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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과비평 2013년 3월호, 세상마주보기] 투석 - 김공주

신아미디어 2013. 3. 28. 09:58

"마음속에 미움을 내려놓자. 이제는 미움을 버릴 때가 온 것이다. 탁한 피를 걸러내어 깨끗한 피로 만드는 투석기가 내 마음에서도 작동된다."

 

 

 

 

 

  투석  -  김공주


   조카가 당뇨 합병증으로 온몸이 퉁퉁 부어 모습을 알아보기 어려운 상태다. 시골 병원에서는 치료가 어려워 내가 사는 곳으로 옮겨와야 될 것 같다. 시부모님이 돌아가신 뒤 내가 해야 할 일은 끝났다 생각했는데, 어려서 고아가 된 조카는 결혼을 한 뒤에도 나의 도움을 필요로 했다. 그럴 때마다 내가 짊어질 짐이 아니라는 생각에 화가 난다.
   운동과 식사조절을 하라는 의사의 당부가 있었다. 그러나 이를 무시한 채 먹고 싶은 만큼 먹고 운동도 게을리한 결과 신장에서 혈액 속 노폐물을 걸러내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본인의 노력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든 것이다.
   조카는 며칠째 금식 중이다. 물도 종이컵으로 반 정도만 먹을 수 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검사를 받으며 부기가 빠지길 기다린다. 그렇게 일주일쯤 지나자 몸의 부기가 어느 정도 빠졌고, 초음파로 목의 혈관을 찾아낸 후 두 줄의 호스를 꽂아두는 수술을 하게 됐다.
   간단한 수술이라는 간호사의 설명에도 안심이 안 되는지 내 손을 꼭 잡는다. 나 역시 긴장되긴 마찬가지지만 문 밖에 있겠다는 말로 안심시켰다. 잘 먹고 잘 싸면 걱정 없다던 어른들의 말씀이 생각난다.
   결혼하고 일 년도 안 돼 졸지에 나는 조카의 보호자가 되었다. 결혼 전에는 시부모님이 키우겠다고 하시며 생활비만 도우라고 하시더니 마음이 바뀐 것이다. 자신의 시집살이에 비하면 이건 시집살이도 아니라며 시누이까지 거든다. 싫다는 말도 못하고 바보처럼 조카를 책임지게 되었다. 지금 같으면 못한다고 말이라도 해 봤을 텐데.
   투석실에 누운 조카는 생기가 없다. 짧은 시간에 투석을 끝내면 쇼크로 기절할 수도 있어 느린 속도로 투석기를 작동시킨다. 목에서 뽑아내는 피가 호스를 타고 나온다. 하얀 필터가 점점 붉어진다. 투석기가 뽑아낸 피를 노폐물이 없는 깨끗한 피로 만들고 있는 중이다. 빙빙 돌아가는 기계를 통과한 피는 다시 다른 호스를 통해 몸속으로 들어간다. 진동하는 피비린내가 비위를 상하게 한다.
   어쩔 수 없이 조카의 보호자가 되어 벌써 며칠째 병원에 있으니 직장이며 살림이 엉망이다. 편치 않은 마음으로 백 원짜리 동전을 넣고 텔레비전 채널을 이리저리 돌린다. 드라마도 영화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이삼십 분째 채널돌리기만 하고 있다. ‘대가를 바라지 않는 진정한 베풂이 보시이다.’ 스님의 법문에 채널을 고정시켰다.
   가진 것이 없다는 말을 훈장처럼 달고 사신 시어머니, 형편이 안 되면 능력만큼만 도와주면 되는데 항상 뺏긴다는 생각을 한 나. 작은 것 하나에도 공짜가 없었던 시댁, 그것이 항상 서운했던 나. 그로 인해 마음을 닫고 살아온 날들만 기억난다. 노폐물이 쌓인 피처럼 내 마음도 그랬다.
   대가 없이 김밥장사로 평생 모은 재산을 보시한 할머니도 있는데 나는 피붙이에게도 대가를 바란 것이 아닌가. 법문을 듣고 나와 시댁 사이를 돌아본다.
   마음속에 미움을 내려놓자. 이제는 미움을 버릴 때가 온 것이다. 탁한 피를 걸러내어 깨끗한 피로 만드는 투석기가 내 마음에서도 작동된다.

 

 

김공주  ---------------------------------------------
   ≪수필과비평≫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