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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과비평 2013년 3월호, 세상마주보기] 풋사랑 - 이옥순

신아미디어 2013. 4. 1. 08:08

"사랑은 사람을 성장시키는 동력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풋사랑이었든 짝사랑이었든 그때마다 한층 성숙하였다. 마주 보는 사랑으로 완성되기까지의 밑거름이 된 나의 풋사랑들이다. 싱거운 풋사랑이나마 소중한 추억이다. 드라마에서 짝사랑으로 눈물 흘리고 가슴 아파하는 여인이 하루 빨리 마주 보는 사랑 이루길 빈다."

 

 

 

 

  풋사랑  이옥순

   짝사랑을 오래하던 여자가 상대로부터 청혼을 받고 들떠서 결혼 준비를 해가는 과정이 드라마에 나왔다. 상대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아픔을 달래기 위해 또 이루어질 수 없는 여자를 따돌리려는 방편으로 혼자 좋다고 따라다니던 여자를 찾아와 결혼 제의를 한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결혼하려는 마음은 어떤 것인지. 어쩌면 자기 사랑에 대한 확신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 상황을 보면서 혼자 몇 날 공상을 하다 만 싱거운 나의 풋사랑이 떠올랐다. 마음이 아프거나 슬픈 단계까지도 가지 못했으니 어쩌면 사랑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누가 짝사랑이야기를 하면 떠오르는 수줍은 사랑이야기다. 언젠가는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에 나오는 불같은 사랑이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하면서 산다. 그런 기대로 <늦어도 11월에는>이라는 여자의 일탈을 그린 소설을 읽기도 했었다.
   늘 할머니를 따라다닐 때였다. 하루는 새벽밥을 먹고 할머니가 나락을 이고 옆 마을에 갔다. 이른봄 못자리할 때를 앞두고 씨나락을 준비하는데, 가끔 이웃집과 볍씨를 바꾸기도 했다. 볍씨를 바꾸기 위해 식전에 찾아간 곳이 우리 반 반장 아이 집이었다. 마당에 들어서니 식구들이 마루에 둘러앉아 아침밥을 먹고 있었다. 그 속에 까까머리 그 아이가 있었다.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다리가 후들거렸던 것 같기도 하다. 얼마 동안 그날 아침의 인연으로 그 애가 나를 특별히 여기겠거니 하면서 혼자 가슴 설렜다. 그날의 영상이 오랫동안 마음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후에 그 애가 해군이 되어 편지를 보내왔는데 자취방을 옮겨 다니느라 끈이 닿지 못하고 말았다.
   앞집에 책을 물려주는 선배가 살았다. 물려받은 책 여기저기 선배가 달아놓은 토씨가 있었는데 글씨가 얼마나 반듯한지 책글씨와 구분이 안 될 정도였다. 그게 멋지게 보이긴 해도 볍씨 바꾸러 갔을 때 그곳에 이미 내 마음을 놓고 왔기 때문에 별다른 마음은 생기지 않았다. 그런데 중학생이 되었을 때 그 선배의 사랑이야기가 온 동네에 퍼졌다. 어느 날 저녁, 자리에 누웠는데 갑자기 꼭 무엇을 뺏긴 기분이 들었다. 옆집에 내가 사는데 왜 내가 아닌 먼 데 사는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 의문을 해결하기도 전에 멋진 영어 선생님께서 나타났다. 중년의 영어 선생님은 인기가 많았다. 단정하게 자른 스포츠형 머리, 단순한 양복 차림, 우수에 찬 옆모습이 여학생들의 마음을 흔들었다. 그러다 선생님의 특별한 사연을 알게 되었고 그게 좀 슬펐다. 선생님과 이웃해 사는 친구가 말해 준 바로는 영어 선생님께서 폐결핵에 걸려 얼마 못 산다는 것이었다. 선생님의 슬픈 표정이 이해가 되었다.
   선생님을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 평소에 싫어하던 영어 공부에 매달렸다. 아궁이에 불을 때면서도 부지깽이로 단어와 문장을 써가면서 죽자 살자 외웠다. 그렇게 선생님을 위한 공부를 시작하고 얼마 안 되어 선생님이 갑자기 전근을 가셨다. 아이들은 전근을 가신 것이라 알았지만 난 아마 돌아가셨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부터 슬픈 시나 노래의 의미를 나에게 적용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또 한 번은 교련선생님이었다. 스킨로션 냄새 폴폴 풍기는 총각 선생님이었다. 그때 우리는 선생님은 좋아해도 교련 시간은 무척 싫어했다. 선생님만 만나면 오늘 교련해요, 안 해요, 습관처럼 물었다. 비가 보슬보슬 내리는 날, 운동장에 계신 선생님을 향해 누군가 이층 복도에서 “선생님, 교련해요?” 하고 외쳤는데 선생님께서 “그래, 교련해.” 하고 답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아이가 교실에 들어와 “교련선생님 결혼한대.”라고 큰 소리로 전했다. 순식간에 교련선생님 결혼한다는 소문이 퍼졌다. 교련선생님을 좋아했던 아이들이 일제히 복도로 나와 “선생님, 결혼하지 마세요.”를 외쳤다. 나 역시 목이 터져라 ‘결혼하지 마세요.’를 외쳤다.
   사랑은 사람을 성장시키는 동력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풋사랑이었든 짝사랑이었든 그때마다 한층 성숙하였다. 마주 보는 사랑으로 완성되기까지의 밑거름이 된 나의 풋사랑들이다. 싱거운 풋사랑이나마 소중한 추억이다. 드라마에서 짝사랑으로 눈물 흘리고 가슴 아파하는 여인이 하루 빨리 마주 보는 사랑 이루길 빈다.

 

 

이옥순  -------------------------------------------
   2007년 ≪수필과비평≫ 등단,  수필집: ≪단감과 떫은 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