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수필과 비평/수필과비평 본문

[수필과비평 2013년 3월호, 촌감단상] 당신의 꽃 - 변애선

신아미디어 2013. 3. 25. 08:46

"하지만 나는 그에게 갈 수 없다. 가고 싶다는 말은, 갈 수 있다는 말과 전혀 다르다. 그가 건넨 꽃을 받은 지금의 나는, 열다섯 살 그때처럼 그의 마음을 받아들일 수가 없는 처지다. 이렇게 다시 한 번 비켜가야 하는 것이 너와 나의 운명이리라."

 

 

 

 

 

   당신의 꽃  변애선


   겨울 오후, 그의 전화를 받았다. 수십 년 만에 홀연히 나타나서 전화선을 타고 돌연 그가 나의 이름을 불렀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그는 누구인가. 이 지상에서 나에게 처음으로 꽃을 선물했던 소년이었다. 그때 나는 그가 주는 선물을 받으면서도 고마워하는 기색을 보인 적이 없었다. 매정하게 굴었고 그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았다. 아버지의 사업이 부도가 나서 일가족이 거리로 내몰렸던 그때도 한겨울이었다. 그런 나의 형편을 부잣집 도련님인 그에게 말하지 못했다.
   그가 사라진 이후에야 그를 생각했다. 그를 좋아하면서도 그토록 냉대한 것은 사실은 내가 그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깨달았을 때, 그는 이미 사라진 후였다. 스무 살의 어느 겨울밤에 남포동에서 우연히 스친 이후로 다시는 만날 길이 없었다.
   그를 영영 잃고 말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려니 가슴이 아팠다. 너무 늦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쩌면 기다렸을 것이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점점 늙어가면서도 손 한 번 잡은 적이 없는 그 소년을 그리워했다. 이따금 그를 찾으려고 하다가도 겁이 나서 멈추곤 했다. 추억이란 순정한 것이어서 그를 찾으려는 내 모습이 오히려 추했다. 그 사람이 나를 찾으러 오지 않는다는 건 원망할 수 없었다. 그토록 냉정하고 야속하게 내친 나를 찾아올 리가 있겠나.
   그런데 그가 왔다. 하필이면 그때 나는 한 시간이 넘도록 환자의 하소연을 듣고 있었다. 마침내 혼자가 되었을 때 그가 등장했다. 그동안 나의 약국 앞을 서성이며 기다렸다는 그의 손에는 장미꽃이 붉게 빛나고 있었다. 꽃을 헌정할 줄 아는 사람, 그는 변하지 않았다.
   나는 후회를 하고 살았다, 속으로는 그렇지 않으면서 겉으로는 매몰차게 굴었던 그때의 일을. 다시는 그 사람에게 그렇게 대하지 않을 것이다. 사실은 너를 좋아해서 그랬다는 말을 꼭 할 것이다. 그의 마음을 더는 아프게 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나는 그에게 갈 수 없다. 가고 싶다는 말은, 갈 수 있다는 말과 전혀 다르다. 그가 건넨 꽃을 받은 지금의 나는, 열다섯 살 그때처럼 그의 마음을 받아들일 수가 없는 처지다. 이렇게 다시 한 번 비켜가야 하는 것이 너와 나의 운명이리라.

 

 

변애선  -----------------------------------------
   ≪에세이스트≫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