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수필과 비평/수필과비평 본문

[수필과비평 2013년 2월호, 세상마주보기] 도장圖章 이야기 - 정광애

신아미디어 2013. 3. 21. 08:37

"손때가 묻어 본연의 나무색마저 퇴색되어버린 목도장, 아버지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이 다가왔다. 유년기에 너무도 커 보였던 최고의 아버지, 방황하던 사춘기 때 멀어진 아버지, 그리고 한 아이의 엄마가 되고서야 아버지를 이해하고 그 깊은 사랑을 알게 되었던, 성장하며 때마다 달랐던 아버지에 대한 나의 철없던 마음이 미안함과 연민으로 다시 되살아나며 가슴이 먹먹했다."

 

 

 

 

 

  도장圖章 이야기 정광애


   아버님은 여행을 다녀오실 때마다 아들 선물로 도장을 사오셨다. 그것도 꼭 이름까지 새겨서 가져오신다. 그리고 가장 좋고 비싼 도장이라는 것을 강조하신다. 벌써 세 번째 똑같은 선물이다.
   그 좋다는 상아와 옥으로 만든 비싼 도장은 그대로 서랍 속에서 자고 있다.

 

   1.
   친정어머니 살아생전 막내딸 것이라며 장만했던 화초장이 30여 년이 지난 후 나에게 돌아왔다. 그동안 막내딸이 이런저런 핑계로 가져가지 않자 어머니가 당신 것처럼 사용하셨다. 그리고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시자 긴 세월을 돌아 원 주인 곁으로 돌아온 것이다.
   아무것도 없는 텅 빈 화초장, 어머니의 흔적이 있을 것만 같았는데 너무도 깨끗했다. 나프탈렌 향내가 쑥 밀고 나왔다. 외출할 때면 어머니 치맛자락에서 나던 냄새, 어머니를 만난 것 같아 가슴이 뭉클하며 코끝이 시큰했다. 팔을 장 속에 넣고 휘저어 보았다. 늘 쓸모가 많을 것이라는 어머니 말씀처럼 장 깊이가 꽤나 깊다.
   그런데 장 위쪽에 작고 앙증맞은 서랍 세 개가 나란히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오랜 세월을 보아왔지만 처음 보는 서랍들이었다. 마음에 없었으니 보았다고 한들 눈에 들어왔을 리가 만무하다. 귀중품 보관용 같았다. 어머니는 그곳에 무엇을 넣으셨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첫 번째 서랍을 열었다. 아무것도 없이 깨끗하다. 두 번째 서랍 손잡이를 잡았다. ‘삐익’ 소리를 내며 어렵사리 열렸다. 길이 들지 않아 불편하게 열린 것을 보면 자주 쓰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 자식만 알고 지내신 어머니에게 무슨 귀중품이 있어 사용하셨을까, 세 번째 서랍도 두 번째와 마찬가지로 신경질적인 소리를 내며 속을 보였다. 그런데 맨 안쪽에 손바닥 크기의 빨간 천 지갑이 눈에 들어왔다.
   뭘까? 손때 묻은 천 지갑을 열었다. 세월이 묻은 낯선 도장 하나가 들어 있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아버지 도장이었다. 나무 도장이었지만 날렵한 허리 곡선을 가진 몸통, 머리에는 뚜껑까지 갖췄다. 아무래도 손쉽게 쓰는 막도장은 아니고 인감도장인 듯싶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가시고 10여 년을 더 사셨다. 그런데 그동안 그 도장을 어떤 사연으로 가지고 계셨던 것일까? 그 10여 년의 세월을 그냥 잊어버리고 놔두셨던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손때가 묻어 본연의 나무색마저 퇴색되어버린 목도장, 아버지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이 다가왔다. 유년기에 너무도 커 보였던 최고의 아버지, 방황하던 사춘기 때 멀어진 아버지, 그리고 한 아이의 엄마가 되고서야 아버지를 이해하고 그 깊은 사랑을 알게 되었던, 성장하며 때마다 달랐던 아버지에 대한 나의 철없던 마음이 미안함과 연민으로 다시 되살아나며 가슴이 먹먹했다.


   2.
   아버지의 도장을 보면서 문득 나의 낡은 목도장을 생각했다. 어디 내놓기도 쑥스러울 정도로 볼품이 없다. 보는 사람들은 웬만하면 바꾸라고 말한다. 그동안 내 손에서 정이 든 것도 있지만 사실 바꾸지 못한 나만의 이유도 있다.
   결혼 초 넉넉하지 않던 시절, 어머니는 막내딸 사는 것이 안쓰러웠던지 이불장에 몰래 돈을 넣어 놓으시고는 통장에 넣어 놓고 부족할 때 쓰라고 당부하셨다. 나는 당연한 듯 받았고 그때 통장을 만들기 위해 지금의 도장을 마련했다.
   그 후 그 도장은 가난한 나의 살림에 별별 용도로 쓰게 되었고 지금은 나를 대신할 인감으로까지 쓰고 있다. 가끔 바꿔 볼까 생각했다가도 그때의 어머니 애틋한 마음이 생각나 쉽게 바꾸지 못한다.
   2개의 낡은 도장, 하나는 아버지의 체취가 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어머니의 마음이 들어있다. 주인은 다르지만 어딘가 닮은꼴이 보인다.
   도장은 사람을 대신하는 중요한 것으로 생각한다. 쉽게 쓰는 막도장이라는 것도 있지만 인감이라는 특별한 이름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선물이라는 이름만 가지고 서랍에서 그냥 잠을 자고 있는 남편의 도장, 언제 사용할 거냐고 물으면 건성으로 듣고 만다. 아버님은 좋은 도장은 운을 부른다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남편은 계속 써오던 손에 익숙한 도장이 더 좋고 편한 것 같았다.
   어머니에게서 어느 날 나에게로 온 아버지의 도장, 주인이 없으니 쓸 일도 없다. 아버지에 대한 추억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볼 때마다 왜 그렇게 짠한 마음이 드는지 모르겠다.

 

 

정광애  ----------------------------------------------
   ≪에세이문학≫ 등단,  수필집: ≪어느 햇빛 좋은 날≫, ≪꽃아 피지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