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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과 비평 2012년 1월호, 촌감단상] 공자가 말했다 - 엄현옥

신아미디어 2012. 2. 17. 08:36


공자가 말했다

   서둘러 계단을 내려갔으나 전동차는 눈앞에서 떠났다. 한시적인 적막
을 벗 삼아 역내를 배회하고 있을 때, 에스컬레이터 아래 빗금공간에서
상인 셋이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가격표를 붙인 상자를 옆에 두고 그
중 한 남자의 이야기를 경청하며 질문도 했다. 분위기는 자못 진지하여
공자와 제자의 문답을 연상케 했다. 제자가 물었다.
   “단속반이 내 앞을 가로막으며 팔을 잡아끌며 내리라고 할 때는 어떻
게 하죠?
   공자가 말했다.
   “단속반은 대개 두 명이 한 조다. 그들이 가로막으면 우리는 위축되기
마련인데, 이때 붙들린 팔을 뿌리치면 더 강하게 제재한다. 일단 실랑이
가 벌어지면 아프다고 크게 말해라. 다만 어떤 경우에도 폭력은 쓰지
않는다. 이 점이 중요하다. 그렇다고 우리가 맞을 일은 없다. 사람들이
많은 곳이고 그들은 대부분 약자 편이다. 그래도 팔을 계속 붙들려고
하면 이렇게 말해라. 이것은 대법원 판례에서도 나와 있듯이 집단 폭행
입니다.”
   불법 상행위 단속에 대법원 판례까지 거론될 법치국가에서 살고 있다
는 사실이 새삼스러웠다. 진위를 막론하고 질문에 명쾌하게 답하는 그
의 어투는 카리스마가 넘쳤다. 불과 삼사 분의 짧은 시간이었으나 단정
적인 말투로 상황을 깔끔하게 마무리했다. 그때 열차가 진입한다는 안
내 방송이 나왔다. 별도의 끝종도 없이 그의 명쾌한 강의는 끝났다.
   가볍게 손을 흔들며 유유히 열차에 오르자 제자들은 목례로 그를 보
냈다. 열차 탑승에도 서열이 있었다. 나도 그와 같은 칸을 타게 되었는
데, 그의 음성은 힘을 걷어낸 나긋나긋한 소리로 변했다.
   “어르신들, 목욕탕에 다녀와도 그때뿐, 각질은 또 생기실 겁니다. 그래
서 오늘은 나노 소재가 함유된 보온 효과가 뛰어난 덧신입니다. 김장할
때도, 수족 냉증에도 효과 그만인 덧신을 한 개 사천 원, 세 개 만 원으로
여러분을 모실까 합니다. 여기 어머님은 무슨 색으로 드릴까요?”
   본격 판매전이 시작되자 그만의 매뉴얼로 차내를 장악했다. 덧신에까
지 나노 소재가 사용된 것은 확인할 바 없었으나, 그는 지하철 무허가
마케팅의 달인이었다. 그의 말에는 받아들여야 할 사실로 각인되는 독
특한 힘이 있었다.
   일상의 매뉴얼에도 철저하지 못한 나는 오래전부터 머릿속에 터줏대
감으로 들어앉은 묵은 화두를 꺼내 묻고 싶었다. 그라면 명쾌하게 대답
할 것 같았으나 우물쭈물하다가 삼키고 말았다.
‘공자님, 좋은 수필은 어떻게 써야 하나요?’*

 

엄현옥 -------------------------------------------------------
1996년 ≪수필과비평≫ 등단.
수필집: ≪다시 우체국에서≫, ≪나무≫,

            ≪아날로그-건널 수 없는 강≫, ≪질주≫, ≪작은 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