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과비평≫ 1호에서는 여성적 타자가 주목을 끌었다. 작품의 서술자가 남성이든 여성이든 여러 작가들이 여성을 타자화하여 모성과 여성성을 나름대로 해석하고 있다. 그중에서 여성적 자아와 여성적 타자를 등장시킨 세 작품을 선정하여 ‘봄’과 ‘보여짐’, ‘여성 자아’와 ‘여성 타자’와의 관계를 살펴보기로 한다."
드러내기로서 수필 vs. 타자他者로서 여성들 - 박양근
문학은 시선의 집합이다. 아담과 이브가 지식의 과일을 따 먹고 벗은 몸을 부끄러워할 때 출현한 타자는 수치심을 의식한 첫 인간, 바로 자기 자신이다. 그 후 자아가 타자를 억압하거나 외면하면 할수록 타자는 이성과 감성의 틈새를 비집고 나타나 숨은 신분을 보여주기 시작하였다. 드러난 자아의 ‘봄’과 숨은 타자의 ‘보여짐’을 가시화한 것이 문학으로 나아간다.
여성은 천성적으로 남성에 대하여 타자성을 지닌다. 동시에 다른 여성의 타자이기도 하다. 서구사회에서 대표적인 이중 타자가 흑인 여성이라면 남성중심사회인 한국에서 이중 타자는 주로 여성이다. 그들은 자신의 존재를 가족에 일치시키거나, 주변 여성과 나란히 서면서 좌절을 느낀다. 불편함과 수치심마저 자각한다. 수필을 쓰고 싶다는 것도 그들에게는 ‘드러냄의 욕망’에 가깝고 그 점에서 여성은 남성보다 더 타자 지향적이다.
타자는 본질적으로 반성적인 모습을 취한다. 자아를 되돌아보며 비판하기도 한다. 그때 자아는 그것이 나의 대상이듯이 나도 그것의 대상이라는 사실에 당혹해한다. 타인 앞에서 느끼는 이러한 불안감은 타자라는 개념을 부정할수록 더욱 심각해진다. 이 순환적 시선이 수필 화자가 내면을 살펴보는 언어로 나타나는 것이다. 화자가 “(타자는) 나를 수치스럽게 만든다.”는 사르트르의 말에 동의하는 것도 비난받을 만한 행동을 하여서가 아니라 그냥 숨기고 싶은 정체가 폭로되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현실적 타자를 윤리적 타자로 전이시키는 것이 작가의식에 해당한다.
≪수필과비평≫ 1호에서는 여성적 타자가 주목을 끌었다. 작품의 서술자가 남성이든 여성이든 여러 작가들이 여성을 타자화하여 모성과 여성성을 나름대로 해석하고 있다. 그중에서 여성적 자아와 여성적 타자를 등장시킨 세 작품을 선정하여 ‘봄’과 ‘보여짐’, ‘여성 자아’와 ‘여성 타자’와의 관계를 살펴보기로 한다.
백두현의 <삼백 리 성묫길 Ⅲ>
<삼백 리 성묫길 Ⅲ>은 ‘여성은 타자’라는 인식의 문을 여는 작품이다. 파란만장한 삶을 마친 할머니는 작가 백두현에게 여성적 타자로 존재한다. 할머니의 삶을 책임지는 일을 마지막 순간에 포기함으로써 할머니는 그의 양심을 비추는 거울이면서 숨겨진 타자가 되었다. “입이 없는” 할머니에게 가는 성묫길도 타자를 대면하는 노정이 된다. “마음의 짐을 진 걸음”으로 “삼백 리 회한의 길”을 오가는 동안 그는 불편스럽지만 할머니와 대화를 나눌 수밖에 없다. 만일 할머니를 죽게 했다는 양심의 거리낌을 감당하지 못하여 회한의 길에서 벗어난다면 죄의식은 더욱 깊어질 따름이다.
백두현의 할머니는 전근대적 운명을 겪은 여성의 전형이다. 꽃다운 열여덟 나이에 남편이 사할린 노역장으로 끌려간 뒤 그녀는 죽을 때까지 “청상과부”로 지냈다. 그뿐만 아니라 귀향하고픈 남편에게 뱃삯을 보내주지 못하여 남편이 북송선을 탔다는 죄책감으로 괴로워한다. 그녀의 호된 시집살이가 끝나면서, 아들은 암으로 먼저 떠나고 며느리마저 교통사고로 죽는다. 직장암에 걸리면서 그녀의 운명은 손자에게 맡겨진다. 어찌 보면 할머니에게는 타자의 인생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화자에게 할머니는 이중적 존재이다. 손자로서 할머니를 부양해야 한다는 의무감과 경제적 부담감은 무기력뿐만 아니라 수치심마저 불러일으킨다. 할머니에게 연민과 불편한 마음을 품을지라도 그에게는 부담스러운 짐이다. 무엇보다 할머니를 볼 때마다 여성의 보편적인 운명을 저절로 인식한다. 할머니라는 타자에 의하여 도리어 ‘보여짐’의 대상이 되어버린 상황이 남자/손자에게는 희비극이 된 것이다.
백두현의 주체성이 사라지는 전환점은 할머니가 직장암 수술을 받는 시점에 놓여진다. 그가 할머니의 운명을 결정해야 하지만 수술 여부는 “나는 가난했다.”는 경제적 조건에 좌우되어 버린다. 병원비 “70만 원”을 감당하기 어려워 할머니를 요양병원으로 모시지만 그녀는 8개월이 지나도 죽지 않는다. “어서 빨리 시한부 6개월”이 지나기를 바랐던 그의 마음은 1년이 지나면서 “강박관념”으로 굳어진다. 타자인 할머니가 그를 죄의식에 빠뜨린 것이다.
문제는 할머니가 예상대로 죽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녀는 죽을 수 없다. 목숨 줄이 병원비가 아니라 북에 살아 있을 “남편”에 매여 있다. 그는 그녀의 삶을 지옥으로 만든 사람임과 동시에 그녀를 구출해줄 수 있는 유일한 구원자이다. 그는 그녀의 존재성을 인정해주는 유일한 타자이므로 그녀는 남편과의 만남을 위해 살아남아야 한다. 그녀에게 주변 가족들은 한갓 물체일 뿐이므로 그 은밀한 꿈과 타자의식을 후손들에게 드러낼 수 없다.
할머니가 여전히 생존해 있다는 현실에 초조해진 그는 “무슨 수를 내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불교 신자인 할머니를 천주교에서 운영하는 무료요양시설로 옮긴다.
그날 할머니는 내게 아무런 말씀도 않으셨지만 내가 자리를 비우자 고모에게 불같이 화를 내셨다고 한다. 절에 다니는 노인네를 이런 곳으로 데려왔다고 역정을 내시다 그날따라 약도 드시지 않고 지쳐 잠이 드셨다. 그리고 끝이었다. 거짓말같이 병원을 옮긴 바로 그날 모든 것이 끝났다. 나의 현대판 고려장이 끝난 것이다.
본의 아니게 할머니가 “현대판 고려장”으로 장사되었다. 그런데 상황은 끝나지 않았다. 할머니는 죽었지만 타자는 여전히 남아 있다. 타자로서 할머니가 드러낸 죄의식은 기독교적으로 표현하면 원죄이고, 불교적으로 말하면 업業이다. 심리학적으로 설명하면 타자의 시선이다. 그 어느 것이든 죽은 할머니는 백두현의 존재 일부를 훔쳐 버렸다.
이러한 상황에서 백두현은 “할머니(타자)가 나를 수치스럽게 만든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 20여 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도 “죄책감으로 안락하지” 않으며 고해성사와 주변의 위로는 아무런 위안이 못 된다. 그럼 어쩌란 말인가. 기껏 허용된 일은 “삼백 리 성묫길을 묵묵히 다니는 것”뿐이다.
종교적 죄의식에는 끝이 없다. 그러나 그의 죄의식에는 끝이 보인다. 성묫길을 오가는 걸음을 죄를 씻어내는 속죄방식으로 간주해보는 것이다. 더군다나 고행 길을 나선 그의 곁에 누군가 있지 않은가. 그 동행자가 바로 젊은 시절의 할머니다. 할머니는 “남편을 귀향시키기 위해 급전을 구하려 이집 저집 다니던 가난한 젊은 과부”로 변해 있을 뿐만 아니라, 남편을 구하지 못한 죄의식을 평생 지니고 살았다. 그래서 더더욱 손자인 그는 “사할린에서 고향마을까지 뱃삯을 마련해 들고 가는 심정”으로 성묘를 나서며 죽은 할머니와 서로에게 타자로 존재하게 된다.
<삼백 리 성묫길 Ⅲ>이 구현하는 윤리적 가치는 실천이라고 하겠다. 그에게 성묫길은 잃어버린 자아를 되찾는 길이므로 언젠가 자아를 회복할 가능성을 지니고 할머니와 여성은 윤리의식을 끊임없이 확인시켜주는 타자로 존재한다. 이로써 할머니와 손자는 모두 수치심으로 수치심을 극복해 나간다.
이미영의 <자장가 가수>
여성은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어머니라는 존재성을 지키려 한다. 딸로 태어난 여성이 모두 아내나 할머니가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모성이라는 타자성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자신의 욕망을 자식과 남편의 그것에 투사시키기 위하여 그들은 양육과 노동의 주체자 역할을 기꺼이 감수한다. 이것은 남성이 지닐 수 없는 타자성으로서 여성에게는 행동의 동력으로 작용한다.
이미영은 여성적 타자를 “자장가”라는 모티프로 풀어내고 있다. “자장가”는 여성의 생산성을 확인하는 언어이다. 그것은 아기를 타자화한다는 점에서 대표적인 여성 담론이며 <자장가 가수>의 화자도 어머니와 자식과 남편을 그 상대로 삼는다.
작가는 자장가를 부르는 엄마는 “어여쁜 엄마”라고 여긴다. 가사의 내용을 모르더라도 아이들이 엄마가 노래를 부르면 행복과 편안함을 느끼는 것은 그때의 엄마를 자상한 엄마로 믿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여성은 그 “어여쁜 엄마”가 되기를 원한다. 이미영의 자장가는 이러한 보편적인 기대와 거리가 있다. 이야기의 서두에서 작가는 “(어머니가 불러준) 자장가는 노동력이었다.”고 솔직하게 밝힌다. 그녀가 어렸을 때 들은 자장가는 짜증스러운 ‘억지 노래’였고 ‘한숨 섞인 노래’에 불과하였다. 어머니의 자장가를 기억할 때 기억하는 것이라고는 다섯 남매를 키웠던 어머니의 지친 삶뿐이다.
그렇다면 이미영이 두 아들에게 불러준 자장가는 어떤가. 그녀는 “나도 그랬다.”고 실토한다. 어여쁜 엄마답게 모차르트의 자장가를 불러주겠다고 다짐하였지만 아이들을 키우는 내내 마음이 불편하였다. 가장 행복한 시간은 “아기가 잘 때”이고 아이들을 깨울 때는 자명종과 모닝콜 벨을 사용하였다. 그것은 자신의 목소리가 아니었으므로 모성적 타자는 어색하고 겸연쩍었다. 윤리적 자아가 되기를 원하였지만 그곳에 갇힌 현실이 거북하기만 하였다. 독립된 자아가 모성적 타자에 억압당한 상황은 제주 민요 ‘웡이 자랑’에서 양육을 노동으로 풀이하는 데서 고스란히 노출된다.
<자장가 가수>의 모티프는 모성이다. 그녀가 자신을 드러내는 수단은 직업의식이나 전문지식이 아니라 어머니라는 얼굴이다. 자장가를 한숨 섞인 노동요로 간주하였으므로 그녀가 모성이라는 타자와 직면하면 자신도 모르게 주눅이 든다. 물론 절대적 희생을 다한 어머니일지라도 이런 자책감에서 벗어나기는 쉽지 않다. 모성은 여성이 물려받은 원죄이고 드러낼 수밖에 없는 타자인 것이다.
그러면 어찌해야 하는가. 모성의 새로운 대상을 찾을 필요가 있다. 그때 남편이 등장한다. 어른이 남편이 자장가를 불러줄 어린 자식들이 성장하였을 때 심리적 어머니로서 아내에게 자장가를 불러달라고 부탁한다. 남편이 아이처럼 머리를 가슴팍에 밀어 넣고 어리광(?)을 부리지 않더라도 마음으로는 남편을 자장가를 불러줄 대상으로 삼으려 했다. 어른 자식이 있다는 것이 여성에게 얼마나 다행인가.
그를 아주 천천히 살펴보았다. 아릿한 뜨거움이 가슴에서 올라왔다. 빳빳하게 솟았던 어깨가 어느새 왈캉하게 내려앉았다. 검게 반질하던 머리칼이 희끗하게 탄력을 잃었다. 지친 내면이 푸석한 몸으로 드러나 안쓰럽게 다가왔다. 갑자기 조금 전까지 내가 알았던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패기만만했던 굳센 턱선이 멋진 그였다. 언제 앓았는지 나긋한 모양으로 변신해 있는 것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좀처럼 바깥일을 내색하지 않던 그가 투덜거리는 소리를 시작했을 때 알아차렸더라면 좋았을 것을. 나도 위로가 필요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나 보다.
남편이 변하였다. 아내/어머니의 눈으로 바라본 남편의 풀죽은 모습이 다소 과장되었을지라도 “그 남자”가 달라졌다. 그녀가 “나는 완전히 승리했다.”고 착각하든 확신하든, 중요한 것은 모성이라는 타자를 재현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남편의 정신계를 다스리는 수단이 자장가다. 자장가는 남편의 몸을 잠재우고 정신을 일깨운다. 레비나스가 “타자와 관계한다는 것은 타자를 돕는 것”이라고 말한 타자에 무력한 남자가 포함된다. 이미영도 “제대로 자장가를 불러주고 싶다.”는 속내를 드러낸다. 남성에게 여성이 ‘생식자, 동반자, 파괴자’라는 세 이미지를 지니지만 남성에게 남성은 오직 적대적 타자일 따름이다. 따라서 남성에게 위안의 자장가를 불러줄 타자는 여성뿐이다. 남성에게 최초의 여성이 어머니이듯이 마지막 여성도 어머니다운 여성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성의 경우는 다르다. 여성은 딸, 자매, 애인, 아내라는 다양한 형태의 타자를 거치지만 종래는 어머니라는 타자로 되돌아온다. 젊어서는 자궁을 통하여 아이를 생산하지만, 폐경기 이후에는 출산이 불가능해진다. 그러므로 그녀의 아이를 낳도록 해준 남편을 자궁에 가두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다. 여성들은 이러한 욕망을 부인하지 않는다. 이미영도 ‘대문 밖 세상의 고달픔을 조금이라도 씻어줄 수 있다면 다시 목쉰 자장가 가수’가 되겠다고 다짐한다. 남편의 어머니가 됨으로써 그녀는 아이들에게 어여쁜 어머니가 되지 못했던 지난날의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렇더라도 모성은 그들을 불편하게 하고 죄스럽게 만드는 영원한 타자이다.
김명자의 <그 여자>
문학은 타자를 가시화하는 장르이다. 이면에 숨겨진 비논리적이고 억압적인 심리를 드러내다 보면 문학은 개인의 무의식까지 건드린다. 여성화자인 경우, 만일 여성에 대하여 여성적 타자를 자각하지 못했다면 복합심리는 어느 때인가 드러난다. 여성의 영원한 타자는 여성이라는 사실은 여성은 동성同性에 대하여 연민의식과 동시에 대립의식을 갖는다는 데서 재확인된다. 그 이유는 타 여성이 자신의 세계를 훔쳐간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여성에게 여성은 마네킹이 아니다. 마네킹이라면 단순히 사물 하나가 더 늘었다고 여길 수 있지만 사람이라면 정반대 현상이 나타난다. 낯선 타자를 의식하는 순간, 자신을 위해 있어야 한다고 믿었던 모든 것이 해체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빠져버린다. 심적 영토를 빼앗거나 침입당한 뺄셈 관계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김명자의 경우, “그 여자”가 그녀의 의식 안으로 침입해 들어온다. 아무리 노력하여도 그 여자에게 향한 시선을 뗄 수 없다. 외면하면 할수록 불편한 마음만 더 커진다. 그 여자의 목소리가 들리면, “거실로 나와 불을 켜고, 소파에 쪼그리고 앉아 귀를 모으고,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가까이 오면 불을 꺼 버리고, 문을 두드릴까 겁을 낸다.” 그럴 때마다 “그 여자로 인하여 속상하다.” 이런 악순환이 시시때때로 내적 동요를 일으킨다.
그 여자가 누구인가. 그녀는 김명자와 ‘성이 같고, 동일한 초등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다녔다. 결혼하고 한동안 같은 동네에 살았으며 김명자를 대신하여 소개팅 장소에 불쑥 나타나 소동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남편조차 그 여자 남편의 상담자가 되어버렸다. 그 여자가 정실질환을 일으킨 후에도 그들 사이의 인연은 끊어지지 않는다. 여기서 독자가 놓치지 않아야 할 점이 있다. 서술자로서 김명자가 그 여자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개인의 신상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그럼 무엇인가. 그 여자는 김명자의 분신이며 더 나아가 모든 여자의 대행자인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자아와 타자로 이루어진 샴쌍둥이로서 그들의 관계는 악연이 아니라 “우리의 인연”으로 묘사된다. 그들 두 사람은 남성이 아닌 여성이니까.
여성은 자의식이 강하다. 자신이 신데렐라인가, 메두사인가, 아니면 테스인가를 부단하게 규명하고 싶어 한다. 이러한 복합심리를 공유할 타자가 필요하다. 타자로서 그 여자는 김명자의 결점과 열등감을 해결해준다. 자신도 여자로서 불행하다는 연대의식을 지니는 한편 그 여자보다 덜 불행하다는 자기만족도 투시해낸다. 곧 모든 여자는 다른 모든 여자를 수치스럽게 만드는 타자이다. ‘여성은 불행하다’와 ‘나는 행복하다’는 감정의 모순을 해결하고 그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상대를 의식적으로 거부해야 한다. 기회를 엿보던 김명자도 그 여자의 거식증과 난폭성을 감당할 수 없게 되자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다. 뺏김이 중단되었는가. 아니다. 뜻하지 않은 문제가 생겼다. 타자를 거부함으로써 자아마저 함몰되어 버렸고 나아가 이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한 것이다.
지난봄 어느 날, 그녀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 절벽에서 떨어지는 기분, 굵은 끈이 ‘툭’ 끊어진 것 같은 아득한 절망감을 맛보았다. 내가 그녀를 떠나게 한 것 같은 죄책감에 “고생 많이 했다.”라는 말이 내겐 채찍질 같기만 했다. 내가 보듬지 못하고 밀어냈기 때문에, 좀 더 참아주지 못했기 때문에 그 여자가 세상을 등진 것 같았다. 잠깐만 피하려 했는데 영영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은 이형동체였다. 그 여자의 정신분열증과 자살이 김명자의 책임이 아닐지라도 ‘그 여자는 소꿉친구였’다. 인생의 친구였기에 앞서 서로에게 타자였다. 그런 만큼 “끈이 ‘툭’ 끊어진 것 같은 아득한 절망감”은 그리 놀라운 반응이 아니다. 실제 그 여자가 죽으면서 작가는 우울증과 강박관념을 물려받는다. 자신의 반쪽이 사라졌다는 절망감, 간접 살인을 저질렀다는 죄책감, 친구들의 칭찬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양심은 이러한 타자화가 설명해주지 않으면 달리 해결할 방법이 없다.
그 여자는 김명자의 얼굴이고 음성이다. 타자는 자아에게 관계하여야 한다는 몸짓을 쉬지 않고 던졌지만 자아인 김명자는 상대를 성가시고 두렵게만 여겼다. 그러나 작가가 진정 두려워한 것은 그 여자의 거친 목소리나 무단출입이 아니라 인간은 혼자이며 세상은 무심하다는 단절감이었다. 무엇보다 여자라는 사실이 가장 두려웠다. 이처럼 여성은 서로에 대하여 억압심리와 두려움을 갖고 있다고 하겠다.
결미를 살펴보자. 김명자는 “가만히 그 여자 이름을 불러본다.”고 말한다. 남에게 들리지 않을 목소리로 무엇을 불렀을까. 그것은 그들만의 비밀이 있다는 뜻이다. 숨죽여 부른 것이 상대의 이름일지라도 내포된 명칭은 ‘여자’라는 명사이다. <그 여자>에 등장하는 “그 여자”는 3인칭 단수형이 아니라 “우리 여자들은”이라는 1인칭 복수형이다.
덧붙여
문학은 아무려나 자아만을 드러내는 글쓰기다. 수필은 더더욱 의식적으로 멀리하고 싶은 타자를 끌어내어 반성적으로 드러내는 고백이다. 사물을 대상으로 하든 주변인을 소재로 하든, 타자를 진솔하게 드러낼 때만 수필은 굴절되지 않는다.
자아가 실존하려면 타자라는 존재는 불가피하다. 바라봄과 보여짐이 균형을 이룰 때 비로소 수필은 나르시스적이고 자아 반영적인 글쓰기를 따른다. 나르시스는 투영된 자신의 모습을 미화한 신화 속의 주인공만이 아니다. ‘봄’과 ‘보여짐’의 대상으로서 자신을 고통스럽게 응시한 첫 화자이다. 그는 타자를 응시함으로써 자아에서 벗어나고, 타자를 사랑함으로써 자신을 해체할 수 있었다. 타자의 발견은 자아의 ‘훔침’을 허용해주었다.
수필은 헤겔이 말한 “영혼이 내비치는 창”이어야 한다. 그러기 위하여 수필가는 타자로서 자아를 지켜보는 시선을 지켜낼 필요가 있다. 나를 대상화하는 불침번 같은 수필적 타자가 존재해야 하는 것이다.
박양근 ----------------------------------------
부경대 영문과 교수. 문학평론가, 수필가, 칼럼니스트, 영남수필학회장., 수필집: ≪길을 줍다≫, ≪서 있는 자≫, ≪문자도≫ 등., 저서: ≪사이버리즘과 수필미학≫, ≪좋은 수필 창작론≫, ≪미국수필 200년≫ 등., 수상: 신곡문학대상, 구름카페문학상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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