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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과 비평 2012년 1월호, 인연] 착각이라구? - 김윤재

신아미디어 2012. 2. 17. 12:34

 

착각이라구?

   남편을 바꾸고 싶을 때가 종종 있다.
   그가 손을 대면 고장 난 라디오가 소리를 내고, 형광등이 번쩍 들어오
는 재주꾼이었으면 좋겠다. 나와 상관없는 사람에게는 무뚝뚝하고 가족
들만 사랑하는 차가운 남자였으면 좋겠다. 물론 사람마다 성격이 다르
고 재주가 다른 것은 인정한다. 모두 같은 재주를 가지고 있다면 상권이
무너질 것이니 그것을 원하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못 하나 정도는 쿵쿵
박아야 두 손 모아 쥐고 용사 바라보는 나약한 여성의 모습을 취해 보지
않겠는가.
   나는 남편이 AB형이라고 말했을 때 재주가 많을 것이라고 믿었다. 무
엇이든 난처한 일은 해결할 줄 알았다. 착각이 아니었다.
   결혼식을 마치고 신혼여행 일정은 다음날이었다. 친구들과 뒤풀이를
마치고 숙소로 들어가는데 5~6명의 건장한 사람들이 우리를 에워쌌다.
그들이 요구하는 돈을 주면 위기를 모면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남편
은 그들을 몇 발짝 떨어진 곳으로 데려갔다. 그리고 이내 돌아왔다. 상황
으로 보아 돈은 주지 않은 것 같았다. 그때 남편이 어떻게 그들을 돌려
보냈는지 알 수 없지만 참으로 믿을 만한 사람이었다.
   그랬던 남편은 신혼 초부터 집안일을 슬슬 피했다. 전기가 나가고,
텔레비전이 말썽을 부려도 기술자를 부르라고 했다. 처음엔 바빠서 그
러려니 했는데 전구를 갈아 끼우는 일까지 부탁하니 의심이 가기 시작
했다. 의심이 가면 베일을 벗겨보는 것. 드디어 전구가 나가고 퇴근한
남편에게 부탁을 했다. 위생장갑 끼고 두꺼비집 내리고, 의자 가져다
놓고, 선글라스 끼고. 전구를 갈기 위해 준비한 것들이다. 그 밤 나는
못 볼 것을 보고 말았다. 랜턴 아래서 떨고 있는 손을.
   이뿐이면 남편을 바꾸고 싶어 하는 나에게 문제가 있다고 할 것이다.
못질하다 손톱 치고, 세차하며 상처내고, 쌀통 들다 엎지르고, 잔디는
쥐 파먹은 것처럼 잘라놓고, 상추며 쑥갓 싹이 풀이라며 뽑아버린다.
   이제 좀 상상이 갈 것이다. 내가 속터지는 이유를. 마음씨 고약한 놀부도
이러지는 않을 것이다.
   이 정도는 가정교육 탓하며 애교로 봐줄 수 있다. 한데 왜 그리 인정은
많은지 모르겠다.
   택시기사에게 친절하기, 술집아가씨들 챙겨주기, 선후배 돌아보기,
마음 줄 곳이 한두 곳이 아니다. 이런 친절이 주는 것으로 끝나면 좋으련
만 되로 주고 말로 되돌아오는 경우가 종종 있다. 가만히 듣고 있으면
택시기사는 남편을 무시하는 말투고, 술집아가씨들은 오빠, 아빠라고
부르며 수시로 전화를 한다. 물론 좋다. 사내대장부라면 태산을 품어야
하는데 여인네들쯤이야. 스스로 위로하다가도 복장이 터질 때가 있다.
늦은 밤, 술집으로 불러 낼 때다. 그럴 땐 술이 너무 취했다거나 돈이
떨어졌을 경우다. 화장을 지운 호박꽃이 분칠한 장미꽃 앞에 나서는 일
이 어디 기분 좋은 일인가. 꽃을 사들고 술집에 들어서면 아가씨들은
온갖 감언이설로 나를 무너뜨린다. 아줌마쯤이야 먹다 남은 식은밥으로
여기는지 물 붓고 훌훌 마셔버리려 한다.
   그 일도 되풀이되니 견딜 만했다.
   그러면 참고 살아야지 어떻게 하느냐 타이르고 싶으시겠지만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봐 주시길 바란다.
   정말 속 터진 사건이 일어났다. 가족들과 상의도 없이 명예퇴직을

신청한 것이다. 평소 이사관이 되면 후배를 위해 멋지게 물러나겠노라고

했지만 그냥 하는 소리겠지 생각했었다.
   생각보다 마음이 약하고, 늘 큰소리치지만 실은 세상유혹에 넘어가
실수도 많이 하고, 어려운 일이 생기면 어린애처럼 신에게 매달리는 남
자. 일류 앞에서는 꼼짝 못하다가 이류 앞에서 목에 힘주며 교만과 열등
감 사이를 오가는 두 개의 얼굴을 들키기도 하는 남자. 길을 잃어도 묻지
않고 싸움이라면 심줄이 끓어져도 달려드는 자존심 강한 남자. 이겼을
때는 계속 이기지 못할 것이 두렵고 졌을 때는 다시 질 것을 두려워했던
남자. 능력이 없어 처자식 남들 앞에서 비참하게 만들까봐 온갖 수모를
참아왔던 남자. 말로는 민족운명이 어떻고 대의가 어쩌고 하지만 현실
에서는 식사비 조금 아끼려고 벌벌 떠는 남자. 앞서가는 선배보다 치고
올라오는 후배를 더 두려워했던 남자. 그래서 아내 아닌 여자를 사랑해
보기도 하고, 술에 취해 가족에게 상처를 준 남자. 성공을 위해 달려
왔지만 정작 고지에 이르렀을 때 밀려드는 공허감을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일까. 도대체 이 남자는 무엇을 위해 인생을 살아온 것일까.
   나는 내심 걱정도 되었지만 남편의 결단력과 용기에 박수를 보내고
말았다. 사표는 멋지게 수리되었고 남편의 35년 공직생활엔 동그랗고
까만 마침표가 찍혔다.
   그럼 평생 가족을 위해 헌신한 남편을 위해 아내 된 입장에서 돌봐
주어야지 남편을 바꾸겠다는 그런 망말이 어디 있느냐고 나무라시겠지
만. 아직 할 말이 남아 있다.
   그동안 고생했으니 여행도 하고 좋아하는 책 실컷 읽으면 좋으련만
왜 내 영역을 조금씩 침범하는지 모르겠다.
   누가 설거지 하랬나. 빨래 널어 달랬나. 장바구니 들어 달랬나…….
   게다가 못질도 내가 하고 무거운 짐도 내가 들었는데 왜 머리칼은 하얗고,

등은 굽었는지 모르겠다. 왜 아가씨 있는 술집보다 오리집을 더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왜 현관에 벗어 놓은 구두를 들여다 보고 있으면 신파를 쓰지

않아도 신발 속에 안쓰러움이 들어 있는지 모르겠다. 왜 시린 내 발이

남편의 겨드랑이 속에 들어가야만 녹아내리는지 모르겠다.
   이런다고 남편을 바꾸고 싶은 마음이 바뀐 것은 아니다.
   지난 35년 공직생활동안 성공 실패 칭찬 비난 신뢰 배신 로맨스 모함을 겪
으며 한 편의 시를 멋지게 쓴 이 남자를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는 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한데 착각이라구? 남편도 아내를 바꾸고 싶어 한다고?-


 

김윤재 -----------------------------------------------------
1998년 ≪수필과비평≫ 등단.
수필집: ≪하늘밭 열 평≫, 기도일기: ≪약속≫, 수필과비평문학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