놀랍온 복모라타 업고 잡오심도 못오실 더욱 복녀 브리디 못와 하옵이다 문
안도 시 모라오니 답답은 하졍 아모라 업와 오며 일기 이러오니
아바님겨오셔 평치못오신
기후 못오시디 아니오신가 하졍의 복녀 아모라타 업와 오며 부 이 가족이 잇사올 적도 감이디 못고 이 먼니 드러가오니 결연온 하졍 명치 못고
감하이완 디도 오라오니 더욱 절연와 이다 움여 왕내 결박하오대 아디 못하오대 심만 새로이 평치 못와 오며 아뢰올 말
감오심 젓와 이만 알외이다 (이산중의 부인 양주조씨)
당시는 인쇄체란 있을 수 없고 전부 붓으로 쓴 필기체였기 때문에 오늘날과 같은 문단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행을 바꾸어 쓴 것은 필자로서는 어떤 의미를 두고 있다. “문”과 “안”을 행을 달리해서 쓴 것은 윗사람에 대한 예의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평치 못오신”과 “긔후 어떠하오신”이 이어져 쓰인 것은 오늘날로서는 어색하지만, 당시로서는 흔한 일이었다. 편지체에서는 이렇게 축약해서 쓰는 것이 예의로서 생각되었다. 특히 “”이나 “”이라는 겸양체가 붙어 있어서 용인되었다. “-이다” 등은 오늘날은 쓰지 않는 어투로서 당시로서는 흔하게 쓰는 어투였다. “상살이”란 어두語頭는 한문의 “상백서上白書를 번역해서 쓴 말로 고노高老들은 오늘날도 쓰고 있는 편지의 서두로 생각된다. 1950년대까지도 학교에서 이런 서두를 쓰라고 권장하기도 했다.
추사 김정희의 편지가 20여 통 전하고 있다.
져번 듕노의셔 하온 편지 보와겨시 그 이 인편이 이오나 편지 못 보오니 붓그리워 아니야시 나 마이 심히 섭섭 그 동안 일년이나 되오니 년와 편안이 지내오시고 대도 연고 업고 숙식범절이 확실히 (대구 감영에 있을 때 부인에게 보낸 편지, 1818, 2, 10)
장덕순 교수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 문학사에서 내간, 언간이라고 하는 것은 여인들이 주고받은 한글편지를 말하는 것인데, 주고받은 편이 반드시 여성이라는 뜻은 아니다. 남성이 여인(아내·딸·며느리)에게 주는 편지, 여인이 남성(남편·아들·사위)에게 주는 편지도 내간에 속한다. 물론 내간은 한글 편지여야 한다. 이러한 편지에는 일정한 격식이 있고 글씨체도 순한글의 이른바 궁체宮體가 전형이지만, 서체가 정갈하고 내용이 진솔 ‧ 간결한 추사의 한글 편지는 가히 그 전범이라 할 것이다. (상계서, 300면.)
당시 사대부 간에는 부부 사이에도 하대란 있을 수 없이 ‘겨오시’, ‘보아겨시’ 등 예를 갖춘 어법을 쓰고 있다. 이 편지에서 특히 눈에 띄는 것은 “보와겨시”, “아니시압”, “확실” 등이 종지로 쓰이고 있는 것이다. 추사만이 쓰고 있는 어투인지, 달리 이런 어투를 쓰고 있는 사람이 있는지 알 수 없으나, 겸양의 뜻을 지니면서 간결한 맛을 나타내고 있다고 생각된다.
저번 인편의 글월 든든오며 겨울날이 고이히 뎝오니 요이 년와 일양 지내오시 념녀 이 업오며 호동 니참판 형님 상 절절 오니 엇지 다 뎍오며 누의의 졍경 더욱 붓슬 드러 일컷올 길 업. 샹인도 쳥약 아해가 쳐음으로 기창을 당야 오쟉랴 경경히 잇치일 길 업 초샹 때 찌것들은 야 보내엿다 오니 다행이 거셔 가셔 됴상이나 야 겨시고 드르니 안산으로들 가신다 니 나 가도 못만나게오니 더욱 심화 명올 길이 업. 샹하가 다 무이들 지내고 창녕댁은 드러와 아해도 잘 잇가 가긔로 미령시더니 요이 져기 낫오시. (1831, 11, 9. 고금도에서)
종지를 주로 “”으로 쓰고 있는데, 평서문으로 문장을 끝날 때 쓰고 있다. 그러나 “창녕댁은 드러와” 같은 것은 의문문 종지로도 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나 “” 혹은 “” 등 겸양보조어간이 종지로 쓰이고 있는 것이 특이하다.
4. 요로원야화기要路院夜話記
“요로원야화기는 숙종 때의 박두세가 지은 것으로 알려진 수필형식의 단편산문”3)이다. 필사본 1종의 국문본과 5종의 한문본이 있다. 필자가 주로 참고한 것은 이병기 교수가 선해選解한 동명의 원문부 해설서다.4) 작중의 ‘나’라는 주인공은 충청도에 사는 선비로 과거에 낙방한 후 귀향하던 도중 요로원에 이르러 주막에 들게 된다. 우연히 동숙하게 된 서울 양반과 나눈 대화를 적은 것이다. 이 교수는 박두세가 1678년에 쓴 것으로 추측된다고 그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객이 듣고 놀라 일어앉아 내 손을 잡고 날을 익히 보며 이르되 불상타 그 사이 사람을 어찌 이러틋 속이느뇨. 존尊의 휼중譎中에 빠져 이러틋 붓그러움을 볼다 평생에 어린긔 잇어 길헤나 이러틋 한적이 많으되 아모적도 가매假賣한 적이 없니니 이제 존尊을 맞나 이러틋 붓그러움을 보니 내탓이려니와 어찌 존이 날 욕함을 이러틋 심하느뇨. 내 웃고왈 서울 사람이 존뿐 아니라 이런 사람을 만히 본고로 이른 말이오 존을 이른 말이 아니라.(상게서, 22면)
필사본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은 아니지만(띄어쓰기라든지 맞춤법 등은 현대 체계로 조금 수정했다.) 필자의 문체를 짐작하기에는 충분하다. “…속이느뇨”, “…볼다”, “웃고왈” 등의 문체는 당시의 어법이다. “이러틋”이란 어휘도 당시에는 자주 쓰고 있는 어투라고 생각된다.
또 문왈 그대 아들이 없느냐. 내대왈 비록 두엇이나 어렷고 형의아들이 겨유 뉵칠세니라. 객왈 헴과 방소方所를 가르쳣느냐. 내 대답하되 헴을 가르쳣이나 방소는 가르치고저 아닛노라. 객왈 어찌 이름고. 내대답왈 즉금 세상의 동서남북東西南北 알기를 심히하니 아희들 가르치지아녀도 세상을 쫓아 배흘가 젛어하노라. 객이 소왈, 녜 당문종唐文宗이 편논偏論 성한 줄 아쳐하여 하북적河北賊의 비比도 하여 일럿노니 만인 사람마다 자식 가르치기를 그대같이 하면 편논이 어이 잇으리오 또 붕당이 이르되 당붕黨朋의 계를 어이 이르리오. (상게서, 41면)
“문왈”, “객왈” 등도 당시 어법이다. 국문소설에는 잘 보이지 않는 말이다. “니라”, “노라”, “리요” 등의 종지와 “노니” “이르되” 등의 연결어미 등도 지금은 거의 쓰지 않은 어법이다. 한문 문체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인지, 고소설과는 다른 문체를 쓰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당시는 한시漢詩 외는 문예문으로 간주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국문으로 된 글에 대하여 언어적 수사는 매우 등한하였다. 그 때문에 같은 패턴의 글이 대부분이다. 같은 패턴의 말을 거듭 쓰는 것은 문예문에 있어서 금기시되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문예관이지만 지금과는 전혀 다른 관점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같은 패턴의 어휘나 어구 등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썼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 점은 서양도 마찬가지다. 생활을 충실히 기록하거나, 항간에 떠도는 얘기를 기록한 것이 드물기는 하지만, 남아 있다는 것은 충분히 문학적 가치를 지닌다. 미문美文만이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 당시와는 달리 인간의 생활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는 글은 다소 조잡하더라도 가치를 지니고 있다. 우리의 삶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1) 이 작품은 지금까지 의유당 이희찬의 부인 연안김씨의 작품으로 소개되어 왔다. 그러나 근년에 알려진 바로는 이 정정이 옳다고 인정되고 있다. 장덕순의 <한국수필문학사>(새문사, 1985)에서 주(註)로 작자가 “이희찬의 부인 연안김씨가 아니라, 신대손의 부인 의령 남씨”라는 주장이 있다고 밝히고 있다. (283면). 이연성, <의유당 관북유람일기의 연구>(이화여자대학석사논문, 1973, 유택일, <의유당유고와 그 작자>, 국어국문학, 제 76호. “작자가 연안 김씨라면 이 작품의 창작연대는 1829-1832년이고, 의령 남씨라면 1769-1772년 된다.”고 한다.
2) 류준경, 의유당 관북일기, 신구문화사, 1968.
3) 국어국문학자료사전, 한국사전연구사, 1994, 요로원야화기항.
4) 要路院夜話記, 이병기 選解, 을유문화사, 1954.
김상호 --------------------------------------
전북대·한양대 · 이화여자대학교 교수 역임, 한국비교문학회 · 한국현대소설학회 회장, 현, 이화여자대학교 평생교육원에서 생활수필쓰기 지도, 저서-수필집 ≪참말과 거짓말 사이≫, ≪여자대학의 촌티 나는 교수≫, ≪먼 꿈 가까운 꿈≫, ≪선생님 우리 선생님≫, 콩트 ≪유리구슬≫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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