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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과비평 2013년 3월호, 세상마주보기] 새내기와 나들이 - 김정구

신아미디어 2013. 3. 29. 08:41

"무엇이든 가감 없이 받아들이는 새내기의 모습이 신선해 보인다. 변화무쌍한 세상일을 미리 점칠 수는 없을 테고, 젊음의 패기가 일 처리에 한몫하는 건 틀림없다. 무작정 덤벼드는 용기를 나무랄 수는 없는 일이다. 일의 결과야 어떻게 되든지 그런 모험이 쌓이고 쌓여 성장하지 않던가? 실패의 경험에 사로잡혀 돌다리만 두드리는 것보다야 나을 테다. 하지만 누군가 김도 매어주고 거름도 주어야 할 것이다."

 

 

 

 

 

  새내기와 나들이  김정구


   구름이 잔뜩 낀 늦가을, 비가 온다는 예보에 집을 나서기가 마뜩잖다. 직장 동료와 통영으로 문학 기행을 가는 날이다. 이미 한 달 전에 예고되었지만 설레는 마음도 없고 그저 덤덤하기만 하다. 멀리 이동하는 것조차 귀찮게 느껴지는 건 무슨 까닭일까? 다행히 새내기와 동행한다기에 뭔가 기대되었다.
   퇴직을 눈앞에 두고 있지만 젊은 직원들과 여행하기는 처음이다. 그들과는 나이 차이가 무려 30년이나 난다. 세대가 한 번 바뀐 셈이다. 예전에는 상급자와 함께 여행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무언가 계속 재잘거리며 웃고 차 안이 시끌벅적하다. 아직 공직이 어떤 것인 줄 몰라서일까? 어쨌든 해방감을 만끽하는 것 같아 나도 덩달아 마음이 편했다.
   그러나 공직 생활의 소감이 어떠냐는 질문에 다들 힘들다고 한다. 어려운 관문을 뚫고 임용되었지만 이상과 현실은 괴리가 있는 모양이다. 아직은 의기투합할 때이지만 힘들고 어렵다는 걸 진즉 알게 되어 오히려 다행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선배로서 좋은 풍토를 만들어 놓지 못해 미안한 생각도 들었다. 세상에 제 입에 맞는 떡이 잘 있을 수는 없겠지만 쌓이는 일거리와 까다로운 민원을 어떻게 감당할지 염려되기도 한다.
   예전에는 신규임용 과정 교육을 8주나 받았다. 임용 후 몇 년 동안은 그야말로 사기충천하였었다. 직업에 대한 만족감도 최고조에 이르렀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날이 가고 해를 거듭할수록 사명감이 점점 희석되어 타성에 젖게 되었다. 한때는 격무를 감당할 수 없어서 사직서를 만지작거린 적도 있었다. 상급자의 경험과 노하우를 얕잡아 보기도 하고, 승진에 대한 강박감으로 동료와 갈등을 빚기도 했다. 잦은 야근에다 주말조차도 제대로 쉴 수 없어 허탈감에 빠지기도 했다.
   퇴직은 예고된 변화이지만 앞날에 대한 불안감이 끊이지 않는다. 그렇잖아도 이것저것 신경 쓸 일이 많은데 잔병마저 꼬리를 물어 허망한 생각이 든다. 한쪽이 다 나았다 싶으면 다른 곳이 또 탈이 나곤 한다. 웬만큼 아파서는 병원에 가지 않는 성미인데도 하루에 병원을 두 곳이나 쫓아다녔다. 처방된 약이 한 보따리나 되었다. 조급한 마음에 두 가지 약을 함께 복용한 결과 부작용이 나타났다. 오래전에 앓았던 안면홍조가 재발했다. 거기다가 잦은 두통도 문제다. 단순한 고통 앞에 의지가 속절없이 무너져 버린다.
   용기와 의욕이 떨어지니 삶이 점점 더 까칠해진다. 시력도 급속히 떨어져 집중력도 날이 갈수록 떨어진다. 아무리 노년기 증세라 하지만 너무 빨리 찾아오는 건 아닌지 당황스럽다. 갈피를 잡지 못한 채 뭔가 허전하고 쓸쓸함이 엄습해 온다. 단지 허전하고 불안함 때문만도 아닌 것 같다. 퇴직자에게 나타나는 전형적인 공황상태가 이런 것인지, 모든 게 나무 꼭대기에 앉은 잠자리마냥 균형 잡기가 쉽지 않다.
   새내기들처럼 무언가 자꾸 이야기하고, 남의 이야기를 많이 들어야 하는데 점점 의기소침해져 간다. 여행의 들뜬 기분은 오간 데 없고 귀찮은 생각마저 드니 그들과 어찌 소통되랴. 의학에 상식도 없으면서 안면홍조 현상을 약물남용 탓이라고 스스로 결론을 내려버리는 건 무슨 까닭인지. 내가 판단하는 것은 모두 옳다는 독선에 갇혀있는 건 아닌지. 은퇴를 대비하는 홍역일까? 새내기들에게 자리를 빨리 내어주라는 신호일 성싶기도 하다.
   무엇이든 가감 없이 받아들이는 새내기의 모습이 신선해 보인다. 변화무쌍한 세상일을 미리 점칠 수는 없을 테고, 젊음의 패기가 일 처리에 한몫하는 건 틀림없다. 무작정 덤벼드는 용기를 나무랄 수는 없는 일이다. 일의 결과야 어떻게 되든지 그런 모험이 쌓이고 쌓여 성장하지 않던가? 실패의 경험에 사로잡혀 돌다리만 두드리는 것보다야 나을 테다. 하지만 누군가 김도 매어주고 거름도 주어야 할 것이다.
   박경리의 무덤으로 올라가는 길섶에는 동백과 장미를 닮은 분홍색꽃이 울타리를 이루고 있었다. 날씨가 흐린 탓인지 분홍의 화사함은 보이지 않고 바닷바람만 통째로 맞고 있었다. 새내기도 세월이 좀 지나면 공직 생활이 장미꽃 같지 않다는 걸 알게 되겠지. 그리고 동백은 엄동설한의 바닷바람을 이겨내어야만 꽃이 핀다는 것도. 때로는 동백도 아니고 장미도 아닌 ‘분홍색 꽃’을 피워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될 것이다.
   계급사회의 일원으로서 승진에 집착하다 보면 자신에게만 집중하기도 할 테지. 그러다 보면 다른 사람의 조언을 무시하고 편견에 빠질 수도 있을 것이다. 직장이란, 나 혼자만 잘한다고 성과를 거두는 건 아니지 않던가? 피아노 건반처럼 흰 건반과 검은 건반을 조화롭게 눌러야 아름다운 선율이 흐를 것이다.
   묘비조차도 없는 박경리의 무덤처럼 새내기들이 십 년 이십 년 후에도 덤덤한 마음으로 자리를 지켜주었으면 좋겠다. 이제, 그들과 나는 갈 길이 극명하게 다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둘 다 새 길을 개척해야만 한다.

 

 

김정구  --------------------------------------------

   ≪수필과비평≫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