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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과비평 2013년 2월호, 세상마주보기] 라일락이 필 때면 - 전해주

신아미디어 2013. 3. 21. 08:30

"라일락 잎은 소태처럼 썼다. 나는 내 마음을 온통 빼앗을 만큼 달콤하고 향기로운 꽃을 피워낸 그 잎에 그토록 쓴 맛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그는 내 모습을 보며 재미있다는 듯 웃었고 나도 따라 웃었다. 그는 이 참혹한 맛을 두고 사랑의 참맛이라고 했다."

 

 

 

 

 

  라일락이 필 때면  -  전해주


   목련이 다 떨어지고 벚꽃도 초록 이파리를 불러내는 4월의 끄트머리, 은은한 향기를 뽐내며 라일락이 피어난다. 라일락의 본디 우리말은 수수꽃다리다. 불어로는 ‘리라’로 <베사메무초>라는 번안곡 가사에도 이 꽃이 등장한다. 라일락꽃 향기를 맡으면 나도 모르게 이 노래가 내 입에서 흘러나온다. “베사메 베사메 무초 리라꽃 향기를 나에게 전해다오.” 노래를 흥얼거리는데 문득 오래전에 책갈피에 끼워졌던 색 바랜 단풍잎을 다시 보는 것처럼 이제 마음에서 바싹 말라버린 추억이 떠오른다.

 

   여고 시절, 학교에 불어 선생님이 새로 오셨다. 대학을 갓 졸업하고, 첫 발령으로 우리 학교에 온 총각선생님은 첫 시간에 이 노래로 인사를 대신했다. 깍듯하고 핸섬해 보이는 선생님이 노래를 마치자 우리는 박수를 치며 환호를 보냈다. 학생들은 모두 가슴이 부풀었다. 나도 불어 공부를 열심히 해서 선생님의 눈에 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내 속내를 드러내 놓기도 전에 우리 친구 집에 하숙을 하던 선생님은 그 친구와 열애 중이라는 소문이 떠돌았다. 그 소문을 들었을 때 나에게는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사랑에 빠진 그 선생님이 원망스러웠고, 아직은 공부해야 할 그녀를 택한 선생님의 이미지도 구겨져 버렸다. 풋사랑조차 해보기 전에 한 이별 연습이었다.
   라일락은 그 보랏빛 꽃잎에 왠지 모를 아련한 아픔이 깃들어 있는 것 같다. 톨스토이의 ≪부활≫에서 청년 귀족 네흘류도프가 하녀 카츄사를 일시적 기분으로 농락할 때 그녀를 유혹하기 위해 라일락을 들고 가는 장면이나, 어려운 노동자의 삶을 노래한 롱아일랜드의 가난한 시인 휘트먼의 시를 봐도 그렇다.

 

지난 봄 라일락이 일찍 앞마당에 피었을 때
그리고 밤에 큰 별이 일찍 서녘 하늘에 질 때
나는 서러워했다.

 

그리고 여전히 서러워하리라,
해마다 돌아오는 봄과 더불어.

 

해마다 돌아오는 봄이여,
너는 분명 세 가지 것을 내게 가져 오리라.

 

해마다 꽃피는 라일락과, 서녘에 지는 별과,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그분의 생각을.

 

   라일락이 필 때면 그 진한 향기가 내 가슴 깊이 남아 있는 아련한 상처를 건드린다.
   대학 시절, 그는 객지에서 외롭던 나의 마음을 온통 사로잡았다. 그가 보낸 편지는 내 마음속에 들어와 앉은 듯이 내 마음을 잘 헤아려 주었다. 나의 반쪽인 양 감탄을 하며 그에게 점점 빠져들어 갔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는 내 친구와도 열렬히 교제 중이었다. 친구가 나를 적대시하는 것을 이상히 여기던 중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급기야 친구는 몸져눕게 되었고, 그는 나를 떠나야 하나 어쩌지 못하고 구실을 찾고 있는 듯했다.
   화창한 어느 봄날, 그는 내게 하트 모양의 라일락 잎을 하나 따 주면서 진지하게 말했다.
   “이 잎을 어금니만 하게 접어서 입 안 깊숙이 넣고 씹어봐. 딱 한 번만 깊게 눌러 씹어도 껌 향기가 나.”
   나는 당시 ‘라일락’이라는 조금은 느끼한 향을 가진 껌을 생각하며, 그 풋풋한 잎을 건네받아 접고 또 접었다. 그리고 딱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꾹꾹 눌러 씹었다. 라일락 잎은 소태처럼 썼다. 나는 내 마음을 온통 빼앗을 만큼 달콤하고 향기로운 꽃을 피워낸 그 잎에 그토록 쓴 맛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그는 내 모습을 보며 재미있다는 듯 웃었고 나도 따라 웃었다. 그는 이 참혹한 맛을 두고 사랑의 참맛이라고 했다. 찬란한 봄날 이미 이별을 준비하고 있었던 그는 결국 라일락 잎의 쓴맛보다 더 진한 이별의 맛을 내게 보여주고 말았다.
   나에게 사랑은 이별하기 위해 찾아오는 필수조건 같다. 죽음이 삶과 대립되는 말이 아니고 삶의 요소이듯이, 사랑이 꽃피기도 전에 나에게 이별이 먼저 기다리고 있었다. 라일락의 꽃말이 ‘젊은 날의 추억’이어서 일까. 나는 이맘때면 가끔 그 철없었던 친구가 그 선생님과의 사랑을 추억으로 간직하는 것이 더 나았을까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라일락이 필 때면 나는 언제나 다시 사랑을 하고 싶다.

 

 

전해주  -------------------------------------
   ≪한국수필≫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