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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과비평 2013년 3월호, 세상마주보기] 오지 않은 딸에게 - 김행숙

신아미디어 2013. 3. 30. 02:22

"이럴 때 네가 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내 속내를 그대로 나눌 수 있는 네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나의 삶은 한결 풍요로울 것이다. 세상을 살면서 남을 별로 부러워해 본 적이 없는 내게 친구 모녀의 다정한 눈빛이 두고두고 잊히지 않는 건 한낱 부질없는 욕심일까."

 

 

 

 

  오지 않은 딸에게 김행숙

   조용한 오후, 향기로운 차 한잔을 들고 창가에 선다. 감미로운 바이올린 협주곡을 크게 틀어놓고 청소하고 빨래하다 보니 오전 시간이 어느새 지나갔다. 갑자기 너무나도 조용해졌다. 겨울 햇살이 다사로워 보이는 양지쪽에 서서 말없이 시간이 흐르는 소리를 듣는다.
   이럴 때 네가 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내 속내를 그대로 나눌 수 있는 네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나의 삶은 한결 풍요로울 것이다. 세상을 살면서 남을 별로 부러워해 본 적이 없는 내게 친구 모녀의 다정한 눈빛이 두고두고 잊히지 않는 건 한낱 부질없는 욕심일까.
   유난히 예쁜 원피스와 땋은 갈래머리에 대한 향수를 갖고 있었지만 아들을 셋이나 낳기까지도 넌 내게 오지 않았다. 삼십 대 젊은 시절, 딸이 없으면 나이 먹은 뒤에 외롭다고 나를 걱정해 주시던 시어머님의 말씀을 별 느낌 없이 들었었다.
   그러다가 길가에서 예쁜 소녀를 만나면 안아보고 싶었고 여대생이 된 친구의 딸들이 눈부시게 성장하는 모습을 보며 비로소 나에게 딸이 없음을 실감했다. 그래, 넌 내 가슴속에서만 자라왔다. 또 하나의 내가 되어 젊고 발랄한 표정으로, 나의 그림자로 살아왔다.
   나는 자주 내 속의 너와 대화하곤 했었지. 얼굴도 목소리도 알 수 없는 마음속의 대화지만 나에겐 적잖은 힘이 되곤 했었다. 네가 실제로 내 곁에 있다면 나는 아마 너와 무진장 많은 여행을 했을 것이다. 아무데로나 정처 없이 다니는 여행, 마음 내키는 대로 며칠씩 머물기도 하고 끊임없이 떠나기도 하는 여행을-. 우리는 말없이 온종일을 걸어도 좋을 것이다. 세상의 아름다움에 함께 잠기며 고즈넉한 저녁 빛의 아득함도 함께 맛보면서 나는 얼마나 마음 든든했을 것인가.
   그리고 나는 너와 함께 요리하는 시간도 즐길 것이다. 생활인으로서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가족들과 나누는 일이야말로 사랑을 나누는 중요한 순간이기 때문이다.
   또 나는 네가 능력 있는 여자가 되는 걸 강조했을 것이다. 무슨 일이든지 잘 해낼 수 있고 누구에게나 인정받는 적극적인 성품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누누이 설명했을 것이다.
   최선을 다하며 살거라. 받은 달란트를 사장시키지 말거라. 결코 게으름은 네 곁에 두지 말아라. 특별한 취미를 가져라……. 아마도 나는 네게 잔소리꾼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전에 내 딸이라면 너는 이미 그런 성품을 타고 났을 것이다.
   “쟤는 못 말려. 꼭 나 젊을 때 같다니까.” 어쩌면 이렇게 흐뭇해하며 널 바라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외출하는 엄마에게 옷을 멋지게 코디해주고 액세서리를 골라주는 조언자, 엄마의 글을 읽고 냉정한 평을 아끼지 않는 수준 높은 젊은 독자로서 너는 정말 훈훈한 우군이었을 것이다.
   데이트에서 돌아오면 사귀고 있는 남자에 대해 눈빛 반짝이며 얘기하는 사랑의 전령사를 나는 얼마나 바랐던가. 우리는 사랑의 본질에 대해, 사랑하는 방법에 대해, 보다 멋진 사랑의 기법에 대해 자주 토론했겠지. 넌 나에게 구태의연하다고, 요즘 젊은이들은 그런 식으로 사랑하지 않는다고, 가끔 면박도 주었겠지. 나는 그러는 네게서 젊은 세대의 사랑법을 배우겠지.
   가끔은 나란히 목욕탕에 가서 서로 등을 밀어주고 빨개진 뺨으로 돌아오는 길에 한창 풋풋하게 젊은 또 하나의 나를 바라보며 마음 뿌듯했을 것이다.
   어느 봄날 토요일 오후 모처럼 엄마와의 데이트를 위해 바바리코트 안에 물빛 스커트를 나부끼며 네가 달려오는 모습을 보며 나는 얼마나 가슴 두근거렸을 것인가! 그리곤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겠지. 저 사랑스런 딸을 하나님께 맡기겠노라고. 하나님의 크신 은총이 그의 평생에 가득하시기를…….
   이름도 없는 딸아. 그러나 한편 생각해 보면 너는 어쩌면 나에게서 외로움을 빼앗지 않으려고 내게 오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네가 내 곁에 든든하게 있는 한 나는 외로울 틈이 없었을지도 모르므로 내게서 끊임없는 사유와 자기극복의 과정을 이루게 하기 위해 너는 내게 오던 발걸음을 멈추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내 안에서 끊임없이 깨우치며 당겨주어 젊음에서 멀어지지 않게 긴장시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게도 아쉬운 것 하나쯤은 있어야 되지 않겠니?

 

 

김행숙  ------------------------------------------
   ≪수필과비평≫ 등단,  시집: ≪유리창나비≫, ≪햇살 한줌≫, ≪볼륨을 높일까요≫, ≪여기는 타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