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수필과 비평/수필과비평 본문

[수필과 비평 2012년 1월호, 촌감단상] 홍시 - 안재진

신아미디어 2012. 2. 13. 12:12


   골목길을 벗어나는 모퉁이에 감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붉은 벽돌담
에 비스듬히 기대어 선 채 반쯤 골목 쪽으로 가지를 꺾은 모습은 언제나
풋풋한 정감을 느끼게 했다. 봄이면 연둣빛 작은 잎새가 이웃집 소녀의
두 볼처럼 가슴 뭉클하도록 진한 생명감을 느끼게 했고, 다른 쪽으로
눈을 잠시 돌렸다 다시 보면 노오란 감꽃이 피어 저만큼 잃어버린 어린
시절이 곱게 여울지곤 했다.
   그리고 볕살 두터운 여름이 오면 잎새는 어느 사이 동해 어느 포구에
갓 잡아 올린 검푸른 고등어 등짝 같은 짙은 그늘을 이루고 그 아래 거적
을 깔고 길게 반듯이 누운 채 눈을 감으면 하루에도 몇 번씩 내가 모르는
먼 세상을 끊임없이 오가는 꿈을 꾸곤 했다.
   오늘도 나는 큰길로 나갈 수 있는 쉬운 길을 마다하고 일부러 감나무
가 있는 모퉁이 길로 돌아가게 된다. 음습하고 깡마른 골목길에 그래도
고향을 느끼며 자연을 마주할 수 있는 안위감 때문이라 할까.
   상강霜降이 지났지만 감은 아직도 퍼렇다. 다만 잎새만이 힘겨운 계
절을 벗어나려는 듯 물기를 털어내는 낌새를 보이고 있다. 그런데 언뜻
올려다본 높은 가지에 마치 나만이 존재한다는 듯 붉게 익은 홍시 하나
가 눈에 뜨인다. 어린 시절, 텃밭 외진 자리에 홀로 버틴 늙은 감나무에
서 보았던 그런 홍시다. 진홍빛 윤기가 흐르는 색감 자체가 무척 아름
답지만 그보다 잘 정제된 설탕처럼 달콤한 미감은 일품이었다. 때문에
노계 선생은 지인의 집을 방문하였을 때 접대로 내놓은 홍시를 바라보
면서 집에 계신 어머니를 생각하고 반중조홍盤中早紅감이 품음직하다고
했던가.
   나는 그때 여린 가지를 밟으며 위태하게 올라가서 그것을 따려고 발
버둥했다. 아버지는 그런 모습을 보시면서 “그게 그렇게 먹고 싶었더냐.”
하시면서 측은하다는 표정을 지으셨다. 나는 얼떨결에 “빛깔이 너무 곱
게 보여서…….”라고 말꼬리를 흐리며 마음에 없는 대답을 하고 말았다.
먹고 싶었다는 속내를 들킨 것 같아 뭔가 자존심에 상처를 받은 기분이
들어서다.
   아버지는 다시 말을 이으셨다. “그건 고운 게 아니라 어딘가 잘못된
불량품인 거야. 어쩌다 병이 들었거나 나쁜 벌레가 먹은 거야. 진짜로
좋은 감은 그만큼 시간이 지난 후에 단단하게 함께 익는 법이야. 사람
사는 것도 마찬가지지. 앞만 보고 혼자 날뛴다고 성공한 사람이라 볼
수 없거든.” 어린 나이라 그땐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살아가면서 어느 정도 철이 든 후에야 비로소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진정성이 없는 욕심만으로 앞자리에 앉는다는 건 옳지 않다는 뜻. 비
록 겉모습은 번지레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속으로는 병이 들어 불필요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사실. 진정 사람다운 사람은 보통 사람들 속에 함께
사고하며 행동하고 스스로 가진 장점을 다지어 빛을 밝히고 그 빛을 나
누어 가지면서 함께 아름다워지는 것이 세상 사는 진실이라는 것을 느
낀 것이다.
   나는 한참 동안 홍시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어머니를 생각했던 시인
의 깊은 사려思慮를 생각하며 차츰 잊히고 있는 우리의 정체성을 되짚게
했고, 은연중에 사람 사는 근본을 일러주신 아버지의 모습이 거울 속을
들여다보듯 처연히 연상되어서다.

 

안재진  ------------------------------------------------------

1994년 ≪수필과비평≫ 등단.
수필집: ≪산그늘에 가린 숨결≫ 외 다수. 시집: ≪꿈꾸는 비탈길≫ 외 다수.
기타: 번역 및 편저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