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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과비평 2013년 3월호, 세상마주보기] 겨울꽃 - 이응철

신아미디어 2013. 4. 1. 08:28

"생의 질곡에서 어렵게 만나 못된 성깔 다 받아주며 살아온 아내를 돌아본다. 영락없이 백설이 분분한 벌판에 피어난 겨울 꽃의 향을 음미한 그날 가슴엔 안개비가 내리고 있었다."

 

 

 

 

 

 

  겨울꽃  -  이응철


   실개천이 신촌천新村川이란 이름표를 달고 존재의 이유도 없는 무성한 갈대숲을 감돌아 토끼길 같은 사암층 굽잇길을 스치고 있다. 그 옆 제방 사이로 정리 안 된 여염집들이 분류를 기다리는 플라스틱 바구니들을 껴안고 을씨년스럽게 졸고 있는 오후, 토끼꼬리만 한 겨울 햇살이 설핏하다.
   동장군의 위세가 수갑을 벗고 도주한 탈주범처럼 한결 느슨해진 겨울 오후 제방 길을 걷는다. 산책이다. 내외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해 부부애가 돈독해 보이지만 막상 나는 혼자 걷기를 즐긴다.
   유난히 많은 눈과 추위가 기승을 부린 올 겨울나기 또한 눈물겹다. 아직 잔설이란 말이 무색하게 기력이 왕성한 백설이 논 그루터기 모두를 옥양목으로 감싸고 겨울 발목을 잡고 있다.
   신촌천 상류에서 지인을 방문하고 모처럼 시간을 내어 아내와 둑을 걷는 것이 새롭다. 아니 어설프다. 눈과 얼음이 좁은 제방을 온통 점령해 좀처럼 자유롭지 못하지만, 우연한 기회라 절대자유의 카드를 접고 따른다. 앵무새 같은 내자의 음성이 실개천과 합류한다.
   물기 있는 곳은 밟아서는 안 된다. 진창은 돌아서 가야 한다. 얼음 위에서 발걸음을 늦추어야 한다. 복부를 집어넣어야 한다. 겨울모자의 귀마개를 꺼내야 한다. 조심, 빙판 조심…….

 

   두세 시간을 걸어 반환점을 돌아 기력이 쇠잔하여 눈꺼풀이 내려앉은 겨울햇살을 등지고 보니, 한적한 변방이라는 이유로 눈초리 따가운 님비 교도소, 도견장 두어 군데가 둑과 함께 살아간다.
   도견장-. 이름만 들어도 아내는 오싹한다. 운수가 비색否塞해서 곱던 도심의 색을 구겼지만 아직도 여리다. 지천명을 상회해도 꿈 많은 소녀처럼 움츠리고 눈을 내리감는다. 노란 좁쌀이 마치 벌레의 알을 연상해 조밥을 멀리한다는 어처구니없는 연유를 대긴 하지만, 인생의 후반기를 함께 노 저어 가며 좁은 아량으로 고치며 살아왔다. 늑대가 늙어 이빨이 빠져도 그 본성은 잃지 않는다는 말처럼 매사에 덥석 동화되지 못하며 살아온 날들이다.
   질펀하게 누운 둑 벌판에 햇살마저 거두어 갈 무렵, 인부 몇이 작업장을 서성거리며 남은 상자들을 갈무리하며 부산을 떨고 있었다. 유년기 때 어머니가 푸성귀며 송편을 빚어 내다팔 때 약골인 내 손을 끌며 읍내에서 사먹이던 국밥이 성인이 되어 알고 보니 보신탕이라 어떤 트라우마 한 올도 없이 늘 내겐 정겹기만 한 대상이다.
   그런 내심의 추억이 발동하여 아내의 눈치볼 겨를도 없이 주인과 흥정해서 나는 주인이 부른 금액보다 더 얹어주고 싶을 정도로 흔쾌히 남은 물건들을 넘겨받을 수 있었다.
   마지륵했다. 하루 일과를 끝낸 장터처럼 어둠의 장막을 내린 벌판에 백설이 어둠을 막아줄 무렵, 실개천 좁은 둑을 아내와 걷는다. 비닐에 담은 견육犬肉상자를 가볍게 여겼지만 혼자 들고 가기엔 가당찮았다. 큰 비닐에 넣어 둘이 한쪽씩 들고 좁은 둑을 따라 걷기에도 한계가 있다.
   아직 반시간은 족히 걸어야 세워둔 애마에 당도할 수 있는데 둑이 비좁아 걸음은 여간 부자연스럽지 않았다. 버겁다. 참다못해 나는 검은 비닐봉지를 낚아채 인삼장수처럼 왼쪽 어깨에 걸머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어깨 통증이 스멀대 다시 오른쪽으로 옮겼지만 위태롭긴 마찬가지였다.
   당나귀처럼 급기야 바라보던 아내가 넘겨받아 옆구리에 끼었지만 역시 불편은 매한가지였다. 다시 비닐 보따리를 넘겨주며 엎치락 뒤치락거렸지만 큰 진전이 없자, 아내는 비닐봉지를 똬리도 없이 머리에 닁큼 이는 게 아닌가!
   혐오감이나 저항감 투성이의 보따리다. 일부 명사 앞에 붙어 참 것이 아닌 개꿈, 개떡, 개죽음, 개살구의 진원지인 접두사 진원지를 아뿔싸! 지금 아내 머리에 품고 가다니 놀랐다. 처음엔 뒤뚱대더니 제법 질서를 잡고 둑을 따라 간다. 신기했다. 단 한번 머리에 얹은 일이 없는 아내가 그것도 혐오식품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머리에 얹고 어둠의 숲을 헤쳐 둑을 걸어간다.
   빨리 행보를 계속하다가 도사리고 있던 비탈진 얼음에 몇 번 미끄러지기도 해 나를 한껏 불안케 했다. 영락없이 어느새 나는 아내 뒤에서 작아진 존재로 괜찮냐고 채근하는 게 고작일 뿐이다.
   어둠이 한껏 달구어진 감정들을 가로막는다. 순간, 홀연히 앞서가는 아내의 모습에서 천상의 어머님이 하강해서 동행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들 정도였다. 그러나 어머니와는 천양지차天壤之差다. 물건이 아내의 머리 한쪽으로 기우뚱하게 흘러내리지만 엄니는 정중앙에 올려놓고 손까지 내리며 보따리를 나르지 않으셨던가!
   어둠이 죽음의 신과 함께 죽세가 맞아 활개를 치고 아름드리 나무들은 괴상한 울음으로 밤의 문을 열고, 제방 한편의 여린 나무에 기생한 하루살이 덤불 속에서도 귀신 울음 같은 객쩍은 소리가 꾸역꾸역 흘러나오는 초저녁이다.
   집에 당도해 열어보니 아내 옷깃에 진달래 꽃 무늬처럼 선혈이 선명하다. 보신탕조차 외면하던 아내가 그런 컴플렉스에 당당하다. 결연한 몸짓이 냉한 계절에 피어나다니 이럴 수가! 간간이 통증이 머문 두피를 가볍게 눌러보는 모습에 주눅이 들어 숨소리조차 크게 쉴 수 없을 지경이다.
   차라리 푸념을 토하며 끝내는 것이 훨씬 편할 것 같았다. 그녀와의 삶에서 처음 건져올리는 묘한 사랑이요, 생뚱맞은 몸짓에 애면글면한 날이었다.
   묵언으로 일관하던 아내는 되려 나를 두둔한다. 평생 처음 머리에 얹고 균형을 잡지 못한 아내가 어머니 운운하던 내 말에 실토한다. 무엇일까? 학처럼 몸을 비우고 마음을 내려놓고 살다 가신 예전 어머님의 균형감각은 지극한 당연지사라고! 물욕과 허세로 중무장한 현대판 며느리의 뒤뚱대는 언밸런스야말로 예상한 일이 아니겠냐고 반문을 하며 몸을 낮춘다.
   생의 질곡에서 어렵게 만나 못된 성깔 다 받아주며 살아온 아내를 돌아본다. 영락없이 백설이 분분한 벌판에 피어난 겨울 꽃의 향을 음미한 그날 가슴엔 안개비가 내리고 있었다.

 

 

이응철  --------------------------------------------
   ≪수필과비평≫ 등단,  수필집: ≪어머니의 빈손≫, ≪바다는 강을 거부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