팽 이
꼬마가 팽이를 돌리고 있다. 다섯 살쯤 되어 보이는 사내아이는 팽이
채를 들고 서투르게 팽이를 쳐보지만 이내 쓰러지고 만다. 그래도 지치
지 않고 쓰러진 팽이를 다시 돌린다. 또 쓰러질 게 분명하다.
아이의 행동이 재미있어 한참을 바라보다가 집으로 들어왔다. 저녁식
사를 위해 감자 껍질을 벗기다가 꼬마가 궁금해 베란다로 나가 본 것이
벌써 몇 번째이다.
나는 어느새 내 유년을 타고 아련한 옛 추억 속으로 달려간다. 겨울이
면 동네 아이들이 즐겨 하던 놀이가 팽이 돌리기였다. 남동생이 넷이나
되는 나는, 고무줄뛰기나 콩돌줍기는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동생 잘 보
라는 아버지의 엄명에 사내아이들 꽁무니만 졸졸 따라다녀야 했다. 언
젠가 동생들이 다 잠든 사이에 팽이를 꺼내 혼자서 돌려보았다. 잘 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막상 해보니 생각만큼 되지 않았다.
오랫동안 꼬마들의 사랑을 받았던 팽이는 1970년대에 장난감의 홍수
속에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더구나 현대에 이르러는 컴퓨터가 각 가정에
보급되면서 흙과 더불어 즐기던 놀이는 옛이야기가 되어 버린 것이다.
팽이는 채찍질을 하지 않으면 쓰러지고 만다. 세상 사는 법을 이처럼
확실하게 가르쳐 주는 놀이가 또 있을까. 유아기를 지나 학교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부터 인생의 경쟁은 시작된다. 남들보다 한 발이라도 앞
서 나가기 위해서는 자신을 향한 끊임없는 채찍질이 필요하다. 잠시 한
눈을 팔기라도 하면 팽이처럼 쓰러지고 만다. 인생은 쓰러지는 일의 연
속이다.
아이들이 치는 팽이도 수없이 쓰러진다. 그러나 꼬마들은 실망하지
않고 줄기차게 팽이를 일으켜 다시 채찍질을 한다. 쓰러졌다 해서 그
한 번의 실패로 낙담하지 않는다. 열 번, 스무 번, 해가 지고 엄마가 부를
때까지 지치지도 않고 돌리고 또 돌린다. 다른 아이들 것과 비교도 해보
고 제 것이 잘 돌지 않는다며 이리저리 다듬어도 보고 정성을 쏟곤 한다.
나는 꼬마가 끈질기게 팽이를 일으켜 세우는 모습을 보면서, 그 놀이
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팽이는 단순한 장난감이 아니었다.
옛날 어른들이 낫으로 박달나무를 깎아 아이들에게 만들어 주던 그 무
언의 행위 이면에 이토록 오묘한 인생철학이 담겨 있을 줄이야!
어린 시절 살을 에는 추위에도 콧물을 훔치며 줄기차게 팽이를 돌리
던 아이들의 모습이 그립다. 이번 설 연휴에는 손자들과 함께 팽이치기
나 하며 동장군을 녹여 볼거나.
양미경 ----------------------------------------------------------
1994년 ≪수필과비평≫ 등단.
수필집: ≪외딴 곳 그 작은 집≫, ≪고양이는 썰매를 끌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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