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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과비평 2012년 1월호, 작품론] '직선의 삶'에서 '곡선의 삶'으로-이은희론 - 신재기

신아미디어 2012. 2. 21. 08:27


직선의 삶’에서 ‘곡선의 삶’으로  - 이은희론

1. ‘몸시’로서 글쓰기
   수필가로서 이은희의 이력은 그 누구보다도 화려하다. 2004년 제7회
‘동서 커피 문학상’에서 작품 <검댕이>로 대상을 받고 같은 해 ≪월간문
학≫으로 등단한다. 공식적인 등단 이전에도 각종 수필 공모에 수상한
경력이 있다. 이는 그의 화려한 등장이 우연함이 아님을 말해 준다. 작품
곳곳에서 드러나는 등단 후 그의 문학 활동과 사회 활동으로 짐작해보건
대, 그는 엄청난 열정의 작가임을 알 수 있다. 그는 지금까지 ≪검댕이≫
(2005), ≪망새≫(2007), ≪버선코≫(2009), ≪생각이 돌다≫(2011) 등 모
두 네 권의 수필집을 발간했다. 2년에 한 권씩 수필집을 발간했으니 한
달에 두 편 이상의 작품을 창작해온 셈이다. 이 점만 놓고 보더라도 그는
대단한 필력의 작가임이 틀림없다. 그냥 다작했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런데 작품 창작에 드러난 이은희 수필가의 놀라운 집중력은 어디에
서 오는 것인가? 문학에 대한 순수한 열정, 자기를 표현하고자 하는 욕
망, 글쓰기의 생활화, 수필에 대한 사랑 등 무엇으로도 규정하기 어려운
그만의 고유한 ‘힘’이 강렬하게 작용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세속적이든
이상적이든 간에 그것이 그의 실존과 맞물려 있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다시 말해, 작가 이은희에게 있어 수필 쓰기는 실제의 삶과 분리될 수
없는 일이었던 것 같다. 수필은 그의 생활 한가운데 용해되어 있다. 그의
수필 쓰기에서 드러나는 활력은 그의 생활 자체의 활력과 다르지 않다.
그는 그만큼 치열하게 생활하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수필가 이은희
의 필력은 바로 실제 생활과 수필이 하나로 융화된 상태에서 폭발하는
그만의 고유한 에너지이다.
   예술과 생활의 일치를 이루기란 쉽지 않다. 사회가 복잡해지고 과학
이 발달함에 따라 예술적 실천과 생활 실천은 서로 분리되어 거리를 드
러낸다. 근대 이후로 올수록 양자의 거리는 더욱 멀어져, 현실 모방을
표방하는 리얼리즘에서조차 예술은 현실을 거울에 비추어 보는 ‘반영’
수준에 머무른다. 예술이 삶으로부터 이탈된 이상적인 세계, 만들어진
허구의 세계, 현실 추상으로서 의미의 세계를 추구하게 되면서 예술은
생활과 분리된 가공의 조형미를 극대화하고 삶의 생생한 현실을 소외시
키고 말았다. 이제 예술은 실제 생활과 분리된 제도와 추상적인 개념
위에 놓이게 되었다. 이 시대에도 더러 예술과 생활이 일치된 치열한
예술적 삶을 실천하는 예술가가 있다. 우리가 이런 사람을 만날 때 크게
감동하는 이유는 생활의 활력이 그대로 전이된 예술 세계를 접할 수 있
기 때문이다.
   수필은 작가의 생활을 충실히 담아내는 형식이다. 물론 모든 문학이
인간의 삶과 생활을 반영한다. 하지만 수필만큼 그것을 직접적으로 말
하지 않는다. 작가의 현실 생활을 직접적으로 기록하고 진술하는 것이
수필 본래의 존재 방식이기 때문이다. 작가의 생활 실천이 잘 용해된
작품이 수필 본래 모습이라는 말이다. 이런 점에서 좋은 수필은 미학적
장치를 통해 현실을 가공하기보다는 있는 그대로를 생생하게 드러내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은희 수필이 이룩한 성과도 이런 측면에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문학은 그만큼 생활 실천에 밀착되어 있다
는 뜻이다.
   이은희의 문학과 생활이 밀착되어 있다는 점은 그의 작품이 작가의
세세한 일상을 충실하게 담아낸다거나, 그의 모든 생활이 수필 쓰기에
받쳐지고 있다는 뜻이 아니다. 그는 일찍부터 직장생활을 시작하여 지
금은 회사 임원으로 일하고 있고, 또 한 가정의 주부이다. 아무리 치열한
작가로서의 길을 걷는다고 해서 수필 쓰기가 생활보다 더 앞에 놓일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이은희 문학의 고유한 활력으로서 문학과 생활
의 일치란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바로 작가가 말하는 ‘몸시詩’이다.
작가는 남은 생애 동안 “더도 덜도 말고 생활 그 자체가 수필이라 여기
며 몸시를 쓰련다.”(≪버선코≫, 234쪽)라고 소망한다. ‘몸시를 쓰는 일’
은 수필가 이은희가 지금까지 실천해 오고 앞으로도 실천하려고 하는
창작정신의 기본이며, 삶의 핵심 가치다.
   이은희의 ‘몸시 쓰기’의 의미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 보자. 작가는 산
행 중에 고사목을 만난다. 그 고목은 “평생 난쟁이로 키운 몸피가 한
아름이나 될까. 그 흔한 푸른 바늘잎 한 잎도 없다. 몸채가 미끈하게
뻗은 나무도 아니다. 꽤 오랜 세월이 흐른 듯 허옇게 메말라 길목을 지키
고 있을 뿐이다.” 작가는 “온몸으로 자신의 생을 보여주는 고목”을 두고
“몸으로 시를 쓰는 나무”(<몸시>에서)라고 한다. 이은희 수필 창작의 기
본 정신이면서 방법인 ‘몸시 쓰기’는 “외양이 화려하거나 미끈한 시”가
아니라, “울퉁불퉁하지만, 앞품이 넉넉한 나무”와 같이 자신의 모습을
고스란히 드러내 보이는, 즉 온몸으로의 글쓰기이다. 이는 머리와 기교
에 의해 제작되는 글쓰기가 아니다. 또한, 어떤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의도적인 기획으로서의 글쓰기도 아니다. 몸과 생활에 우러나오는 무위
적이고 자동사적인 글쓰기이다. 이러한 ‘몸시’로서의 글쓰기에서 문학과
생활은 하나일 수밖에 없다.


2. ‘곡선의 삶’을 위하여
   작가의 자의식이 가장 잘 드러나는 문학이 수필이다. 수필은 수필가
자신의 존재와 삶에 대한 내면적 성찰의 공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외부 세계의 대상조차도 작가의 내면으로 끌어들여 자의식의 그물망을
덮어씌우는 것이 수필 쓰기다. 그런데 작가에 따라 수필 창작에 작동되
는 이러한 내면적 성찰로서 자의식의 모습은 다양하다. 자의식을 표출
하는 수준이 미숙하여 평면적인 윤리 감각을 뛰어넘지 못하는 때도 잦
다. 이런 때 수필가의 자의식은 작품 창작과 함께 소멸하기 때문에 연속
성을 획득하지 못한다. 그러나 작가의 자의식이 자신의 존재와 세계에
대한 깊은 성찰에서 작동하여 연속성을 띠게 되면, 그것은 창작 토대로
서 자리 잡을 수 있다. 더욱이 그것이 작가의 이념 내지는 세계관으로서
일관성을 보일 때는 한 작가의 작품 세계를 구축하는 중심 기둥 역할을
한다. 수필 한 편이 일상의 조각들을 이야기하지만, 그러한 낱낱의 작품
이 하나의 세계관으로 수렴할 때 비로소 수필가는 자기 세계를 확보했
다고 볼 수 있다.
   많은 수필 전문지가 이은희를 이 시대에 주목할 만한 작가로 선정하
고, 여러 평론가가 그의 작품에 관심을 보이는 이유도 그가 한 작가로서
고유한 수필 세계를 구축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수필 세계를
떠받치는 작가정신의 요체는 무엇인가? 한마디로 ‘곡선의 삶’으로 요약
할 수 있다. 이는 ‘직선의 삶’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한다. 주위를 돌아볼
겨를도 없이 앞만 보고 질주하는 것이 ‘직선의 삶’이다. 이는 제어되지
않는 욕망의 노예로서 살아가는 이기적인 허욕의 삶이다. 욕망의 바벨
탑을 쌓는 데 급급하여 주위 사람이나 존재를 전혀 인식할 수 없는 ‘닫힌
삶’이다. 그것은 창살 없는 감옥과 다름없다. 작가는 어느 순간 일상의
틈새를 통해 자신을 되돌아본다. 마침내 부질없는 욕망에 갇힌 초라하
고 지친 자아를 발견하고, 새로운 삶의 방향을 모색한다.


모든 부분을 고속질주로 이루어낸 어느 날, 원인 모를 병에 걸린 듯
가슴 아파했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건만 이유 없이 허전하며, 신열을
앓듯 갈피를 잡지 못하였다. 내가 원하던 삶이 이런 것이었던가. 물질만
능 위주의 사회에 물든 내 모습, 순수감성이라곤 손톱만큼도 없는 사람
으로 변해 있었다. 문득, 내 순수영혼을 잃고 욕망만 높아진 삶이 부질
없는 짓이란 걸 알게 되었다. 가슴 깊은 곳에서 울리는 내면의 소리를
듣지 못했다. 화려한 불빛을 좇아 다니는 불나비 같았다. 노랗게 단풍이
든 느티나무 아래에서 까르르 웃던 열아홉 소녀의 그림자가 그립다. 계
절의 아름다움을 시로 읊던 나는 어디에 묻혀 있는 걸까. 사유의 창을
열어 묻고 되묻는다.                         -<검댕이>에서


   자신의 삶에 대한 처절한 회의와 반성이 잘 드러나고 있다. 작가는
욕망의 유혹을 좇아 질주해 온 자기 자신을 비판하고 각성한다. 이은희
는 고등학교 졸업 후 일찍부터 회사에서 근무한다. ‘회사’는 자본주의의
한복판이다. 자본을 축적하고 이윤을 남기기가 위한 무한경쟁 체제가
회사의 본질이다. 옆을 둘러보고 주위 존재에 대해 관심을 보이는 여유
를 용납하지 않는다. 자본주의 논리에 의하면, 오직 앞으로 질주하는
길밖에 없다. 따라서 ‘직선의 삶’을 극복하고 ‘곡선의 삶’을 회복하려는
그의 전환적 자세는 이성과 관념으로 배운 것이 아니라, 삶의 실제 경험
에서 체득한 것이다. 그래서 더욱 절실하고 호소력이 있다.
   작가 이은희는 ‘검댕이’로 불리는 사슴벌레가 석쇠로 막힌 집에서 탈
출하듯이 자신의 ‘순수영혼’을 갉아먹는 직선의 삶에서 벗어나고자 한
다. ‘검댕이’는 “등이 여기저기 갈라져 상처투성이”가 되도록 실패를 거
듭하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감옥 같은 자신의 집에서 탈출한다. 이 지점
에서 ‘검댕이’는 작가의 은유다. 작가는 새로운 곡선의 삶으로의 전환을
꿈꾼다. 작가가 이 지점에서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선택한 길이
바로 수필 쓰기, 곧 문학이다. 따라서 이은희의 수필 쓰기는 직선의 삶에
서 탈출하여 곡선의 삶으로 전화하는 지점에서 시작되어 그것을 실천해
가는 구체적인 노력의 여정이다. 그의 수필 쓰기가 대상을 관조하는 이
성과 관념으로서의 글쓰기가 아니라 삶의 실천으로서 몸의 글쓰기임을
다시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직선의 삶’이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 만연된 물신숭배라고 한다면, 이
를 극복하고 작가가 지향하고자 했던 ‘곡선의 삶’은 “문명에 익숙한 현대
인들이 볼품없다고 소외시켰던 오래된 것들”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다.
이은희의 수필 세계를 구성하는 하나의 기둥은 바로 ‘오래되고 사라져가
는 것에 대한 연가’이다.


옛것들이 고유명사화가 되어가는 지금, 일상을 벗어나 그것들과 교감
하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가정과 직장, 사회가 모두 직선의
질주와 변화만을 원한다. 그러나 난 버선코마냥 곡선의 숨 쉴 공간이
필요했었나 보다.        -<버선코>에서


   버선코의 부드러운 곡선에 대한 이야기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직선
의 질주와 변화에 빠져 곡선의 여유와 인간미를 놓치고 있다는 뜻이다.
이처럼 그의 대표작은 대부분 현대의 물질숭배에 의해 지워져 가는 것
들을 소재나 주제로 삼고 있다. <양푼예찬>, <동자석>, <망새>, <옹기>,
<맥놀이>, <돌다리>, <버선코>, <인절미>, <교두각시>, <토우> 등의 많
은 작품이 과거 전통적인 삶과 가치를 표상하는 것들에 관한 이야기다.
이러한 이야기는 문학의 테두리를 넘어 전통적인 문화유산의 새로운 가
치 발견이라는 문화적인 탐구 영역으로 확대되기까지 한다.
   이은희 수필이 주력해온 핵심 주제로서 ‘곡선의 삶’이 지니는 내재적
가치 발견은 그것과 대립하는 ‘직선의 삶’으로부터의 탈피와 등가적이
다. 그러므로 ‘직선의 삶’에 대한 비판과 부정을 통해서도 ‘곡선의 삶’을
강조할 수 있다. ‘직선’에 대한 비판이 선행되면 ‘곡선’은 저절로 강조되
기 때문이다. 이것이 문화 비판이 취하는 일반적인 형식이다. 문화 비판
의 형식에서 주체는 뒤로 숨기 때문에 비판 대상에서 자아는 제외되고
불특정 일반이 전면화된다. 즉, 수필가 자신의 내면적 성찰보다는 사회
일반에 대한 객관적인 비판의 양상을 띤다. 그 결과 논리적 진술이 주가
되고 문학적 형상화는 뒷전으로 밀린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이은희는
‘직선’에 대한 비판보다는 ‘곡선’의 강조와 발견에 무게를 두었다. 이성적
논리를 통한 사회적 비판이 아니라 정서적 감응을 통한 자아의 내면적
인 성찰로 나아갔기 때문에 ‘곡선의 삶’이란 주제가 독자한테 감동을 주
는 것 같다.


3. 표현 언어의 지시성과 투명한 문체
   ‘몸시로서 글쓰기’가 작가 이은희의 수필관이라고 한다면, ‘곡선의 삶’
은 그의 가치관인 동시에 문학 정신이다. 이 둘은 모두 ‘화려하고, 미끈
하고, 호화롭고, 요란한’ 외형보다는 내면의 진실성이 가치 있다는 의미
를 내포한다는 점에서 그 맥락이 같다. 인공적으로 꾸미기보다는 자연
그대로의 순수함이 더 소중하다는 뜻도 포함하고 있다. 창작방법 측면
에서 보면, 이는 외형을 보기 좋게 하려는 기교적인 가식을 거부하고,
있는 그대로를 솔직하게 보여주려는 순수한 태도를 말한다. 사물이나
사태의 현상 너머 내재하는 내면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는 심안과 혜안
을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작가의 이러한 관점과 문학 정신은
작품의 표현 측면에서 어떤 특징으로 드러나는가?
   첫째, 이은희의 수필 언어는 강한 지시성을 드러낸다. 이 점은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긍정적인 평가와 부정적인 평가가 모두 가능하
다. 그런데 언어 표현의 지시성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일반적으로 어떤
사물이나 사태를 언어로 표현했을 때, 표현의 모든 결과는 그 대상의
속성에 근거하고 있다고 믿는다. 언어 이전의 대상과 언어 이후의 표현
은 서로 교환 가능한 성질을 공유한다는 점을 의심하지 않는다는 말이
다. 물론 양자는 부분적으로 일치점을 공유하는 것이 사실이다. 이를
언어 표현의 지시성이라고 한다. 그러나 언어가 개입하여 표현 행위가
이루어지는 순간, 언어 이전의 사물과 사태는 언어에 의해 안개와 같은
착란에 빠지거나 본래의 모습이 변형되고 만다. 여기다가 언어를 운용
하는 주체의 개성적인 관점이 투사되기 때문에 언어 표현에 의한 대상
의 객관적인 재현은 실제로 불가능하다. 이러한 측면을 언어 표현의 형
상성 혹은 수사성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양식의 언어 표현이든 모두
지시성과 형상성을 동시에 지닌다. 문제는 어느 쪽이 더 강하게 드러나
느냐이다. 일반적으로 예술이나 문학의 언어적 표현은 형상성에 무게를
둔다. 예술과 문학이 추구하는 것은 인식적 관심과 윤리적 관심이 아닌,
심미적 관심이기 때문이다. 언어의 지시성이 의미 규정을 뜻한다면, 심
미적 관심을 가지는 예술과 문학은 ‘의미의 중단’ 내지는 ‘의미의 보류’에
토대를 두고 있다. 이는 현상학에서 말하는 ‘판단 유보’와 다르지 않다.
그런데 문학 속에 포함되지만, 수필의 언어 표현은 전적으로 형상성이
나 수사성에 기대지 않고, 상당 부분 언어의 지시성에 의존한다. 수필이
기본적으로 ‘교술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인데, 이는 반문학적이다. 수필
의 이러한 반문학적인 교술성은 수필의 본성을 제대로 펼친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그러나 수필의 문학성을 강조하는 견해에서 보면, 만족스
럽지 못한 부분이다. 이은희의 수필에서 드러나는 언어 표현의 지시성
은 화려한 외양보다는 내면의 진실을, 기교와 장식보다는 있는 그대로
의 순수함을, 겉으로 드러나는 형상보다는 내면의 본질을 지향하는 그
의 문학관이 보여준 당연한 결과라 할 수 있다. 그의 수필은 언어 표현의
형상성에서 유발하는 착란이 극소화됨으로써 의미 경계가 선명하여 독
자를 편하게 해 준다. 이는 독자의 공감을 확대하는 계기이기는 하지만,
한편으로 문학적 의미의 입체성 내지는 다성성이란 측면에서는 취약한
면을 드러낸다.
   둘째, 문체의 명료성을 꼽을 수 있다. 이은희 수필의 문체는 명료하고
투명하다. 그의 문장에는 거의 군더더기가 없다. 이 점도 마찬가지로
화려한 외양과 외형적 수사를 기피하는 그의 문학관에서 연유한다.


① 사람들이 지하철 입구로 꾸역꾸역 모여든다. 모두들 무표정한 얼
굴이다. 그들은 횡렬로 앞만 보고 달려간다. 뒤이어 사람들의 또닥거리
는 구두 굽 소리만 난무한다. 그들은 이정표를 따라 그저 달려가는가.
아니다. 익숙한 진리이기에 무의식적 행동이리라. 나도 그들 속에 휩쓸
려야 할 것만 같다.            -<틈새>에서


② 글쓰기도 살림도 나만의 고유 브랜드를 만들어야 한다. 처음에는
무작정 흉내 내기도 필요하리라. 궤도에 올랐다고 우쭐거리며 멈추면
아니 된다. 기본기에 나만의 기발한 창의력을 더하는 일이 남아 있다.
누구나 “그래, 이거야.”라며 무르팍을 탁 치는 글을 원한다. 그러기 위해
선 무진 애를 써야 하리라. 자기만의 독특한 시각과 주제를 가진 작품을
출산하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다. 내 삶의 고유 브랜드 만들기는 끊임없
이 진행 중이다.          -<무작정 따라잡기>에서


   ①은 장면 묘사다. 8개의 문장 모두가 단문이다. 수식어를 최대한 절
제하고 있다. 군더더기 하나 없는 깔끔한 간결체 문장이다. 무조건 간결
한 문장이 좋다고는 볼 수 없다. 짧은 문장 연결은 음악의 스타카토와
같은 단절음의 딱딱한 리듬으로 말미암아 경쾌함을 주지만, 지속적으로
반복하면 오히려 지루하게 느껴져 가독성을 떨어뜨린다. 그런데 위의
예문은 짧은 문장의 연속적인 반복에도 그 연결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
고 있다. 이는 모든 문장 말미의 서술어 형태가 전혀 반복되지 않는다.
8개의 문장 모두가 서술어의 어미가 각각이다. ‘얼굴이다’의 단정, ‘달려
가는가’의 의문, ‘행동이리라’의 추측, ‘아니다’의 서술어 단독 문장, ‘것만
같다’의 보조용언 사용 등 다양한 문말 처리에 의해 짧은 문장의 반복이
줄 수 있는 단조로움을 전혀 느낄 수 없다. ①이 주체 외부를 관찰한
묘사라고 한다면, ②는 작가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는 문장이다. 내면의
생각과 정서를 드러내는 일은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이럴 때 대부분
어휘나 문장의 의미 경계가 불분명해지기 쉽다. 심할 경우는 모호한 서
정을 난발하고 환상적인 분위기를 드러내기가 십상이다. 그런데 ②에서
는 화자의 생각이 분명하고 명쾌하게 드러난다. 이는 간결하고 투명한
문체에 기인한다. 물론 이와 같이 수사성 혹은 형상성이 소거된 문체
실행은 의미의 다성적 울림을 막아버릴 수 있다는 한계를 지닌다. 그러
나 문장의 모호함에서 유발하는 비의적인 다성성은 투명하고 명쾌한 의
미전달보다 우선될 수 없는 일이다. 이은희 문장은 간결하고 소박하지
만, 전혀 단조롭지 않다. 이렇게 잘 정제된 문장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
구두점 하나 사용에도 철저하다. 그런데도 겉으로 문장을 억지로 다듬
었다는 표시가 나지 않는다. 이는 그의 문장이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르렀
음을 말해 준다. 이 모두가 엄청난 노력과 훈련의 결과이겠지만, 외형의
화려한 수식을 거부하는 그의 문학적 진정성이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했
다고 하겠다.

4. 자기 스타일을 위한 변화
   확고하게 확립된 작가의 세계관이나 문학관은 창작 과정에서 하나의
뚜렷한 방법으로 작동되어 그만의 개성적인 스타일을 창출한다. 개성적
인 스타일은 한 작가의 문학 세계를 규정하는 핵심 요소다. 자신의 스타
일을 획득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일시적인 노력이나 순간적인 방법
을 적용하는 것으로는 불가능하다. 자신의 창작방법에 대해 부단히 자
의식을 발동시키고, 그것을 변화시키려는 시도가 뒷받침되어야 가능하
다. 그렇지 못하면 금방 개성적인 스타일은 사라지고 고정화된 패턴만
남는다. 일관성 있는 스타일을 확보한 일과 그것이 고정된 형식으로 남
지 않도록 변화를 시도하는 것은 서로 모순이 아니다. 스타일을 유지하
기 위해서는 변화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수필가 이은희는 네 권의 수필집을 발간하면서 자신만의 개성적인 스
타일을 확보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서 안으로는 조용한 자기 변화를
도모해 왔다. 특히, 세 번째 수필집 ≪버선코≫에서 삽화를, 네 번째 수
필집 ≪생각이 돌다≫에서는 사진을 넣고 있다. 삽화나 사진이 들어간
수필집은 이은희가 처음이 아니므로 이를 변화의 증거라고 하기에는 충
분하지 못할는지 모른다. 하지만 이은희 작가 개인에게는 커다란 변화
와 모험임이 틀림없다. 그런데 세 번째 수필집의 삽화는 문학이 지니는
문자성을 둔화하는 폐해가 없지 않다. 삽화가 작품의 내용 일부를 단순
히 시각화한 것에 불과하다. 작품을 보족하거나 의미의 다양성을 발원
시키려면 그 자체가 독립성을 지녀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하지만
네 번째 수필집에서 삽입된 사진은 작품의 의미를 지지하는 구원자로서
역할을 충분히 수행하고 있다. 이은희의 작품이 최근에 이를수록 구체
적인 공간성을 띠는데, 이러한 특성을 사진이 잘 살려주고 있다는 말이
다. 그가 일찍부터 우리의 문화유적과 유물을 소재로 하는 작품을 많이
창작하고 그 관심이 컸다는 점을 고려하면, 사진을 통한 구체적인 시각
화는 의미 있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사진 삽입은 미리
의도되었다 하더라도 처음 작품 발표 시에는 그것을 넣을 수 없는 처지
다. 그리고 사고와 상상력에 의존하는 문자로서의 표현과 시각적인 사
진으로서의 표현이 예술성이라는 점에서 얼마나 상승작용을 하는지 더
따져봐야 하겠지만, 이러한 시도는 새로운 장르 실천이 아닌 일반적인
수필 창작으로서는 큰 효과를 얻기 어려울 것 같다. 오히려 문자성이
유발하는 독자의 상상력이 사진으로 의해 제한될 가능성도 있다.
   이은희 수필이 해결해야 할 하나의 과제가 있다. ‘어머니’에서 발상되
는 이야기와 사유를 축소하는 것이 바로 그 과제다. ‘어머니에 대한 기억’
혹은 ‘어머니 부재’는 지금까지 그의 수필이 가장 자주 담아낸 화두이다.
그는 자기 스스로 ‘어머니’를 “글쓰기 모체”라고 한다. 어머니의 대한 그
리움을 드러내고 있는 작품은 그의 수필집 도처에 깔렸다. 작가는 어머
니에 대한 그리움에 관해 “그리움도 중독인가 보다. 아직도 난 누구를
못 말릴 그리움을 앓고 있다. 아니 평생 지병인지도 모른다.”(<굴레를
벗어난 검댕이처럼>에서)라고 한다. 평생 버릴 수 없을 만큼 병적인 수
준이라고 고백한다.


난 지금 어머니의 삶을 살고 있다. 아니 어머니의 삶과는 견줄 수 없
는 미약한 생의 줄다리기를 하고 있다. 어찌 감히 거룩한 어머니의 삶과
내 삶을 비교할 수 있으랴. 지나온 내 삶의 순간들을 조용히 더듬어 간
다. 그것이 슬픔이든, 아픔이든, 기쁨이든, 그리움이든. 분명한 것은 어
머니는 나의 영원한 사랑의 수호신인 ‘망새’이며, ‘등대’이다.
-<굴레를 벗어난 검댕이처럼>에서


   작가가 어머니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어머
니는 나의 영원한 사랑의 수호신’이라는 구절이 모든 것을 다 말해 준다.
어머니에 대한 작가의 그리움은 그 밑바닥에 어머니의 희생에 대한 부
채의식을 깔고 있다. 그 부채감은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지칠 줄 모르는
지성至誠과 조건 없는 사랑”(<박새의 모정>에서), “자식을 위해서, 형제
를 위해서, 가족을 위해서라면 일신의 모든 것을 서슴없이 바친”(<할머
니의 슬픈 일화>에서) 어머니의 희생에 대해 자식으로서 짊어져야 할
짐이며 회한이다. 더욱이 그러한 어머니가 지병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
다는 점은 맏딸인 작가에게 후회와 죄책감을 안겨 주었다. 그의 수필에
서 ‘어머니 부재’는 하나의 트라우마로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 트라우
마를 계속 안고 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자식이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부채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누구에게나 가능하고 개인
적인 것이기에 간섭할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이를 언급하는 것은 공인
된 한 작가의 작품에서 지속적으로 반복되기 때문이다. 이은희 개인에
게 어머니의 죽음은 현상학적이고 인칭적이지만, 수필가 이은희에게 그
것은 일반적이고 형이상학적이어야 한다. 그는 수필가이기 때문이다.
수필은 작가 자신의 고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독자에게 읽힐 때 문
학작품으로 성립하는 것이다. 독자는 작가가 작품에서 이야기하는 ‘어
머니 부재’를 일반적인 것으로 받아들이지 인칭적인 것으로 인식하지
않는다. 개인이 가지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란 무엇으로도 설명할
수 없고 측정할 수도 없는 절대적인 것이지만, 그것이 작품에 들어갔을
때는 독자가 공감하도록 이해시킬 필요가 있다. 이제 이은희 수필의 새
로운 시도와 변화는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신재기 --------------------------------------------------------
경북 의성 출생.
1990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평론 당선. 대구문학상, 신곡문학상 수상.
현재 경일대학교 교수.
평론집 ≪비평의 자의식≫, ≪여백과 겸손≫, ≪수필과 사이버리즘≫, ≪수필과 시의 언어≫
가 있고, 산문집으로 ≪언어의 무늬와 빛깔≫, ≪침묵의 소리를 듣는다≫, ≪나는 계획한
다, 분서를≫, ≪경산신아리랑≫, ≪프라이버시의 종말≫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