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모습이 비록 추하고 혐오스러울지라도 삶의 뚜렷한 목표를 향해 묵묵히 걸어간 궤적, 삶의 과정, 삶의 업적이 보석처럼 빛나고 향기로 충만하면 값진 삶, 멋있는 길이리라. "
팔자소관 - 김재환
가을이 아버지의 병세처럼 시름시름 깊어간다. 엊그제 내린 서릿발에 감잎들은 미수를 넘긴 아버지가 마지막 생을 정리하듯 삶의 끈을 하나 둘 내려놓고 있다. 무수한 잎에 가려 보이지 않던 장동감이 새색시처럼 주황빛 제 모습을 살며시 내보인다. 감을 딸 때가 되었다. 사다리를 설치하고 감 장지와 줄 맨 망태를 준비하여 감나무에 오른다. 코발트빛 하늘엔 어린애 주먹만 한 가을의 전리품이 보석처럼 눈부시다. 이곳 산중으로 거처를 옮긴 지 일갑一甲을 넘겼다. 감 따기는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치르는 연례행사가 되었다. 예부터 서 있던 내 나이쯤 되었음 직한 씨 없는 감나무와 네모꼴 물감나무는 하늘 끝까지 솟아 있다. 기계문명이 발달되어 웬만한 농작업이 기계화된 현대지만, 감 따기는 원시적 수작업이 최고 최상의 방법이다.
수확철이면 산막 대일원垈一苑 안팎에 심어둔 과실수에서 몇 종류 과일을 정성스레 거둬들인다. 늦봄 매실을 앞장세워 따고 한여름 복숭아와 살구를 딴다. 추석쯤에 이르면 대추, 호두, 밤, 사과, 배, 은행, 감을 수확한다. 꽤 외진 깊은 산중이다 보니 다람쥐, 날다람쥐, 담비 등 산짐승과 까치, 때까치, 산비둘기, 까마귀, 온갖 텃새 등 날짐승과 말벌, 호박벌과 같이 나누며 산다.
잘 익은 감을 어린애 다루듯 조심조심 망태 가득 따 담는다. 목이 뻐근하다. 송곳마냥 뾰쪽한 대장지로 감꼭지를 겨냥해 힘껏 찌른다. 빗나간 감 장지는 새파란 하늘을 찌른다. 이내 파란 잉크가 눈물 되어 쏟아진다. 괜스레 눈시울에 이슬이 맺힌다. 하늘 한편엔 조각달이 희미하다.
아이의 손톱 조각 하나
초승달로 뛰어 올라 하늘에 걸린다.
일흔 넘은 어머니의 손톱을 깎던 날
내 가슴안으로 그믐달이 들어와 박혔다.
문득 오시열의 시 <손톱에 뜬 달> 한 구절을 허밍한다. 모든 과일은 때가 되면 자연스레 나무와 이별하며 땅에 떨어지건만 사람의 필요에 따라 삶의 끝, 운명이 결정된다. 이것이 과일의 운명이려니 싶다.
대추를 수확할 때를 생각한다. 대추나무 아래에 비닐멍석을 펼쳐놓고 튼실한 대나무 장대로 인정사정없이 두들겨 패 턴다. 대추는 삶의 마지막을 두들겨 얻어터지며 떨어진다.
추자(호두) 역시 운명은 같다. 껍질을 벗고 깨끗한 모습으로 생을 마감 하건만 드센 비바람과 담비 다람쥐가 내버려두지 않는다. 다 익기 전 장지로 두들겨 맞으며 죽어간다.
밤은 그래도 나은 처지다. 예쁜 입 벌려 곱고 튼실한 열매를 내어주지만, 나처럼 성질 급한 주인을 만나면 저녁놀만큼 삶을 남기고 매 맞으며 생을 마감한다.
복숭아나 배는 벌 나비로부터 보호를 받기 위해 고급 방충복으로 무장하고 살아간다. 부드러운 장갑을 낀 사람의 정성 어린 손길을 받고, 애지중지 어느 한곳 생채기가 날까봐 최상의 서비스를 받으며 임종을 맞는다.
은행은 지독한 구린내 때문에 사랑을 받지 못하고 최후의 순간을 맞는다. 자아방어본능에 충실한 은행, 그러기에 곤충들의 시달림을 받지 않는가 보다. 어쩌면 매실과 같이 꽃과 잎보다 푸대접을 받는지도 모른다. 사과나 감 역시 인간의 지극한 정성과 사랑을 받으며 최후를 맞는다.
모든 열매는 제철이 되면 나무가 잎 피우고 꽃피워 열매를 맺어 고이고이 기른다. 온갖 자연재해와 짐승들의 침범을 막아내고 병충해를 견뎌 이겨야만 한다.
잠시 한 시절 개천에서 용 나는 때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먼 옛날, 전설 같은 이야기가 되었다. 사람의 한 생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을 듯싶다.
어느 사람은 부모 잘 만나 황금 비단길을 걸으며 평생 왕으로 재벌로 생을 마감하기도 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일생을 가난과 고뇌와 한을 가슴에 안고 질퍽거리는 흙탕길을 걷는다, 조그만 제 꿈도 이루지 못하고 사라져간다. 세상은 인생은 천차만별이려니 싶다.
대추처럼 대나무 장대로 두들겨 맞으며 생을 마감하는 불쌍한 사람이 있다. 은행이나 호두, 밤처럼 장수하며 때를 기다리다 외롭고 고독하게 죽어가는 사람도 있다. 배, 사과 복숭아마냥 주위로부터 지극정성을 받고 평탄한 삶을 누리다 임종을 맞기도 한다.
죽음의 모습이 비록 추하고 혐오스러울지라도 삶의 뚜렷한 목표를 향해 묵묵히 걸어간 궤적, 삶의 과정, 삶의 업적이 보석처럼 빛나고 향기로 충만하면 값진 삶, 멋있는 길이리라. 대통령 선거가 다가온다. 왕족으로 산 공주 같은 사람, 개천에서 이무기가 되어 용을 꿈꾸는 서민, 온실에서 곱게 자라 때 묻지 않은 비교적 순수한 사람, 셋이서 조국과 민족을 위해, 영광된 반쪽 대한민국을 위해 이 한목숨 다 바쳐 헌신하겠다고 핏대 세우며 야단법석 난리 피는 꼴이 왠지 미덥지 않다.
유권자가 된 지 40년을 훌쩍 넘긴 나이에 내가 뽑은 대통령은 단 두 분이었다. 비교적 책무에 충실했지만 기대에 못 미쳐 조금의 미련과 연민을 느끼고 있었다.
훗날, 우리는 죽음을 맞을 때 어떻게 죽을까? 무슨 색깔일까? 어떤 향기를 피울까?
공허하게 되뇌어 본다.
김재환 ----------------------------------------
≪수필과비평≫ 등단, 수필집: ≪금물결 은물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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