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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과 비평 2012년 1월호, 신곡문학상 대표작] 왕대밭에 왕대 나고 외 2편 - 조병렬

신아미디어 2012. 2. 20. 08:46

왕대밭에 왕대 나고

 


   담양 대나무 골 테마공원이 한눈에 들어온다. 넓은 산자락을 따라 소
나무가 병풍처럼 둘러선 가운데, 일만여 평의 대숲이 하늘을 가리고 있
다. 산마루에는 구름과 안개가 뒤섞여 노닐고, 이따금 햇살이 대나무
이파리에 반사되어 지나는 길손을 유혹한다. 대나무 숲은 어느 뜻있는
분의 30여 년에 걸친 노력으로 조성되었다고 하니, 그분의 깊은 뜻을
헤아릴 길 없으나 숱한 나그네의 발길을 붙잡는 마력만으로도 감탄을
자아내지 않을 수 없다.
   울창한 대나무 숲길 사이로 조성된 죽림욕 산책로. 왕죽을 비롯한 여러
종류의 대나무에서 청량한 대숲 바람이 인다. 산책로에 들어서면 댓잎
향이 촉촉이 젖은 흙냄새와 어우러져 온몸에 맑고 시원하게 스며든다.
   예로부터 선승이 수도하는 도량 주변에는 대숲이 많았다. 겨울철의
외풍을 막을 수 있고 대나무의 맑은 정신도 본받고자 했을 것이다. 하지
만 무엇보다 대숲이 사랑받는 이유는 바람소리 때문이다. 바람이 불 때
마다 ‘사악사악’ 댓잎이 부딪치는 소리에 조용히 눈을 감고 귀를 기울이
면 그 소리에 자기도 모르게 빠져들어 온갖 망상과 번뇌를 잊을 수 있다
고 하니, 대숲이야말로 오욕칠정의 인간과 이웃해야 할 소중한 마음의
벗이 아닐는지.
   울창한 대숲에 압도당하면서도 그 고결한 분위기에 동화되려고 천천
히 비탈길을 오른다. 산 중턱에는 잘 가꾸어진 넓은 잔디 광장을 사이에
두고 왼쪽에는 아담한 찻집이 있고, 오른쪽에는 대나무를 잘라 만든 평
상 두 개가 가지런히 놓여 있다. 나는 평상에 올라 마치 좌선하는 도인처
럼 가부좌하고 허리를 곧게 편 채 명상에 잠긴다.
   바람 한 점 없는 고요 속으로 빠져들어 간다. 물소리, 새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대나무 잎이 부딪치는 소리도 없다. 어느덧 무념무상의 세계로
빠져드는 기분이다. 누더기 걸치고 죽장망혜에 죽립을 눌러쓰고 한적한
산길을 거니는 도인 같은 풍모의 나를 상상해 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일 뿐 현실에서 한 발자국도 떠나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하며 다시 대숲
으로 눈길을 돌린다.
   굵게 자란 왕대밭이 눈앞에 가득하다. 새로 돋는 죽순마저도 왕대로
태어나는 곳. 그래서 왕대밭에 왕대 나고 졸대밭에 졸대 난다고 했던가.
부피 자람은 하지 않고 길이 자람만 하는 대나무의 속성. 일행 중 누군가
대나무는 봉건사회의 엄격한 신분제도와 다를 바 없다며 만인 평등에
어긋나는 비민주적인 나무라고 말한다. 모든 인간이 평등하게 태어난다
는 말은 잘못된 말인가? 그러나 겉보기에는 초라한 졸대의 모습을 상상
하며, 선비는 얼어 죽어도 겻불은 쬐지 않는다는 꼬장꼬장한 자존심을
무엇보다 소중하게 여겼던 옛날 베잠방이 선비들을 떠올려 본다.
   대나무는 순수 혈통을 중시하는 고귀한 정신을 가졌다. 다른 나무들
처럼 무더기로 꽃을 피우고 씨받이를 하여 종족을 번식시키려는 과욕을
부리지 않는다. 뿌리로만 번식하고 자신의 형편에 맞게 수를 늘린다.
땅 기운이 충분하지 않으면 죽순이 태어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만약
지나치게 많이 번식하여 지력이 다하면 그 대밭의 대나무들은 모두 죽
어 버린다. 이처럼 평생 꽃을 피울 줄 모르고 살던 대나무는 생의 종말에
가서야 오직 한 번 꽃을 피우고 말라 죽는다. 결실의 기약도 없이 혼신의
힘을 다하여 꽃을 피우는 대나무의 삶은 비장감마저 든다.
   대나무는 왜 속이 텅 비어 있을까? 나는 그 빈속을 좋아한다. 내가
누군가의 마음을 받아 주려면 내 마음은 비어 있어야 한다. 내 마음이
욕망으로 가득 차고서는 다른 사람의 진실한 마음도 사랑도 담을 자리
가 없다. 오늘날 사회에서 속 빈 사람이라고 하면 모욕적일 수 있지만,
나는 더러 속 빈 사람이 되고 싶다. 대나무의 빈속과 곧고 단단한 줄기는
가진 것 없지만 굽힘이 없고 남을 원망하지 않는 선비적 표상이다. 또한
그 빈속은 무한한 포용력을 갖춘 여유의 공간이지만, 함부로 불의와 부
정이 범접하지 못하는 기개와 절조의 고결한 공간이다. 그래서 예로부
터 대나무를 군자의 나무로 칭송하지 않았던가.
   굵고 싱싱하게 하늘로 치솟고 있는 혈기왕성한 왕대밭 죽순의 모습이
선명하게 내 눈에 들어온다. 껍질을 뒤집어쓰고 나온 죽순은 자라면서
허물을 벗기 시작한다. 한참 바라보고 있는데 껍질 하나가 땅으로 툭
떨어진다. 허물 한 겹 벗어 던지니 매끈하고 잘생긴 줄기가 나타난다.
대나무나 사람이나 허물을 벗어야 본질이 드러나고 새로운 모습으로 발
돋움하는 모양이다.
   저 죽순은 한 겹씩 껍질을 벗어던지면서 제 본래의 모습을 부끄럼 없
이 드러내고, 마디마디를 길게 늘이면서 여유롭게 속을 비워가고 있는
데, 내 삶은 너무나 많은 것으로 채워져 있는 것은 아닐까? 모태의 첫
허물을 벗을 때의 순수를 그리워하면서 현재의 모습을 반추해 본다. 내
나이테에 비례하여 자꾸 늘어만 가는 부끄러운 나의 껍질들. 저 죽순은
벌써 허물을 다 벗어 가는데…….
나는 그만 조용히 눈을 감는다.

 



수필 쓰기는 취미인가?

   취미와 특기의 거리는 얼마나 될까? 취미가 전문적으로 하는 것이 아
니라 즐기고자 하는 것이라면, 특기는 남이 가지지 못한 특별한 기능이
나 기술이다. 취미와 특기를 아마추어와 프로의 관계로 유추할 수 있다.
프로 복싱 선수와 프로 기사棋士는 취미 생활을 넘어 생업을 위해서 특별
한 능력을 발휘해야 하는 전문인이다.
   수필가는 어떠한가? 등단 이전의 예비 작가가 취미 생활을 즐기는 아
마추어 작가라면 등단 이후의 수필가는 특기를 공인받은 프로 작가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수필가는 어찌하여 프로 작가의 정신이 부족하며,
영원히 취미 생활을 즐기는 아마추어 작가로만 인식될까? 프로 복싱 선
수는 링 위에서 머리 보호대를 착용할 수 없고, 어떤 위기에도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어야만 프로 선수로서의 자격을 갖춘
사람이 된다.
   수필가도 마찬가지다. 수필가가 진정한 프로의 자격에 미달한다면 아
마와 프로를 구분짓는 경계선이 잘못되었거나 프로로 입문하고 나서 훈
련을 게을리한 탓일 것이다. 수필가는 수필가로서의 능력을 지녀야 하
고 더 좋은 작품을 쓰려고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수필가로서의 프로
정신이 아쉬운 시대이다.
   나도 문학성이 뛰어난 수필을 쓰고 싶다. 수필이 마땅히 문학이고 예
술이라면 감동과 즐거움을 줄 수 있는 미의 창작과 표현이라는 특성이
있어야 한다. 그런 수필을 쓰려고 좋은 글감이나 다양한 표현 기법을
찾고자 노력한다. 좋은 글감을 찾기도 쉽지 않지만, 문학적으로 형상화
하는 일 또한 쉽지 않다. 그러나 글감이 없어 글을 못 쓴다는 것은 옳지
않다. 특별한 글감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대상에 대한 예리한 통찰과
작가의 독특한 안목만 있다면 무엇이든 문학적 제재로서의 가치가 있
다. 문제는 그 글감을 통하여 미적 감동을 줄 수 있고 삶의 의미와 가치
를 창조할 수 있는 문학적 형상화 작업이 필요하다. 같은 재료로써 다양
한 음식과 색다른 맛을 낼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문학적 형상화의
방법에 따라 문학성의 수준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특별한 체험이나 유별난 사건이 항상 내 앞에 펼쳐질 수는 없다. 살아
온 과정이 너무 순탄하고 밋밋하므로 글감이 없어서 글을 쓰지 못한다
고 말하기도 한다. 이해는 되지만 수긍할 수는 없는 말이다. 작가가 새로
움을 창조하는 사람이라면 사소한 무엇이든 작품화할 수 있어야 한다.
   작가에게 체험은 소중한 자산이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새로운 체험을
찾아 나서기도 한다. 또한, 어느 순간에 떠오른 착상도 놓치지 말고 포착
해야 한다. 나는 가끔 학생들과 수업을 하다가 교재 중에서 갑자기 글감
이 떠올라 교재의 여백에다가 메모한 때도 있었고, 체육관에서 러닝머
신 위를 달리다가 내려와 메모하기도 했다. 하물며 잠자리에 누웠다가
갑작스럽게 떠오른 착상을 놓치지 않으려고 다시 일어나 작품을 써본
경험도 있다. 참으로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계획적인 글쓰기는 중요하고 즉흥적인 글쓰기는 매력적이다. 한 편의
작품을 쓰려면 글의 설계도라고 할 수 있는 글의 개요를 치밀하게 작성
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글의 통일성과 일관성을 이룰 수 있고 문학성
을 최대한 살릴 수 있다. 그러나 때로는 갑자기 착상이 떠오르면 자동기
술법처럼 한 편의 글을 단숨에 써내려간 경우가 있었다. 이때의 쾌감은
정신적인 카타르시스는 물론이고 글 쓰는 사람만이 맛볼 수 있는 문학
적 오르가슴이다. 이렇게 쓴 글을 뒤에 읽어 보면 자신이 쓴 글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만족스러운 표현을 발견하고는 스스로 나르시시즘
에 빠져들어 무한한 행복에 젖기도 하는 것이다. 나는 이런 매력 때문에
글쓰기를 더욱 좋아한다. 나는 전자보다는 후자의 경우를 더욱 좋아하
고 바라는 바이지만 결코 흔한 경험이 아니었다.
   나는 하루 이틀 만에 작품을 완성할 수 있는 능력도 없거니와 그렇게
급조하는 글쓰기는 근본적으로 부정한다. 이미 써 둔 작품이 없으면 원
고 청탁이 들어오더라도 사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글 빚에 쪼들려 살
아가는 삶의 행태도 바람직하지 않을 뿐더러 그렇게 해서 생산된 글이
감동적인 작품이 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누구의 말처럼 암탉의
뱃속에서 생기다가 만 달걀을 억지로 끄집어낼 수는 없는 법이 아닌가.
   나는 바둑을 좋아한다. 흔히 한 판의 바둑을 가리켜 인생살이로 비유
하기도 한다. 속기 바둑을 즐기는 사람들도 많지만 나는 그 반대다. 여러
수 앞을 내다보며 한 점씩 두어갈 때 바둑의 진정한 재미를 느낄 수 있듯
이, 수필도 글감에 대한 깊은 사색과 오랜 숙성의 과정을 거쳐야만 감동
이 배어 나오는 좋은 작품이 만들어진다고 생각한다. 수필 쓰기가 삶의
표현이라면 삶이 고귀하고 진지해야 하듯이 수필 또한 그러해야 한다.
   나는 퇴고를 철저하게 하는 편이다. 초고를 완성한 뒤에도 오랜 시간
을 두고 다듬어 나간다. 글을 써서 남에게 읽히고자 한다면 정확한 어휘
와 올바른 문장을 구사하는 것은 기본이다. 문학적 천재성이나 뛰어난
감각을 자랑하기 전에 정확한 우리말, 우리글을 알고 표현해야 한다.
시의 경우, ‘시적 허용(poetic license)’이라 하여, 시인이 의도적으로 예술
적 효과 및 자신의 느낌이나 정서 등을 표현하고자 일반적인 문법 규칙
에는 맞지 않은 표현을 허용한다. 그러나 시를 읽다 보면 도저히 시인의
의도적인 표현으로는 볼 수 없는 비문법적인 오류를 많이 발견하게 된
다. 그래도 시에서는 꿈보다 해몽을 좋게 하여 받아들여지고 용서받을
수 있으나, 수필에서는 이것마저도 허용될 수 없으므로 여러 면에서 수
필가는 시인보다 더 유식해야 할는지 모른다.
   수필은 인생길이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수필 같은 삶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더러 한다. 언제까지나 시적인 낭만을 그리며 살아갈 수도 없고,
소설처럼 복잡한 인생을 살 필요도 없지 않은가. 나를 되돌아보고 표현
하며 인생을 생각하고, 만휘군상과 대화하며 우주의 오묘한 진리도 엿
볼 수 있는 것이 수필이다.
   나는 수필을 쓰고 있으면 행복하다.

 


죽음 체험

   유언장을 쓴다. 이 순간에 와서 무슨 할 말이 필요할까마는 마지막
인생을 마무리하지 않을 수도 없다. 잘한 일이면 뭐할 것이며, 잘못한
일이면 어찌할 것인가. 용서니 후회니 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더군다
나 모든 것을 남겨둔 채 먼저 떠난다고 야단법석을 떨 필요도 없다. 영원
히 지울 수 없는 인생의 방점 앞에서 조용히 가는 것이 그나마 아름다운
모습일 테니까.
   장송곡이 은은히 울려온다. 나는 관이 있는 곳으로 걸어간다. 관으로
들어가 반듯이 눕는다. 내 몸에 꼭 맞는 공간이다. 잠시 편안하다 싶더니
바로 싸늘한 느낌이다. 뚜껑이 덮인다. 캄캄하다. 답답하다. 조용하다.
갑자기 쾅쾅 못 박는 망치질 소리가 들린다. 왼쪽, 오른쪽 빈틈없이 박는
다. 공포의 소리도 잠시일 뿐 다시 정적에 잠긴다.
   도돌이표 악보처럼 내 인생 역정이 다시 펼쳐져 보인다. 복잡한 인생
이다. 적게 산 것도 아니다. 이렇게 많은 일이 있었는데도 잘도 잊고
살았다. 실타래처럼 얽힌 채 풀지 못한 것들도 수월찮게 많다. 만약 십
년만 더 살 수 있다면, 아니 일 년만이라도……. 가당찮은 욕심이다. 이
렇게 끝까지 미련과 집착을 못 버리는 것이 어쩔 수 없는 내 모습인가.
   삶과 죽음. 이 문제를 나는 얼마나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을까? 죽음의
공포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한때의 아픈 기억이 나에게도 있다. 그래
서 스스로 죽음의 문제에 대해서는 아예 외면하고 싶었을지 모르겠다.
오로지 삶의 존재 그 자체만을 절대적인 것으로 인식하고자 했을 것도
같다. 얼마나 단순한 삶이었던가. 어쩌면 그렇게 살고자 한 것이 바로
나의 삶의 방식이었고 인생관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한다. 대다수는 죽음 그 자체를 잊고 살아간다.
그것이 어쩌면 행복한 삶일 수도 있다. 그러나 죽음을 모르는 사람이
어찌 삶의 의미를 알겠는가. 죽음을 인식하는 자만이 삶의 참된 의미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겨우살이 준비는 하면서도 죽음은 준비하
지 않는다고 톨스토이는 설파하지 않았던가.
   이 세상에 죽음만큼 확실한 것은 없다. 한 번 태어나서 한 번 죽는
것이 인생이다. 죽음은 인간의 자연적인 현상이며, 인생은 죽음을 전제
로 한 삶이다. 삶의 일회성은 삶의 허무를 말하거나 삶의 포기를 종용하
는 것이 아니라, 삶이 단 한 번뿐이기에 그 중요성은 더욱 큰 것이며,
아름다운 죽음을 희망할 수 있게 됨을 의미한다.
   관의 뚜껑이 스르르 열린다. 조용히 눈을 떠 보았다. 희미한 불빛이
보인다. 내가 다시 살아난 것인가? 일어나 관에서 나왔다. 그런데 다시
살았다는 벅찬 감격이 밀려오지 않는 것은 왜일까. 단순히 연습이기 때
문만은 아닌 성싶다. 어쩌면 삶과 죽음, 이승과 저승의 접점에서 심오한
인생의 의미를 조금이나마 느끼면서, 새로이 맞게 될 삶에 대한 부족한
자신감이나 두려움이 나를 짓누르고 있기 때문이 아닐는지 모를 일이다.
   굳게 닫힌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분명한 이승이다. 문 열고 한
발자국만 나고 들면 이승이고 저승인데,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온갖
망상과 집착에 빠져 앞으로만 위로만 바라보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 인
생이 아닐는지. 이런 생각을 해보지만, 부딪쳐오는 현실 앞에서 한 발자
국도 벗어날 수 없는 것이 또 다른 내가 아닌가.
   온 천지가 환하게 밝다. 온갖 물상이 다시 내 눈에 들어온다. 짙푸른
여름 산이 싱싱하게 살아 숨쉬며 생명의 무한가치를 일깨워 주는 듯하
고, 저 산 너머 푸른 하늘에는 삶과 죽음의 문제와는 아랑곳없이 한 무더
기의 흰 구름이 한가롭다.
   5층 창가에서 내려다보니, 충청북도 ‘음성꽃동네’의 아름다운 정경이
눈앞에 펼쳐져 보인다. 의지할 곳이 없는 이천여 명을 사랑으로 보살피
는 요양원과 사랑의 실천을 학습하는 연수원이다. 이곳 꽃동네가 꿈꾸
는 세상은 한 사람도 버려지는 사람이 없는 세상이다. 행복이란 만족한
삶이고, 진정한 사랑은 베푸는 것이라고 가르치는 곳이다.
   배고픔과 아픔을 느낄 수 있는 것만으로도 무한히 행복할 수 있다는,
그런 사소한 진리를 알지 못하고 살아온 나는 행복과 감사에 무디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내가 받은 은총을 헛된 욕심에만 쏟아 부은 것
같아 가슴이 서늘해져 온다. 이곳의 가엾은 이들을 바라보면서 느끼는
상대적 행복감을 얼마나 오래도록 잊지 않을는지.
   “얻어먹을 수 있는 힘만 있어도 그것은 주님의 은총입니다.”라는 돌탑
의 글씨가 더욱 크게 부각되어 내 마음에 다시 새겨진다.
   내 뒤를 이어 죽음을 체험하고자 널 앞에 줄지어 서 있는 나의 제자들.
저들은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생각할까? 나는 저 아이들이 마냥 행복하
기만을 바랄 뿐인데, 저 순수한 학생들에게 죽음의 의미를 인식하게 하
는 것이 과연 적절한지 모를 일이다. 몇 번째 해보는 관 체험이지만 오늘
의 내 느낌이 전과 같지 않으니 무슨 까닭일까.
   조금 전에 작성한 나의 유언장이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린다.

 

조병렬 ---------------------------------------------------------

경북 경산 출생. ≪수필과비평≫ 신인상 등단.
대구문인협회 수필분과 위원장, 수필문예회 회장, 수필과비평작가회의 부회장.
대구수필가협회 이사, 영남수필문학회 회원.
제1회 대구시민문예대전 산문부 최우수상 수상.
저서: 수필집 ≪왕대밭에 왕대 나고≫, ≪한국 현대시의 이해≫(공저),

≪한국 현대소설의 이해≫(공저).
영남일보 ≪고교 독서논술 특강≫(공저) 기획 출제위원.
대구수필문예대학 교수, 솔빛수필창작반 강사 및 솔빛수필문학회 지도고문.
대구 경신고등학교 국어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