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어오는 한 자락 바람결에 떠오르는 심상이 나를 뒤흔들 때마다 문학이라는 거대한 산을 우러르며 손짓해 보았지만 너무 높아 오르지 못했다. 관심은커녕 따뜻한 눈길 한번 주지 않는 냉엄한 문학의 언저리에서 빙빙 돌다가 어디선가 좋은 글귀라도 만날라치면 가슴 밑바닥에서 소리 없는 뜨거운 그 무언가가 꿈틀거리곤 했다."
내 꿈은 오늘도 새벽을 달린다 - 이선화(파인)
너에게 꿈이 아직 남아 있더냐? 너는 오늘도 무엇을 향해 달리는 것이냐? 고요하게 어둠을 밝히는 새벽 시간에 내가 나 자신에게 수없이 던진 질문이다. 소싯적엔 막연하게 거창한 꿈도 꾸었다. 그 꿈들은 현실과는 동떨어져 이루기도 어려웠지만 꼭 이루고야 말겠다는 집념도 의지도 없이 어영부영 보냈던 젊은 날이었다. 꿈을 펼친다는 자체가 대단한 모험이었고 사치였던 시절이었다. 지금은 여성 대통령이 나오는 세상이 되었지만 그때 여자는 조신하게 있다가 신랑 잘 만나 결혼하면 된다는 그 시대의 고정관념이 여성들의 꿈과 정체성을 상실시켰다. 속에서는 수많은 상념들이 끊임없이 치밀어 올랐지만 난 누가 뭐래도 겉으로는 요조숙녀의 모습이었다. 용기 없어 착할 수밖에 없었던 나약한 사람이 바로 나였다.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세월이 여기까지 데려다 주었다는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가끔 가을걷이를 끝낸 텅 빈 들판처럼 내 가슴은 허허롭고 황량했다. 불어오는 한 자락 바람결에 떠오르는 심상이 나를 뒤흔들 때마다 문학이라는 거대한 산을 우러르며 손짓해 보았지만 너무 높아 오르지 못했다. 관심은커녕 따뜻한 눈길 한번 주지 않는 냉엄한 문학의 언저리에서 빙빙 돌다가 어디선가 좋은 글귀라도 만날라치면 가슴 밑바닥에서 소리 없는 뜨거운 그 무언가가 꿈틀거리곤 했다. 아래에 소개하는 이 글도 어디에서 읽은 글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렇게 나에게로 왔다.
“청춘은 짧다. 보석처럼 간직하며 그것을 아껴라. 비천함과 더러움이 숨어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상념을 위대하게 하고 꿈을 맑고 깨끗하게 하여라. 꿈꾸기를 그만두었을 때 청춘은 끝나는 것이다.”
이 글을 음미할 때마다 80세의 청년이 있고 20대의 노인이 있을 수 있음을 실감케 되었다. ‘당신이 하는 작은 일이 큰 기적을 이룰 수 있습니다.’ 굳이 이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작은 목표라도 설정해 놓았다면 그것은 꿈을 향해 달려가는 진일보한 나의 모습이 되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말한다. 꿈은 멀리 있는 게 아니라고. 꿈을 향해 내딛는 발걸음은 행복을 찾아가는 길과 맞물려 있다고. 행복이 무엇일까? 이대로 머물러 주었으면 하는 바로 그 상태를 행복이라 한다면 아주 작은 것이었지만 그런 순간이 나에게도 있기는 있었다. 연년생 두 아이를 키우며 무료해서 끼적였던 나의 습작이 어느 여성지에 당선되어 발표되고 시상식을 하던 날, 그 도도하던 문학이 나에게 함께 가자고 손잡아 주었던 가슴 떨리던 그날을 잊지 않고 있다. 나의 꿈을 펼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시상식에 입고 갈 의상을 준비하고 꽃무늬 블라우스가 구김이 갈까 봐 거울을 보고 또 보고. 그러나 뜻하지 않은 나의 변덕을 누가 알았으리. 꿈을 이룬 것 같은 행복한 시간도 잠시 무슨 조화 속인지 나는 그날 이후로 한 줄의 글도 쓸 수 없었다. 모든 것이 심드렁하고 자기 이야기나 구질구질하게 나열하는 글을 쓰는 일이 막무가내로 싫어지기 시작했다.
시간은 멈추지 않고 속절없이 흘렀다. 푸르른 날의 열정들이 나를 오래도록 버티게 할 줄 알았는데, 문학을 외면하고도 거리낌 없이 잘살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때때로 가슴이 시리고 남 모를 이방인 같은 고독에 나는 또 시달리고 있었다. 말다운 말이 듣고 싶고 글다운 글이 그리워 나는 늘 허기진 사람처럼 헛헛하고 또다시 목이 말랐다. 증세는 조금 달랐지만 예전의 그 가슴앓이가 서서히 도지고 있었다. 내가 그토록 목말라 했지만 변변히 문학에게 예를 갖추지도 못했고 제 기분 내키는 대로 함부로 대했던 무례하기 짝이 없었던 지난날의 내가 원망스러웠다. 문학과의 소통이 어느새 간절한 바람 되어 다가가고 싶었다. 마치 철없이 무작정 집 나간 며느리가 고향 하늘을 바라보며 눈물짓는 것처럼.
이제 꽃 한 송이, 작은 잎새 하나 피워내지 못하는 죽어 있는 고목 등걸과도 같은 허덕거리는 나에게 어느 날, 그럴 줄 알았다며 넌지시 내미는 따뜻한 손과 넓은 가슴, 내가 무슨 말을 지껄여도 빙그레 웃어주는 문학과의 재회, 그 문학이 수필이라는 이름으로 나를 찾아온 것이다. 내치지 않고 오래도록 기다려준 옛 정이 눈물겨웠다. 이제야 다시금 키우고 싶은 작은 꿈 하나. 그늘 속에 갇혀 용기 없어 내놓지 못했던 상처 난 가슴이면 또 어떠랴, 그 아픔도 끌어내어 치유해 주어야지. 한 줄의 문장에 생명을 불어 넣는 그 신선한 작업이 새롭게 나를 부추겨 줄 것이다. 존재의 내 그늘에서 생각하게 하는 인간의 내면을 폭넓게 이해하고 성찰하며 가야겠다. 또 누가 알랴. 세상 누구와도 소통하고 세상 누구라도 공감할 산뜻한 수필 한 편 쓸 수 있을지.
만물이 깨어나려고 일렁이는 이 새벽 시간을 나는 사랑한다. 도란도란 들려오는 미세한 생명의 소리를 듣는다. 햇볕과 그늘이 함께 공존하는 우리네 삶, 빛바랜 나의 하찮은 꿈이 밝은 햇살 되어 어느 모퉁이 작은 뜰 한 자락이라도 비췄으면 좋겠다. 고통이라는 어둠을 밀어내고 절망이라는 참담함도 떨쳐버릴 수 있도록 내 그늘의 소중함도 간과하지 않겠다. 어찌 복사꽃 만발하는 무릉도원만 꿈꾸겠는가!
이선화(파인) -------------------------------------------
≪수필과비평≫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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