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사람을 성장시키는 동력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풋사랑이었든 짝사랑이었든 그때마다 한층 성숙하였다. 마주 보는 사랑으로 완성되기까지의 밑거름이 된 나의 풋사랑들이다. 싱거운 풋사랑이나마 소중한 추억이다. 드라마에서 짝사랑으로 눈물 흘리고 가슴 아파하는 여인이 하루 빨리 마주 보는 사랑 이루길 빈다."
풋사랑 - 이옥순
짝사랑을 오래하던 여자가 상대로부터 청혼을 받고 들떠서 결혼 준비를 해가는 과정이 드라마에 나왔다. 상대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아픔을 달래기 위해 또 이루어질 수 없는 여자를 따돌리려는 방편으로 혼자 좋다고 따라다니던 여자를 찾아와 결혼 제의를 한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결혼하려는 마음은 어떤 것인지. 어쩌면 자기 사랑에 대한 확신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 상황을 보면서 혼자 몇 날 공상을 하다 만 싱거운 나의 풋사랑이 떠올랐다. 마음이 아프거나 슬픈 단계까지도 가지 못했으니 어쩌면 사랑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누가 짝사랑이야기를 하면 떠오르는 수줍은 사랑이야기다. 언젠가는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에 나오는 불같은 사랑이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하면서 산다. 그런 기대로 <늦어도 11월에는>이라는 여자의 일탈을 그린 소설을 읽기도 했었다.
늘 할머니를 따라다닐 때였다. 하루는 새벽밥을 먹고 할머니가 나락을 이고 옆 마을에 갔다. 이른봄 못자리할 때를 앞두고 씨나락을 준비하는데, 가끔 이웃집과 볍씨를 바꾸기도 했다. 볍씨를 바꾸기 위해 식전에 찾아간 곳이 우리 반 반장 아이 집이었다. 마당에 들어서니 식구들이 마루에 둘러앉아 아침밥을 먹고 있었다. 그 속에 까까머리 그 아이가 있었다.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다리가 후들거렸던 것 같기도 하다. 얼마 동안 그날 아침의 인연으로 그 애가 나를 특별히 여기겠거니 하면서 혼자 가슴 설렜다. 그날의 영상이 오랫동안 마음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후에 그 애가 해군이 되어 편지를 보내왔는데 자취방을 옮겨 다니느라 끈이 닿지 못하고 말았다.
앞집에 책을 물려주는 선배가 살았다. 물려받은 책 여기저기 선배가 달아놓은 토씨가 있었는데 글씨가 얼마나 반듯한지 책글씨와 구분이 안 될 정도였다. 그게 멋지게 보이긴 해도 볍씨 바꾸러 갔을 때 그곳에 이미 내 마음을 놓고 왔기 때문에 별다른 마음은 생기지 않았다. 그런데 중학생이 되었을 때 그 선배의 사랑이야기가 온 동네에 퍼졌다. 어느 날 저녁, 자리에 누웠는데 갑자기 꼭 무엇을 뺏긴 기분이 들었다. 옆집에 내가 사는데 왜 내가 아닌 먼 데 사는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 의문을 해결하기도 전에 멋진 영어 선생님께서 나타났다. 중년의 영어 선생님은 인기가 많았다. 단정하게 자른 스포츠형 머리, 단순한 양복 차림, 우수에 찬 옆모습이 여학생들의 마음을 흔들었다. 그러다 선생님의 특별한 사연을 알게 되었고 그게 좀 슬펐다. 선생님과 이웃해 사는 친구가 말해 준 바로는 영어 선생님께서 폐결핵에 걸려 얼마 못 산다는 것이었다. 선생님의 슬픈 표정이 이해가 되었다.
선생님을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 평소에 싫어하던 영어 공부에 매달렸다. 아궁이에 불을 때면서도 부지깽이로 단어와 문장을 써가면서 죽자 살자 외웠다. 그렇게 선생님을 위한 공부를 시작하고 얼마 안 되어 선생님이 갑자기 전근을 가셨다. 아이들은 전근을 가신 것이라 알았지만 난 아마 돌아가셨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부터 슬픈 시나 노래의 의미를 나에게 적용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또 한 번은 교련선생님이었다. 스킨로션 냄새 폴폴 풍기는 총각 선생님이었다. 그때 우리는 선생님은 좋아해도 교련 시간은 무척 싫어했다. 선생님만 만나면 오늘 교련해요, 안 해요, 습관처럼 물었다. 비가 보슬보슬 내리는 날, 운동장에 계신 선생님을 향해 누군가 이층 복도에서 “선생님, 교련해요?” 하고 외쳤는데 선생님께서 “그래, 교련해.” 하고 답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아이가 교실에 들어와 “교련선생님 결혼한대.”라고 큰 소리로 전했다. 순식간에 교련선생님 결혼한다는 소문이 퍼졌다. 교련선생님을 좋아했던 아이들이 일제히 복도로 나와 “선생님, 결혼하지 마세요.”를 외쳤다. 나 역시 목이 터져라 ‘결혼하지 마세요.’를 외쳤다.
사랑은 사람을 성장시키는 동력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풋사랑이었든 짝사랑이었든 그때마다 한층 성숙하였다. 마주 보는 사랑으로 완성되기까지의 밑거름이 된 나의 풋사랑들이다. 싱거운 풋사랑이나마 소중한 추억이다. 드라마에서 짝사랑으로 눈물 흘리고 가슴 아파하는 여인이 하루 빨리 마주 보는 사랑 이루길 빈다.
이옥순 -------------------------------------------
2007년 ≪수필과비평≫ 등단, 수필집: ≪단감과 떫은 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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