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정의 인기를 누린 미성美聲의 카니 프란시스에게도 띄워 보내야 할 슬픔의 질량은 어떠한 것이었을지 궁금해진다. 물결 또한 슬픔의 파문이라면 바다는 얼마나 망망한 슬픔의 원산지일 것인가?"
종이학 - 황인용
낮게 틀어둔 라디오에서 파가니니의 <칸타빌레 B장조>의 선율이 흘러나오는 조용한 낮이다. 흐느끼듯 호소하듯 마음에 젖어드는 바이올린의 곡진한 선율…….
이내 메마른 가슴의 벌판으로 강물이 출렁이며 길을 열기 시작한다. 자욱이 피어오르는 물안개 속에서 백학 한 마리가 환상으로 날아오른다.
우수에 찬 새하얀 비상! 도대체 백학은 얼마나 크나큰 슬픔의 원죄 속에서 부화하는 숙명의 새인가? 러시아 설원은 태초의 슬픔을 잉태하고 있는 막막한 땅- 광막한 슬픔의 서식지이리라.
차디찬 열정의 사람들이 백학처럼 깃들고 사는 곳! 문득 <백학>을 부른 가수의 묵중한 저음이 전율처럼 온몸을 감싼다.
내 책상에는 종이학 한 마리가 날개를 펴고 앉아 있다. 시방 저 종이학도 러시아 가이없는 설원의 꿈에 잠겨 있을까? 마음은 이미 설원을 끝없이 날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한 백학과 연속극 <모래시계>는 애초에 어울리지 않은 대위법이었다는 생각이 스친다. 기계적인 단조로운 하강과 하얀 슬픔의 비상은 어떠한 연상이 가능한가? 대체 어떠한 슬픔의 공집합을 이루는가 말이다. 모래 또한 한없는 슬픔의 미립자라는 뜻인지 알 길이 없다.
하긴 사막이나 설원이나 지향할 바를 모른다는 점에서는 공통분모가 없지도 않다. 그 눈부신 공허와 불모不毛도 비슷하다. 결국 순일純一 한 슬픔의 영토가 아니겠는가?
모르거니와 처음 종이학을 접었던 사람의 슬픔도 시베리아 설원이나 태평양만큼 막막했을 듯싶다. 아마도 그는 무수한 시행착오 끝에 돈각하듯 종이학을 접을 수 있었으리라.
한 장의 종이가 아니라 슬픔을 접고 또 접었을 그 사람! 누군지 모를 그는 슬픔을 접는 데도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어야 함을 처음으로 깨달은 이였으리라.
사람은 접어야 하는 존재다. 접어 생각해야 하고 생각 그 자체를 접어두어야 한다. 새나 나비만 날개를 접고 쉬어야 하는 존재는 아님이다.
새나 나비가 날개를 접음은 다시 힘차게 비상하기 위해서다. 그렇듯 사람도 새 출발을 위해서는 모든 걸 접어두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을 쉽게 하였으나 고지식한 나는 참으로 접어 생각하기 어렵다. 접어 생각하기도 어려운데 한번 접힌 마음 펴기는 또 어찌 그리 어려운지!
10년 전 딸아이도 열심히 종이학을 접은 일이 있었다. 속이 깊어 말수가 적은 딸아이는 혼자 조용히 접어두어야 할 슬픔이 있는 듯했다.
그 무렵 딸아이를 데리고 한강에 나가 종이배를 띄웠다. 두 종이배는 손을 잡은 듯 다정히 흘러서 멀어져 갔다. 지금도 아득한 시공 속을 흘러가고 있을까?
‘슬픔은 물결에 띄워보내고.’
절정의 인기를 누린 미성美聲의 카니 프란시스에게도 띄워 보내야 할 슬픔의 질량은 어떠한 것이었을지 궁금해진다. 물결 또한 슬픔의 파문이라면 바다는 얼마나 망망한 슬픔의 원산지일 것인가?
옛날 딸아이가 접었던 종이학은 하루 빨리 마음의 평화 되찾기를 간절히 비는 나의 기도 속에서 태어났었다. 그때 딸아이의 종이학은 적어도 내겐 희망과 꿈의 새였음이다. 박제된 새와는 달리 생명력을 지녔음에 틀림없었으리라.
천 마리 학을 접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데 딸아이의 학도 육신을 얻어 도솔천쯤으로 날아갔을까.
오늘밤은 목욕재계하고 잠자리에 들겠다. 딸아이의 학들이 큰 울음소리와 함께 대지를 박차고 창공으로 비상하는 찬란한 꿈을 꾸려 한다. 치유와 부활과 도약이 절실히 필요한 세상의 모든 슬퍼하는 이들을 위해서 말이다.
황인용 ------------------------------------------
월간 ≪에세이≫ 천료, ≪수필과비평≫ 수필평론 당선, 수필집: ≪흐르는 강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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