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데팡스의 불빛
파리에 머무는 동안 우리는 두 곳에서 체재했다. 처음 일주일은 고전
적인 분위기가 느껴지는 몽파르나스 근처였고, 그후 집을 얻어 나간 곳
은 전위적인 신도시 라데팡스였다. 샹젤리제 대로의 개선문을 빠져 나
와 그 뒤로 곧바로 뻗어 있는 그랑드 아르메 대로를 지나 센 강을 건너면
바로 거기가 라데팡스 지역이다. 저마다 특색 있는 건축물로 군群을 이
룬 고층 빌딩가임에도 한적하고 매우 아늑했다. 우리는 새천년 5월, 인
생의 마지막 축복처럼 거기에 있었다. 인생 외길을 앞만 보고 달려오다
보니 어느덧 멈춰 서게 된 나이 정년停年에 이르러 비로소 가능하게 된
일이었다. 열흘 간의 유럽 여행을 마치고 우리 내외는 파리에서 주저앉
았다. 개선문이 서 있는 에투알 광장을 중심으로 좌측에 빅토르 위고와
폴 발레리가 만년을 살다가 숨을 거둔 집이 있고, 보들레르가 어머니의
품에서 숨을 거둔 정신병원이 있었다. 애인의 이름이나 되는 것처럼 그
들의 이름을 가슴에 품고 주소만으로 발품을 팔아 가며 그들의 연고지
를 찾아 파리 시내를 헤매었다. 숙소로 돌아오면 밤마다 준비해 간 자료
들을 들춰 보고 아침이면 등교하는 학생처럼 서둘러 집을 나서곤 했다.
프랑스 작가들에 관한 기록은 내 몫이고 남편은 주로 미술관 자료를 챙
겼다.
2000년 5월 19일, 이른 조반을 마치고 우리를 데리러 오기로 한 친구들
을 기다렸다. 오베르 쉬르 우아즈로 가기로 한 날이었다. J군은 알베르
카뮈를 전공하는 불문학도였고, 친구 딸은 시각디자인을 공부하는 학생
이었다. 아침부터 가는 비가 조금씩 뿌렸다. 우리는 승용차로 시간 반
가량 걸려 파리 북부에 있는 오베르에 닿았다. 빈센트 반 고흐가 숨을
거두던 날의 정황을 알고 있었기에 가슴이 조여 왔다.
50여 년 전쯤 되는 것 같다. 갓 대학생이던 시절, 일본 문고 판화집으
로 고흐와 처음 만났는데 그때 본 <슬픔(悲しみ)>이라는 제목의 그림이
왠지 오래도록 가슴에 남아 있었다.
무릎 위에 팔짱을 끼고 그 사이에 얼굴을 묻고 있는 늙은 나부裸婦의
연필 스케치였다. 구부린 등으로 흘러내린 윤기 없는 머리칼, 볼품없이
처진 유방 아래로 불룩한 배. 무어랄까. 암컷의 비애 같은 것을 느끼게
해 주던 그림이었다. 고흐와 창녀 시엔과의 일을 알게 된 것은 훨씬 나중
일이었다. 고흐는 늙고 병든 창녀와 동거 생활을 서슴지 않았다. “그녀
와 있을 때가 제일 마음이 편해.”라던 말이 이상하게도 내 마음을 흔들었
던 것이다. 그때 “왜 창녀가 성녀聖女인 줄 아십니까?” 하고 ‘창녀가 성녀’
라고 목소리 높여 ‘성녀론’을 외치던 어느 화백의 말이 떠올랐고, 창녀의
‘성녀론’은 이내 고흐와 로트렉의 이름을 연관지어 떠오르게 하는 것이
었다.
선線의 화가 툴루르즈 로트렉이 앙보와즈의 매음가에 드나든 것은 28
세 때부터다. 몽마르트르 물랭 가街에 새로운 고급 창가娼家가 생기자
그는 아예 그곳으로 이사해서 창녀들 속에서 생활하기 시작했다. 창가
가 그의 집이자 아틀리에였던 것이다. “어디보다도 여기 창가娼家에 있
을 때가 제일 마음 편안해.”라던 로트렉의 그늘진 얼굴도 떠오른다. 그
는 사창가에 파묻혀 살면서 그녀들의 편지를 대필해 주고, 신세 타령을
들어주고, 술 파티도 열어 주었다. 그리고 50여 점이나 되는 작품 속에
창녀들의 모습을 담았다. 손님과 자는 모습. 검진을 받는 모습. 속옷을
벗는 모습 등 노골적인 부분까지도 꾸밈없이 그려 나갔다.
로트렉은 살아 움직이는 대상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다. 어려서 골절
상을 입고 하체가 발육 정지된 기형의 불구자여서 그랬을까? 튼튼한 다
리를 가진 말이라든지 캉캉을 추는 무희, 카페나 댄스홀, 사창가, 서커
스, 극장 등을 찾아다니며 재빠르게 움직이는 동작들을 냉담한 시선으
로 열심히 그려 나갔다. 캐리커처적인 데생 기법으로 완성된 물랭루주
시리즈와 서커스 시리즈가 아직도 전해진다. 로트렉이 그린 창녀들은
타락한 여자도 아니고 구제받아야 할 인간도 아니며, 다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창녀’일 따름이라고 한다. 대상으로서의 냉철한 표현을 추
구했다는 것이 되리라.
그러한 반면 화가 루오는 창녀들의 추악한 모습을 그려 그것을 묵인
하는 사회에 대한 고발 정신을 거기에 포함시켰다. 그런가 하면 고흐는
렘브란트가 그린 매춘부의 초상화에는 신비스러운 미소가 특유의 무게
를 갖고 아름답게 포착되어 있다면서 그를 미술가 중의 미술가라는 극
찬을 아끼지 않았다. 고흐는 네덜란드의 선배 화가인 렘브란트에게 경
도되어 있었다. 그러나 고흐가 그린 매춘부 시엔에게서는 루오의 추악
함도 아닌 렘브란트의 아름다움도, 로트렉의 창녀다움도 아닌 한 여자
의 운명적인 슬픔을 나는 그때 전해 받았던 것이다.
“빌어먹을, 벽은 너무나 춥고 나는 지금 여자가 필요하다.”라고 동생에
게 편지를 써 보낸 것은 고흐의 나이 28세 때. 그는 어느 추운 겨울날,
거리를 헤매고 있는 여자 시엔과 만난다. 그녀는 병들고 임신한 데다 남
자에게 버림받은 만삭의 여인이었다. 고흐는 편지로 동생에게 알렸다.
나는 진심으로 시엔을 좋아하고 그녀 역시 그렇다. (…) 그녀도 나도
불행한 사람이지. 그래서 함께 지내면서 서로의 짐을 나누어 지고 있
다. (…) 시엔을 만나지 않았다면 마법이 풀려 실의에 빠졌을 것이다.
그녀와 그림이 나를 지탱해 주고 있다. 시엔은 화가가 겪어야 하는 자
잘한 고생을 도맡아 주고 모델이 되어 포즈를 취하고 있다. 비록 그녀
가 케이(약혼녀)처럼 우아하지도 않고 예절도 잘 모르지만 선의와 헌신
으로 가득 차 있어서 나를 감동시킨다. (…) 나는 지금보다 더 나은 때
에 그녀와 결혼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그녀를 계속 도울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녀는 다시 과
거의 길, 그녀를 구렁텅이로 내몰 것이 분명한 그 길로 돌아갈 수밖에
없을 테니까.
그러나 시엔과의 관계도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그녀에게는 다섯 명
의 애들이 딸려 있었고, 고흐는 몹시 빈곤했으며, 그해 6월 병원으로 들
어가야 했기 때문이다. 37세의 나이로 생애를 마감하기까지 고흐는 서
너 차례의 청혼을 한 일이 있건만, 하숙집 딸에게서도, 사촌인 케이에게
서도 모두 거절을 당했다. 연상의 어느 여인과도 사귀었지만 가족들의
반대로 결혼의 꿈은 종내 이룰 수 없었다. 가난 말고도 그는 간질성 발작
의 지병을 갖고 있었다. 만일 고흐가 지병을 갖고 있지 않았더라면, 또한
가난 때문에 청혼을 거절당하는 일조차 없었더라면 시엔과 사귀게 되었
을까? 마찬가지로 로트렉의 몸이 정상이었다면(신장 137㎝의 기형임.)
어떠했을까? 인생의 실격자라는 패배 의식이 없었다고 해도 그는 창녀
들과 어울렸을까? 그러나 이미 그건 어리석은 질문일지 모른다.
“내가 그림을 그리게 된 것은 우연에 지나지 않아. 내 다리가 조금만
길었더라면 난 결코 그림 따윈 그리지 않았을 거야.” 하던 그의 말이
모든 것을 답해 주고 있지 않은가. 운명은 이미 선택 이전의 것이었다.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지 않았고 그래서 또한 혈족 혼인의 피해가 없었
더라면 그런 허약 체질은 물려받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기에.
매춘부 시엔과 고흐, 그리고 창녀들과 로트렉, 그들의 교합은 어쩐지
마른 장작처럼 완전연소로 타오르지 못하고, 젖은 습목의 그것처럼 미완
으로 남아 그들의 생애와 맞물려 사람의 마음을 젖게 만드는 것이었다.
어느새 발걸음은 그의 집에 다다랐다. 반쯤 열려진 붉은 철제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담쟁이덩굴은 ‘반 고흐의 집’이라는 글자만 남겨 놓고
벽을 온통 뒤덮어 버렸다. 개장 시간은 9시30분. 근처 카페에서 쁘레소
를 주문하고 30분을 더 기다려야만 되었다. 오베르는 아주 작고 한적한
마을이었다. 고흐가 이곳으로 온 것은 1890년 5월 중순이라고 하니, 우
리가 고흐를 찾은 계절과 같은 무렵이다. 그가 즐겨 그렸던 보라색 붓꽃
이 오베르 교회 앞에도 한창이었다. 생 레미 요양원에 가 있던 형을 테오
가 파리로 부른 것은 1890년 5월 17일. 동생의 형편이 몹시 어려워진
것을 안 고흐는 곧바로 이곳 오베르로 떠나오게 되었는데 라부의 여인
숙에 머물면서 화가이며 의사이기도 한 가셰의 치료를 받으며 그는 그
림에만 몰두했다. 오베르에서만도 60점에 가까운 유화를 제작했고, 30
점의 수채화와 드로잉을 남겼다. 거의 하루에 유화 한 점 꼴인 놀라운
성과였다.
2층 기념품 가게에서 방명록에 사인을 하고 3층으로 올라갔다. 계단
을 밟아 오르는 순간, 알 수 없이 가슴이 조여 왔다. 무엇 하나 허투루
보이지 않았다. 담벼락에 페인트칠이 벗겨진 자리에 지그재그로 난 균
열은 불안한 그의 영혼을 보는 듯해서 마음이 좋지 않았다. 숨죽이며
고흐의 방으로 들어섰다. 한쪽 모서리가 깎여진 아주 작은 다락방이다.
참담했다. 달랑 의자 하나가 놓여 있을 뿐, 아무것도 없다. 언젠가 그의
그림에서 본 ‘울고 있는 노인’이 앉아 있던 바로 그 의자인 것 같아서
거기에 앉아 나는 사진을 한 장 남겨 왔다.
이 방에서 일어난 일들이 순간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파리에서 달
려온 동생에게 ‘총상은 실수였다.’고 고흐는 말했지만 사실은 계획된 죽
음이었다. 그 무렵 고흐의 손에서는 자꾸만 붓이 미끄러져 나갔다. 그런
손으로 고흐는 <까마귀가 있는 밀밭>과 <오베르의 교회>를 완성했다.
“남에게 욕이 되고 귀찮은 존재가 된다면 차라리 나는 죽음을 택할
것이다. 고통을 불평 없이 참아 넘긴다는 것은 인생에서 오로지 배워야
할 유일한 점”이라던 그의 육성이 들리는 듯해서 침묵 속에 고개를 숙이
고 잠시 서 있었다. 얼굴이 굳어진 우리의 일행은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
다. 지붕으로 난 작은 들창과 마룻바닥, 나는 눈으로 고흐의 침대를 창가
에 놓아 보고 그 옆에 테오를 앉혀 본다. 밤이 내리고 방안에 단둘만
남게 되자 형제는 브라반트에서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조용히 나누기
시작한다. 새벽 1시가 조금 지났을 때, 고흐가 약간 고개를 돌리고 나직
하게 중얼거렸다.
“테오, 난 지금 죽었으면 좋겠구나.”
그리고 몇 분 뒤 그는 눈을 아주 감았다. 7월 29일의 일이다. 그의
유해가 오베르 교회 앞을 지나서 비탈길을 올라, 자살하기 며칠 전에
그렸던 ‘까마귀가 있는 보리밭’의 현장인 보리밭을 지나 마을의 공동묘
지로 따라 올라갔을 그의 마지막 발걸음을 쫓아 나도 그렇게 묘지에 이
르렀다. 왼쪽엔 고흐가, 오른쪽엔 테오가 팔을 뻗으면 손이 맞닿을 자리
에 이들은 나란히 누워 있었다. 내 귀엔 나직한 고흐의 음성이 들려왔다.
“테오야. 나를 먹여 살리느라 너는 늘 가난하게 지냈겠지. 돈을 꼭
갚겠다. 안 되면 영혼을 주겠다.”
이승에서 갚지 못하면 영혼을 주겠다던 형과 나란히 누운 두 사람의
묘비 가운데 서니 자꾸만 콧마루가 시큰해왔다.
형이 떠난 지 반 년 만에 이곳에 따라와 묻힌 테오!
헤어질 날이 언제일지 모르나 우리 두 사람도 이들 형제와 같다면 좋
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고흐를 보고 돌아오는 길에 지베르니에 있는 모
네의 집까지 들렀다. 수련이 한창 아름다운 정원과 그림들을 감상하였
다. 너무나 다른 두 사람의 환경, 상대적으로 고흐의 절망감이 더 아프게
느껴졌다. 그리고 ‘금욕적’이라던 고흐의 금욕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되던 것이다. 어느 날 그는 동생에게 편지로 이런 고초를 털어놓았다.
테오야. 모파상의 소설에 등장하는 토끼 사냥꾼을 기억하니? 10년 동
안 사냥감을 쫓아 열심히 뛰어다녀서 녹초가 되었는지, 결혼할 생각을
했을 때는 더 이상 그게 서지 않던 사람을. 그 때문에 그는 아주 초조해
지고 슬퍼했지. 결혼을 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하고 싶지도 않지만, 육
체적으로 나는 그와 비슷해지고 있다. 뛰어난 선생 지엠에 따르면 남자
는 더 이상 발기할 수 없는 순간부터 야망을 품게 된다고 하더라. 그런
데 발기하느냐 마느냐가 더 이상 문제가 안 된다면 나는 야심을 품을
수밖에 없지.
그의 나이를 헤아려 보니 겨우 서른다섯 살이었다. 이것은 죽기 이태
전의 편지였다. 성에 대한 욕망과 발기 능력은 사람에 따라 다르다고는
하지만, 서른다섯 살의 좌절은 너무나도 가혹한 것이 아닌가.
오베르를 다녀온 날 밤, 나는 쉬이 잠에 들지 못했다. ‘야심’이란 살아
있다는 또 다른 이름의 생명력의 실천이 아니겠는가. 갑자기 나는 이
말이 떠올랐고 생명이라는 낱말 앞에는 속절없이 목이 메이는 것이었
다. 창문에 어른거리는 불빛 아래 곤히 잠들어 있는 남편의 모습이 왠지
오늘따라 낯설어 보인다. 깊게 팬 눈가의 음영, 어느새 시들어 버린 생의
열정. 언제 이런 나이에 이르렀는가.
며칠 전의 일이다. 기념관이 된 ‘들라크루아의 집’에서 미술 작품을
감상하고 생제르맹 대로로 나와 카페 ‘프롤르’를 지나는데 책 가게의
‘화집 세일’이 눈에 띄었다. 그에게 책 한 권을 골라 선물했다. 에로틱한
나체화로 꾸며진 ≪에로이카 유니버설≫이었다. 책장을 들추니 쿠르베
의 ‘나부’를 비롯하여 고갱과 피카소가 그린 성희性戱, 살바도르 달리·
엥그르·로트렉·드가·도미에·밀레·로댕까지도 성을 주제로 한 그림
이 거기에 집합되어 있었다. 힌두 사원의 벽화와 에로틱한 캐리커처의
자극도 그에게는 이제 무용지물이 되었단 말인가.
사람을 난처하게 만들던 돌발적인 기습 따위는, 그런 장난스런 막무
가내는 그러고 보니 언제부턴가 아득한 일이 되어 버렸다.
나는 그동안 남편이 그림을 그려 온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학교에서 퇴직하던 날, 가져온 짐 속에 들어 있던 그림을 보고서야 놀라
지 않을 수 없었다. 장차 남은 시간을 죽이기 위해 연습 삼아 혼자 그려
보았노라는 수줍은 그의 변이 이어졌지만 그것은 끝내 현실로 다가왔
다. 어쩔 수 없이 이제부터는 시간을 죽여야 하는 일이 시작된 것이다.
과연 우리가 살아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를 가끔 생각하게 된다.
시간의 효용성을 운위하며 거기에 알맞은 의미를 부여하지만 실은 모
두가 덧없는 구실만 같다. 그럼에도 우리는 살아 있지 않은가.
아침마다 눈을 뜨면 맞게 되는 하루, 축복의 보너스 같기도 하지만
때로는 솔직히 말하자면 그 하루 해가 조금씩 겨워지기 시작한다. 장거
리 여행도 이제는 조심스럽다. 다행히 그 무렵 파리에 있을 때는 고취된
의욕에 건강이 따라주었다. 고통으로 점철된 그들의 삶은 우리에게 삶
의 광휘를 보태 주었다. 그 모두가 고통의 늪지에서 피워 낸 꽃들이었다.
나는 그 고통을 생각하며 오르세 미술관에서 고흐의 그림 앞에 오래 서
있었다. 숨찬 붓 놀림, 그의 그림을 보노라면 불꽃같이 휘돌아 치솟는
형상에서 어떤 억압된 분노가 분출되는 듯한 강렬한 인상을 전해 받곤
했다. 그것은 더 이상 남자로서의 욕망이 멈추어 선 자의 변형된 또 다른
성의 에너지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남편의 그림 그리기도 그와 같은
맥락에서였을까에 생각이 이르자, 갑자기 뜨거운 무엇이 목안에서 치솟
는다. 지척에 있으면서 나는 그에 대해 과연 무엇을 안단 말인가?
타자他者, 이체이심異體二心의 타인.
개체個郞란 어차피 독립적일 수밖에 없는 것인가?
순간 존재의 고립감이 뼈끝에 와 닿는다.
창 밖에 에트랑제로 서 있는 저 라데팡스의 축축한 수은등 불빛 아래.
나는 밤 내 그것과 마주하고 있었다.
탱고, 그 관능의 쓸쓸함에 대하여
봄이 이울자 성급한 덩굴장미가 여름을 깨운다.
아파트 현관문을 나서다가 담장 밑에 곱게 피어난 장미 꽃송이와 눈
이 마주쳤다. 투명한 이슬방울, 가슴이 뛴다. 그리고는 알 수 없는 통증
이 한 줄기 바람처럼 지나가는 것이다. 6월의 훈향이 슬며시 다가와 관
능을 깨운다. 닫혔던 내부로부터의 어떤 확산감을 느끼게 되곤 하던 것
도 그러고 보면 매양 그 무렵이었다.
약속한 대로 나는 ‘예술의 전당’ 앞에서 남편을 기다렸다. 아르헨티나
에서 온 뮤지컬 <포에버 탱고>를 관람하기 위해서다. 내가 탱고를 보자
고 제안했을 때, 그는 순순히 동의해 주었다. 순순히라는 말 속에는 그렇
지 않을 수도 있다는 뜻이 담겨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흔히 탱고를 관능
과 외설, 즉 단정치 못한 어떤 것과 연관지어 생각하기 때문이다.
관능과 외설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도 가지각색이다. 팔뚝에 붙은 거
머리 떼어내듯 말은 모질게 하면서 속으로는 내심 그 진한 유혹의 잔에
취하게 되기를 원하며, 궤도 이탈을 꿈꾸기도 하고 심지어는 파괴적 본
능까지도 일으키는 이들이 있었다. 이렇게 논리로 설명될 수 없는 일이
일어나며 때에 따라서는 그것이 미화되고 대상에 따라서는 인간적이라
는 지지까지도 얻어내고 있는 것이다.
≪악의 꽃≫을 쓴 프랑스의 시인 보들레르의 수간獸姦에 얽힌 이야기
나 알듈 랭보와 베를렌느의 동성애 사건, 19세기를 떠들썩하게 했던 사
르트르와 보부아르 여사와의 계약 결혼. 이들의 자유 선언에도 불구하
고 성性에서 끝내 초월적이지 못했던 보부아르 여사를 떠올리면 성은
한마디로 무엇이라고 단정하기도 어렵다. 그러면서도 꼭 알고 싶은 것
이 성의 정체이다.
성의 철학적 성찰을 시도한 조르주 바티유는 “우리 인간을 그런 열정
적 충돌과 무관한 존재로 상상한다면 우리 인간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
한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우리는 열정적 충돌과 결코 무관할 수 없는
존재, 사실 그것으로 해서 우리의 성이 동물적 성행위와 구별되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감각 기관을 통해 일어나는 우리의 욕망과 열정적 감정들이 빚어내는
갈망, 그리고 심리적 추구가 일으켜 내는 프리즘의 굴절 작용 같은 에로
티시즘에서 동물의 것과 다르게 구분되는 인간의 성性을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성性, 나는 그 자체보다 성에 대한 심리적 반응에 더 관심이 모아진다.
감각의 비늘을 일으켜 세우는 우리 몸의 관능이 어떻게 하여 일어나
며 어떻게 스러지는가? 생명의 에너지를 성의 에너지로 환치한다고 해
도 다를 바 없다는 그 에너지의 본체는 무엇인가 하는 물음이 한때는
내게 화두였다. 백골白骨을 떠올리며 거기서 애욕愛欲의 공무空無함을 상
상해 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목숨이 있는 한, 성性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며칠 전 조간신문에서 ‘관능적 몸짓, 유혹의 노출’이라는 큰 제목 아래
소개된 <포에버 탱고> 댄서들의 사진을 보게 되었다. 열정과 관능의 댄
스라고 세계의 언론도 극찬한 바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나는 솔직하고
아름다운 섹슈얼리티의 무대라고 한 그 선전 문구가 마음에 들었던 것이
다. 사실상 섹슈얼리티에서 한 발자국쯤 멀어진 나이가 되어서인지 섹슈
얼리티의 무대가 궁금해졌다. 기다리고 있던 무대에 조명이 들어왔다.
아르헨티나의 고유 악기인 반도네온(아코디온의 변형 악기)이 상징물
처럼 무대 중앙에 설정되어 있고,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밤 하늘에 슬픔
의 고함처럼 울리던 그 반도네온의 선율이 오케스트라와 함께 울려 퍼
지면서 댄서들의 춤이 시작된다.
말끔하게 턱시도를 차려입은 남성 댄서는 올백으로 붙여 빗은 머리에
거울처럼 반짝거리는 검정 구두를 신었다. 그런가 하면 여성 댄서들은
터질 듯한 앞가슴의 풍만함을 엿보이도록 깊게 파인 드레스를 입고 될
수록 몸의 곡선을 강조한 타이트한 실루엣, 높고 뾰족한 하이힐. 거기다
내면의 외로움을 무시하듯 함부로 치장된 금속성의 액세서리와 머리에
꽂은 가벼운 깃털과 구슬핀의 섬세한 장식. 대각선으로 어깨를 맞대고
있는 남녀 댄서의 얼굴은 정지 신호에 걸린 듯 잠시 무표정하다. 투우사
가 소를 겨냥할 때의 그것처럼 긴장감마저 든다. 그러나 빠르고 경쾌한
탱고 리듬의 스텝이 몇번 어우러지더니 급한 회전을 이루며 이내 타오
르는 장작불처럼 격렬함에 이르고 만다.
여성 댄서의 손이 남성 댄서의 목을 부드럽게 감싸안는다. 입술이 닿
을 듯 밀착된 가슴, 상대방을 갈구하는 듯한 눈빛, 마침내 남자의 손이
여자의 몸을 훑어내리기 시작한다. 정교하면서도 감성적인 터치, 허벅
지까지 깊게 터진 스커트 속으로 공격적인 다리의 움직임이 자유롭다.
탱고는 원래 ‘만진다’는 뜻의 라틴어 ‘탕게레’에서 비롯되었다. 그래서
이 춤은 파트너 간의 밀착, 혹은 좀체로 끊어지지 않는 터치에 그 중점을
둔다고 말한다.
새로운 삶을 찾아 부에노스아이레스까지 흘러들어온 이민자들.
아프리카나 유럽 등지에서 떠나온 그들은 자신의 정체성과 스스로의
애환을 달래기 위해 밤이면 핸슨 클럽에 모여들었다. 거기에서 그들만
의 고유한 춤이 시작된다. 국가는 춤을 법으로 금지하기에 이른다.
탱고는 관능을 고조시키는 북의 단순 반복음, 즉 원시성이 깃든 북의
반복음으로 시작된 룸바나 삼바의 기원에 그 뿌리를 둔다. 브라질계 아
프리카 흑인 노예들이 아르헨티나에 전한, 그러니까 칸돔베스라는 춤이
탱고의 모체가 되는 것이다.
몸만큼 정직한 것이 있을까? 감정이 추운 것을 그들은 몸으로 부볐다.
아라베스크의 문양만큼이나 이국적이고도 음울한 도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좁다랗고 긴 골목의 회랑을 따라 걸어 들어가면
불 켜진 ‘탱고 바’ 앞에서 소리쳐 손님을 부르는 한 젊은 호객꾼과 마주치
게 된다. 중국 영화 <해피투게더>에서의 야휘(양조위 역)이다. 동성애자
인 그는 보영(장국영 역)과 이과수폭포를 보러 아르헨티나에 여행왔다
가 돈이 떨어져 이곳에 억류되고 만다. 이민자와 다름없는 생활이 시작
된다. 첫번째 고통은 허기와 외로움, 그리고 분노와 섹스. 그들은 어디서
부터 잘못된 것일까? 영화가 끝날 즈음에 한 사람은 고국으로 귀향하는
데 한 사람은 그냥 주저앉고 만다. 손을 쓸 수 없는 질병처럼 되어 버린
자신의 삶을 끌어안고 절규하는 대목에서도 긴 가락의 흐느낌, 반도네
온의 탱고 선율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탱고는 남녀가 추는 춤이다. 유랑민의 허름한 방 안 구석, 두 마리
짐승처럼 사내 둘이 부둥켜안고 추는 춤은 탱고가 아니라 차라리 슬픔
이었다. 그들은 영화의 제목처럼 행복하지 못했다. 나는 몸으로 풀어내
는 그들의 언어를 읽어 내려가며 목 안이 아려옴을 어쩌지 못했다. 부에
노스아이레스의 낯선 항구, 적막한 그 마지막에 기대 선 것 같은 인생들
로 해서.
“욕망과 외로움을 표현하는 데 이보다 더 우아하고 솔직한 작품이 있
을까?” ≪뉴스위크≫는 <포에버 탱고>를 이렇게 평했다.
욕망과 외로움을 달래기 위한 스스로의 발열發熱, 고양高揚된 감정에
도달하려고 애쓰는, 그럼으로 해서 더욱 외로워지고 마는 탱고는 결국
외로운 몸짓의 형상화라는 생각조차 들었다. 화려한 복장과 경쾌한 음
악, 에로틱한 율동에도 불구하고 나는 왜 탱고를 관능의 허무와 동렬同列
에 두고 바라보게 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무대 뒤에서 화장을 지우는
배우의 심정처럼 처연해지던 것이다. 가면을 내려놓은 뒤 거울 속 자신
의 얼굴과 마주한 느낌이라고나 할까. 사물의 뒷모습은 때로 앞모습보
다 훨씬 본질적일 때가 있다.
그리하여 열망과 갈채, 그것이 사라진 텅 빈 객석이거나 아니면 소모
해 버린 뒤의 육체적 욕망의 쓸쓸함 같은 것. 이렇게 서로 다른 두 개의
얼굴을 나는 탱고에서 보게 되는 것이다. 관능의 열락悅樂과 축제 속에
서 다른 한편으로는 울고 있는 자신을. 그래서 탱고는 둘이 추면서 혼자
인 춤. 무표정한 얼굴의 속마음, 그 더듬이가 촉수觸手로 짚어 내려가는
내성적內省的인 요소가 탱고의 본령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리고 그믐
달보다도 더 매운 계집의 눈썹 같은 스타카토, 그 스타카토의 분명한
선線을 기점으로 하여 안으로 파고드는 수렴收斂의 감정, 보다 철저하게
혼자가 되는 내성적內省的인 춤으로서의 탱고를 나는 좋아하게 되는 것
이다.
지금 무대에서는 성장盛裝을 한 노년의 커플 댄서가 탱고를 보여 주고
있다. 경륜만큼이나 원숙하고 호흡이 잘 맞는 춤이다. 맞잡은 손을 풀어
놓고 잠시 멀어지는가 했더니 다시 공격적으로 다가와서는 폭력적인 정
사情事라도 벌일 것만 같다. 그러나 마음을 주지 않고 돌아서는 여인처
럼 여성 댄서는 곧 분리된다.
오케스트라의 리듬에 맞춰 그들은 썰물과 밀물처럼 끌어당김과 떨어
짐의 동작을 되풀이하고 있다. 끝없이 이어지는 긴장과 이완. 철썩거리
며 해안가에 밀물처럼 굽이쳐 들어왔다가는 휘돌아 나가고, 나가고 나
면 다시 그 자리. 어찌할 수 없는 본원적인 자리일 터이다.
그럼에도 다시 거듭되는 단순 반복의 해조음海潮音, 관능과 외로움의
합주合奏. 제 몸에서 일어나는 조수潮水의 파고波高와도 같은 탱고 리듬,
그 슬픈 단조單調의 내재율內在律을 듣게 하는 것이다.
실체는 찾을 수 없으나 제 몸에 깃든 녹[鐵]처럼 다시 피어나는 관능의
노도怒濤와 해일海溢.
그것은 결국 우리로 하여금 맞닿을 수 없는 어느 허무의 벽을 짚게
하고야 말리라. 한 발자국 다가서면 또 한 발자국 비켜나는 자신의 그림
자처럼, 어쩌면 몸이 도달하고 싶어하는 지점도 끝내는 허구虛構가 아닐
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양파 껍질처럼 한 겹 한 겹 다 벗겨지고 나면
끝내는 망실亡失, 바로 그 발 밑은 죽음의 계곡이 아닐까?
가서 맞닿지 못하는 허무虛無. 그리하여 나는 현란한 불빛, 탱고 음악의
물결 바다, 섹슈얼리티의 무대라고 한 거기 노련한 동작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에로티시즘을 만날 수 없었다. 다만 서러운 포말泡沫과 다시 일으
켜 세워지지 않는 관능, 노댄서의 이마에 돋은 힘줄을 보았던 것이다.
그것이 나를 스산하게 하였다. 탱고, 그 관능의 쓸쓸함이 나를 쓸쓸하
게 하였다. 한 차례 탱고의 물결이 어렵게 지나갔다. 옆을 돌아보니 남편
의 얼굴도 묵묵하다. 웬만한 일에는 좀체 고양되지 않는 우리들의 요즈
음처럼.
객석에 불이 들어오고 나서도 우리는 한참만에 그 자리를 떴다.
밤 공기는 가을 하늘처럼 삽상하다. 돌층계를 막 내려서는데 불쑥 릴
케의 시구詩句가 발등에 와 닿는다.
오! 장미여.
순수純粹하나마
서러운 모순矛盾의 꽃.
(중략)
이제는
누구의 것도 아닌 외로움을
고이 간직하고 있는
아름다움이여.
나는 낮게 부르짖었다.
“누구의 것도 아닌 외로움을 고이 간직하고 있는 아름다움이여!”
만약 릴케 선생의 허락이 있다면 이 시구를 탱고에게 헌시獻詩하고
싶었다. 그러나 어쩌면 그것은 내 자신에게 보내고 싶은 말이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죽음이란 우리의 삶이 건너온 곳으로
다시 건너가는 것일 뿐
- 몽테뉴
프랑스의 철학자이며 문필가인 몽테뉴(Michel Eyqueme de Montaigne
1533-1592)는 보르도에서 신흥 귀족의 아들로 태어났다. 보르도 고등
법원 판사, 보르도 시장 등을 역임하며 명예시종 칭호 및 생 미쉘 1급
훈장을 받았다.
1580년 47세에 간행한 저서 ≪에세(essais)≫라는 수상록으로 수필의
비조격이 된 그를 한국에서 온 수필가들은 당연히 만나고 싶어 했다.
우리 20여 명은 여독도 풀지 못한 채 파리에 도착한 다음 날 새벽 6시,
몽파르나스 역에서 테제베를 탔다. 미명 속에 쁘레소 한 잔을 마셔두고
공복으로 보르도행 기차에 오르는 발걸음은 묘한 긴장감으로 떨려왔다.
‘일찍이 아무도 나만큼 철저히 이 세상을 떠날 마음의 준비를 한 사람
은 없으리라.’던 몽테뉴는 내게 있어 죽음의 성찰에 관한한 대선배 격이
요, 중수필의 전범이 된 그의 ≪수상록≫ 중에서도 <철학을 연구하는
것은 죽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다>라든지 <불행에 대하여> <죽음에 대하
여>에서 보여준 깊은 성찰은 가끔씩 내 정신을 환기시키는 환기구의 역
할을 담당해주곤 했다. 특히 내가 그에게 경도된 것은 “인간의 죽음에
대해 연구할 때만큼 기뻤던 적이 없다. 인간은 죽을 때 어떤 말을 했을
까.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어떤 행동을 보였을까. 이것이야말로 그 어
떤 대목보다도 내가 집중해서 살펴본 부분이다. 이를 통해 내가 제시하
려는 사례들이 쌓여간다. 인간의 죽음이야말로 내가 특별히 좋아하는
소재다. 만일 내가 책을 만드는 사람이었다면 다양한 죽음을 모은 사례
집을 한 권 만들었을 것이다. 인간에게 죽는 법을 가르쳐준 사람이야말
로 인간에게 사는 방법도 가르쳐주니까.”라는 그의 글을 읽고 ‘여기 나
같은 사람이 또 하나 있었군.’ 하며 반가운 마음이 들었던 것은 나 역시
주된 관심사는 죽음이었으며 몽테뉴와 같은 생각으로 다양한 죽음의 사
례집이라고 할 수 있는 졸저 ≪삶을 원하거든 죽음을 기억하라≫를 13년
전에 펴낸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동서고금의 위대한 인물들은 어떻게
죽었는지, 최후의 모습은 어떠했는지, 같은 유형별로 묶어보기도 하고
그들의 사생관死生觀은 무엇이었는지 그런 점을 살펴보자는 의도에서였
다. 그 후 10여 년 넘게 이어진 작가 묘지기행도 같은 맥락에서였다.
무엇 때문이었는지 나도 모르게 죽음에 대해 이끌려 들어갔다. 그때마
다 나는 몽테뉴의 글을 읽고 얼마나 공감하며 깨우쳤던가.
≪에세≫ 제1권 제20장에서 몽테뉴는 말한다.
‘죽음은 예고 없다고. 교황 클레멘스가 리용에 입성할 때, 군중들에게
치여 죽을 줄을 누가 미처 생각할 수 있었겠는가. 그런가 하면 우리 임금
(앙리 2세)의 한 분이 경기를 하다가 죽는 것을 보지 않았던가? 그리고
그의 조상 한 분(필립)은 돼지와 충돌하여 죽지 않았던가.
에스킬스는 집에 깔려 죽을 것이라는 위협을 받고, 언제나 집 밖에서
잤지만 끝내 죽음을 모면할 수 없었다. 그는 하늘을 나는 독수리 발에서
떨어진 거북의 잔등에 맞아서 죽었던 것이다. 그리고 포도씨 한 알 때문
에 죽은 자도 있다. 그런가 하면 어느 황제는 머리를 빗다가 빗에 찔려
죽었다. 에밀리우스 레피두스는 자기 집 문지방에 발이 부딪혀 죽었으
며, 아우피디우스는 회의실에 들어가다 문에 부딪혀 죽었다. 집정관 코
르넬리우스 갈루스는 여자의 허벅다리 사이에서 죽었다…….’
몽테뉴는 죽음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를 기습해 오는 것을 소개
하면서 이렇게 죽음이 대수롭지 않은 일로 흔히 우리 눈앞에서 일어나
는 것을 보고 어찌 우리가 죽음에 대한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한
순간인들 죽음이 우리의 목덜미를 잡고 있는 것을 보지 않을 수 있으랴.
그러니 죽음에 대한 대비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던 것이다.
죽음이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차라리 정면으로 대면하자, 피하려 하
지 말고 앞서 마중하자. 사실 죽음이 두려운 것은 그것의 낯섦 때문인데,
그렇다면 죽음을 자주 바라보고 죽음과 친해지면 된다.
“죽음에서 낯섦을 없애자. 죽음과 교제하자. 죽음과 익숙해지자. 머릿
속에 그 어떤 것도 죽음만큼 자주 생각하지 말자.”
그래서 사死가 생生의 한 부분이라면 아예 함께 사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 그는 계속 죽음을 바라보고 계속 생각하라고 권유했다.
“죽음을 미리 생각하는 것은 자유를 미리 생각하는 것이다. 죽음을
배운 자는 굴종을 모른다. 죽음의 도道는 모든 예속과 억압에서 우리를
해방한다. 목숨을 빼앗기는 것이 불행이 아닌 까닭을 깨닫는 자에게는
이 세상에 불행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라고 그는 말하며 “나는 언제나
생각을 정리하여 있을 수 있는 여러 가지 일에 대비하고 있다. 그러므로
죽음이 찾아오더라도 내게는 새삼스러운 소식이 아닌 것이다. 언제나
구두는 신고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수시로 출동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라고 했다.
‘인생은 그 자체로서는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다.’고 몽테뉴는 말한다.
“그것은 그대들의 할 탓에 따라서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한 것이니까.
죽음은 그대가 살아 있을 때나 죽었을 때나 그대에게 관여하지 않는다.
살아 있을 때에는 그대들 생존해 있으므로, 죽었을 때에는 그대들 벌써
이 세상에 없으므로.
아무도 그 마지막 때가 되기 전에는 죽지 않는다. 그대가 남겨 놓고
가는 시간은 그대가 출생하기 전의 시간과 마찬가지로 본래 그대의 것
이 아니었다. 그 둘 다 그대의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생과 사는 그대에게 관여치 않기 때문이다. 둘 다 이미 그대
의 것이 아니기 때문. 나는 잠시 숨을 고르고 눈을 감아 본다. 어디서
들어본 이야기가 아닌가.
오직 나와 저(해골)만이 알고 있다.
일찍이 삶도 없고 죽음도 없다는 것을.
삶과 죽음을 걱정하랴. 삶과 죽음을 즐거워하랴.
오직 너와 나만이, 네가 일찍이 죽지 않았고
일찍이 산 적도 없다는 것을 안다.
너는 과연 해골이 된 것을 괴로워하는가.
나는 이 세상에 있는 것을 기뻐하고 있겠는가.
장자莊子의 시구가 겹쳐왔다.
삶도 죽음도 없다는 세계, 불교에서는 본래 생사生死가 없다고 말한다.
죽을 내가 없다는 그 무아無我를 알기 때문이다.
올 때 한 물건도 가지고 온 바 없으며, 갈 때 또한 그렇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16세기의 몽테뉴가 불교와 장자를 읽기라도 한 것일까? 그런 의문을
가지며 죽음은 그대가 살아 있을 때나 죽었을 때나 관여치 않는다는 구
절을 되뇌어 본다. 그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어찌하여 그대들은 뒤로 물러서는가?
아무에게도 도망칠 구멍은 없지 않은가. 그대들은 많은 사람들이 죽
음으로써 불행에서 벗어나 행복을 누리게 된 것을 목격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죽어서 손해를 본 사람을 본 적이 있는가. (…) 모든 나날은 죽음
으로 달음질친다. 그리고 마지막날에는 거기에 도달할 것이다. 이것이
우리들 어머니인 대자연의 훌륭한 교훈이다.”라고 그는 강조한다.
자연은 삼라만상 속에서 얼마나 놀라운 율동과 조화의 기적을 이루어
내고 있는가! 자연 안에 고통이 있으면 치유가 있고, 죽음이 있으면 새로
운 탄생이 있다. 모든 것은 돌고 돌며 끝없이 원을 그리며 이어진다.
몽테뉴는 삶이 고통의 연속임을 경험했고 세상이 대립과 갈등과 투쟁의
장임을 보았다. 그러나 그는 절망하거나 탄식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자
연은 돌고 도는 것이므로, 그리고 고통 뒤에 평안과 기쁨이 찾아올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는 담석증으로 몹시 고통을 받았는데, 이 경험을 통해 고통도 발작
의 때가 지나면 자연히 수그러든다는 것을 알았다. 무엇이 그렇게 하는
가? 그것은 어떤 외부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자신이 스스로 그러하
다는 자연自然임을 알았다.
고통이 육체를 죽이지 않는 한, 육체는 다시 일어날 것이다. 이것이
곧 자연의 힘이다. 몽테뉴는 자신의 의지나 인내력 따위를 믿지 않았다.
우리는 단지 그것이 지나갈 때까지 잠자코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그러
니 자연으로 하여금 좀 더 일하게 내버려 두자, 자연은 자기 일을 더
잘 알고 있으니까 자연에게 맡기라고 권고한다. 자연 본래대로 있으면
그대로 완성된다는 노자老子의 자연설을 떠올리게 했다. 그러고 보면 머
물다 가는 우리의 생사生死도 하나의 자연 현상이다. 제대로 죽자면 생
사를 초월하여 죽을 곳이 없는 경지에 자신을 놓을 줄 알아야 한다는
노자를 그는 알고 있었을까? 죽을 곳이 없는 경지란 무심無心, 무위無爲의
자연 회귀가 아니었을까.
죽음이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그래서 사死가 생生의 한 부분이라면
아예 함께 사는 것이다. 그런데 이 죽음과의 공존은 우리에게 뜻밖의
선물은 안겨다 준다. 무슨 선물 말인가?
죽음과 친해질 때 우리는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죽음이란 외형상 존재의 완전한 소멸이지만 동시에 모든 속박과 억압으
로부터의 해방일 것이다. 삶이 우리에게 지웠던 모든 짐을 죽음은 남김
없이 내려놓게 하지 않던가. 병도 고통도 근심도 번뇌도 모두, 너무나도
완벽하게 덜어 내린다. 이 완전한 해방은 다름 아닌 완전한 자유이다.
그러므로 몽테뉴는 “죽음을 미리 생각하는 것은 자유를 미리 생각하는
것이다. (…) 죽는 방법을 아는 것은 우리를 모든 예속과 속박으로부터
해방시켜 준다.”라고 했던 것이다.
그런 만큼 그것에 순응하는 것, 즉 자연을 따르라고 한다.
“자연은 우리에게 말한다. 당신이 이 세상에 들어온 것같이 이 세상에
서 빠져나가라. 당신이 생각도 두려움도 없이 죽음에서 삶으로 건너온
것과 동일하게 이번에는 삶에서 죽음으로 건너가라. 당신의 죽음은 우
주 질서의 여러 부품 중 하나다. 이 세상의 생명의 한 부품이다.”
그러니 자연을 넘어서려는 오만함, 부질없는 야망을 버리고 전적으로
자연에게 맡겨라. 그러면 자연이 어련이 알아서 할 일을 할 것인가.
몽테뉴의 삶의 지혜는 결국 ‘즐기자, 떳떳하게 즐기자.’로 요약된다.
그는 스스로 쾌락주의자임을 자랑스레 선포한다. 처음에는 금욕주의적
인 스토아 철학에 경도되었다. 눈앞의 현실을 외면하고 육체를 경멸하
며 이성과 의지로써 인간 본성을 극복하는 데에 행복이 있다고 주장하
는 거기에서도 그는 벗어나게 된다. 죽음을 염두에 두고 대비하라는 금
욕주의의 가르침과는 정반대로 몽테뉴는 죽음과 고통 따위는 자연에 맡
기고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 않는 편이 낫다는 자연회귀를 택한다. 프랑
스에 페스트가 창궐하여 많은 시민들이 죽었다. 그들의 평온한 죽음을
목도하면서 거기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 죽음의 철학이 삶의 철학으
로 바뀌는 지점이다. 중년에 그는 ‘나는 무엇을 아는가?’를 좌우명으로
삼으며 회의론에 기울었다가 말년에는 이런 체험과 독서 생활을 바탕으
로 천성天性에 따라 자연을 즐기는 에피큐리언이 된다. 그러나 몽테뉴는
감각적 쾌락에서조차도 정신을 개입시킴으로써 쾌락이 전인적인 것이
되기를 원했다. 즐거움을 맛보고 누리되 그것이 감각의 표피를 스쳐 물
거품처럼 사라져 버리는 대신 온 정신으로 그것을 증폭시킴으로써 더욱
충일한 것이 되기를 바랐다. 그는 이 경지를 가리켜 ‘완성’이란 말로 표
현했다. ‘자신의 존재를 당당하게 즐길 줄 아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니
라는 것이다.
중국의 작가 임어당은 목매달아 죽은 큰딸의 자살을 지켜보아야 했
다. 작은딸이 아버지에게 물었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인생을 살되 즐기는 것 이외에 무엇이 있겠는가?”
아버지 임어당의 대답이었다.
손에 뚝뚝 단물이 흐르는 복숭아를 먹을 때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물소리, 이 또한 즐겁지 않으랴던 에피큐리언 임어당의 모습도 여기에
겹쳐진다.
그러나 이들의 행복찾기는 애초부터 맑은 하늘인 것은 아니었다. 오
랜 고뇌와 회의를 통과한 뒤에야 먹구름이 걷힌 하늘인 셈이었다.
몽테뉴를 짓눌렀던 먹구름은 독단론자들의 주장이었다. 몽테뉴가 목
격한 종교전쟁은 광신도들이 빚어낸 인간의 광기에 다름이 아니었다.
신교도(위그노파)와 구교도(가톨릭)들은 자신들의 진정성만을 고집하
는 오만한 독단론자들이었다. 그들이 진술하는 신, 우주, 영혼, 정신, 육
체 등 주요한 주제들에 대한 의견을 점검하며 몽테뉴는 그 가운데 절대
적 진리가 부재하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공허한 관념들
로 옥죄어 있는가? 우리를 짓누르는 편견과 독단, 이 허구로부터 풀려나
지 않는 한 인간은 사유와 창조의 자유를 누리지 못할 것이라고 내다본
몽테뉴는 지식에 관한 한 그 어떤 권위도 인정하지 않았다. 그의 비판적
성찰의 칼날은 회의주의로 향했다.
나는 무엇을 아는가? (Que Sais je?)
이 물음은 그의 영원한 화두로서 모든 것을 시험하고 검증한다는 회
의주의에 기울게 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책 제목을 ‘실험’ 또는 ‘시험’을
의미하는 ≪에세(essais)≫라고 붙인 것만 봐도 그의 의도를 짐작할 수
있다. 몽테뉴는 ‘피롱파’라 불리는 철학자들과 만난다. 그들은 어떤 종류
의 확실성도 인정하지 않으며 단정적으로 결론짓기를 거부하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회의주의자들이었다. 몽테뉴는 회의에 대해 “곧고 굽힘이
없는 판단의 자세”라고 정의하며 “모든 사물을 받아들이되 집착하지도
동의하지도 않는다.”라고 하였다. 모든 얽매임과 집착에서 놓여나는 자
유로움, 그의 회의가 가져다 준 선물은 해방과 자유였다. 저 맑은 하늘처
럼 평온한 마음의 상태를 가리켜 피롱파들은 ‘아타락시아’라 불렀는데
몽테뉴가 진술한 만년의 심경을 살펴보면 그의 경지가 바로 그런 것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 어디로 시선을 돌려 봐도 그 둘레에 하늘은 고요하고, 공기를 어지
럽히는 어떤 욕망도, 어떤 두려움이나 의심도, 또 과거와 현재의 어떤 어
려움도… 없는 그런 자리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신에게 고마운 일인지….
이미 어떤 욕망도, 두려움도, 의심도 없는 자리에 가 있다는 그가 해탈
한 어느 성자처럼 진정한 자유인으로 다가왔다.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마지막 지성소至聖所가 아니던가.
보르도 역 기차에서 내려 버스로 바꿔 탔다. 달리는 차창 밖으로 오
월의 훈풍은 가벼이 이마를 스치고, 눈은 구릉에 낮게 줄지어 선 포도나
무에 가 머문다. 여기가 포도주 고장이다. 포도주로 유명한 보르도에서
그의 증조부는 포도주 장사로 큰돈을 벌어 어느 몰락한 귀족으로부터
몽테뉴 성을 샀다. 몽테뉴는 이곳에서 명문 기엔 학교를 나왔으며 21세
에 판사가 되었고, 보르도 고등법원에서 퇴직할 때까지 16년 동안 판사
로 재직했다. 그가 판사직을 그만두고 이 몽테뉴 성으로 돌아온 것은
종교전쟁이라는 내란 때문이었다. 귀족의 신분이었던 그는 왕을 수행
하여 구교도로 참전했는가 하면 때로는 양 진영 사이에서 중재자의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이 전쟁은 무려 36년간이나 지속되었으며 몽
테뉴가 59세로 사망한 지 6년 뒤에야 끝이 났다. 그는 전쟁의 참혹 속에
서 비극을 목도하며 전쟁은 인간이 하는 것이고 문제가 있다면 바로
인간에게 있다. 인간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은 근본적으로 인간
자신과 관련되어 있으며 필경 인간의 문제로 귀착된다고 판단했다. 그
리고 두 번째 이유는 그에게 절대적 영향을 주었던 친구 라 보에티의
죽음(33세)이었다. 몽테뉴는 보르도 고등법원 재판관의 딸 프랑수아 드
라 샤세뉴(21세)와 결혼하여 여섯 명의 딸을 두었지만 불행하게도 한
명만 살아남고 모두 요절했다. 설상가상으로 그가 가장 존경해 마지않
는 아버지를 잃었다. 2년 뒤, 판사직을 내던졌다. 그리고 이 성으로 돌
아왔던 것이다. 자연히 그의 ≪에세≫의 주요 테마는 죽음과 고통에
관한 것이었다. 말년에 그를 괴롭히던 신장결석의 고통도 그를 죽음의
성찰로 이끌었다.
몽테뉴는 병세가 무거워짐에 따라서 자신은 벌써 그다지 인생의 즐거
움에 집착하지 않게 되었고 그 효용과 쾌미快味를 점차 잊어버리게 되었
으므로 전처럼 두렵지 않은 눈으로 죽음을 바라보고 있다면서 오히려
건강한 때가 병에 걸렸을 때보다 훨씬 병을 두려워하였다는 것을 알아
차리게 되었다고 언급했다. 막상 병에 걸려 보면 그렇게까지 괴로운 것
은 아니라며 죽음도 이와 마찬가지였으면 한다는 것이다. 두렵지 않은
눈으로 죽음을 바라보고 있다는 그를 떠올리며 종국엔 나도 그렇게 되
어야 할 텐데….라는 생각을 이어가며 흔들리는 버스에 앉아 있었다.
보르도에서 60킬로쯤이나 더 달렸을까, 우리는 몽테뉴 성 앞에 다다
랐다. 사진에서 본 그대로 청회색 지붕을 얹은 우뚝 솟은 성채가 눈앞에
들어왔다. 가슴이 뛰었다. 높이 7-8미터의 성벽을 둘러친 몽테뉴 성
정면 입구에 안채와 격리된 3층짜리 탑이 보였다. 서재가 있다는 그 유
명한 탑이다. ≪에세≫가 쓰인 탑, 산실의 현장을 향해 두근거리는 가슴
을 안고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널찍한 안뜰이 나왔다. 성관은 이 안뜰을
에워싸고 사방에 흩어진 형태를 취하고 있다. 탑을 빙 돌아가니 중문이
있었고 그 중문을 들어서니 탑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우리가 관람할
수 있는 것은 탑만이다. 그의 가족이 거처할 당시 안뜰 구석에 주방을
중심으로 네댓 개의 방이 있었는데 모든 방들은 커다랗고 단조로운 네
모꼴로 나뉘어 있었다고 한다. 안내자는 유감스럽게도 지금은 안채가
남의 손에 넘어가 관람할 수 없다고 한다.
우리는 조심스레 육중한 문을 밀고 탑 안으로 들어섰다. 1층은 예배실
이었다. ‘직경 열여섯 걸음’ 정도의 작은 공간이다. 허옇게 덧칠을 해 놓
은 사방 벽면은 무슨 그림인지 알 수 없었고 다만 움푹 들어간 정면의
감실監室 안쪽 벽에 흐릿하게나마 프레스코화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중
앙에는 한 손으로 창을 높이 치켜들고, 다른 손에는 십자 방패를 든 성
미카엘 대천사의 모습이, 그리고 좌우에는 클로버 문양에 사자 발을 그
려 넣은 몽테뉴 가문의 문장紋章이 새겨져 있었다. 제단에는 작은 십자
가상과 촛대가 놓여 있을 뿐, 예배실은 소박했다.
입구 쪽 천장에 조그만 구멍이 나 있었다. 우리가 의아해하자 안내자
는 그가 만년에 기동이 어려울 때, 2층 침실에서 그 구멍을 통해 아래층
의 예배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한 사람이 겨우 빠져나갈 만큼 좁은 나선
형의 통로를 통해 우리는 2층 침실로 올라갔다. 첫눈에 띈 것은 한쪽
구석에 놓인 묵직한 철궤였다. 몽테뉴는 ≪에세≫ 초판을 출간한 뒤 독
일, 스위스, 이탈리아 등지를 여행하면서 각 지방의 풍물과 풍습을 관찰
하여 기록해 두었는데 이 ≪여행기≫의 원고는 생전에 출판되지 못하다
가 18세기에 이르러 성을 수리하던 중 이 궤짝이 발견되어 그 속에 들어
있던 원고가 빛을 보게 되었다고 한다.
이 책 속에는 “여행은 유익한 수양이다. 영혼은 미지의 새로운 것에
눈을 뜨고 부단한 훈련을 받는다. (…) 우리 인간의 본성이 정말 끊임없
이 다양한 형태로 변하는 것을 맛보는 것 이상으로 좋은 학교는 없다.”라
는 구절도 들어 있으리라.
3층의 서재로 들어섰다. 몽테뉴는 3층에 있는 자신의 서재를 이렇게
묘사했다.
이 서재의 형태는 둥글고, 판판한 곳이라고는 탁자와 의자가 있는 곳
뿐이다. 내 자리부터 둥글게 되어있기 때문에, 나를 둘러싸고 다섯 단으
로 늘어놓은 책들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다. 서재는 3면으로 시야가 트
여있고, 실내에는 직경이 열여섯 걸음 되는 공간이 있다. 겨울에는 여기
에 너무 오래 있지 못한다. 내 집은 그 이름이 말해주듯 산 위에 세워져
있어서, 여기보다 바람이 심한 곳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치가 외떨
어져 있어서 찾아오기도 힘들고 사람들의 소란도 물리쳐주고 글을 읽기
에도 효과적이기 때문에 더욱더 내 마음에 든다. 여기가 내 거처다.
그러나 다만 천여 권의 책이 꽂혀 있었다는 책장은 없고 책장을 스케
치한 그림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안내자의 설명에 따라 빈 공간에
탁자를 놓아보니 뒷짐 지고 왔다 갔다 하며 구술하는 몽테뉴의 모습이
그려졌고 그것을 받아 적었다는 하인의 모습도 보이는 듯했다. 예전에
는 건초를 쌓아두었던 헛간이라고 한다. 이 차디찬 돌바닥에서 어떻게
추운겨울을 지냈을까. 그러나 몽테뉴는 이 서재를 세상에서 둘도 없는
나만의 공간으로 여겼다.
나는 그곳을 완전히 지배하고, 이 좁은 장소 한 곳만은 아내와 자식,
공적인 공동생활로부터 지키고자 노력하고 있다. 다른 곳에서 나의 지
위는 단지 명목상의 것이고 실제로는 애매하다. 내 생각으로는, 자신의
집에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자신에게만 소용이 있으며 자신을 숨길
수 있는 장소를 갖지 않는 사람은 비참하다.
그가 성 안에서도 외떨어진 탑 속에서 하루 종일 혼자 지낸 것은 당시
생활상에 비추어 보면 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것은 그의 평탄치 못
한 결혼생활에서 기인된 것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고독 속에서 자신
과 대화하는 것이야말로 참된 자유라고 생각한 몽테뉴가 ‘다른 어떤 것
과의 교류도 존재하지 않는’ 고독한 상태에 있기를 스스로 원했기 때문
일 것이다.
‘내가 고독을 좋아하고 이를 설교함은 주로 나의 감정과 사상을 나
자신에게 집중하기 위해서이며, 나의 걸음을 제한, 억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의 욕망과 심로心勞를 제한, 억제하기 위해서’라고 그가 <고독
에 관하여> 글을 썼던 곳도 이곳이려니 하고 사방을 둘러본다. 나의 욕
망과 심로를 제한하고 억제하기 위해서 고독을 좋아한다는 그가 왠지
묵언 수행자처럼 생각되었다. 고독해져야 비로소 욕망과 심로를 억제할
수 있다는 인간적인 시인도 나 같은 사람에게는 퍽 반가웠다. 아마 이런
이유 때문에도 그에게 친근한 감정을 갖게 된 것이 아닌가 한다. 이런저
런 생각을 하며 사방과 천장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천장에는 두 개의
도리 및 그것과 교차하는 45개의 들보가 가로질러 있고 거기에 몽테뉴가
직접 책에서 골라 적은 57개의 경구 중 테렌티우스의 ‘내가 인간이라면
인간과 관련된 것은 어느 것도 나와 무관하지 않다.’고 한 것도 있으려
니, 그리고 ‘나는 판단을 삼간다.’는 말도 어딘가에 있으리라. 그가 이
라틴어 경구를 불어로 번역한 ‘끄세쥬(Que Sais-je?)나는 무엇을 아는가?’
도 어딘가에 있을 텐데, 목을 젖히고 어림짐작으로 눈길을 보내본다.
이 좁은 공간에서 그것도 400년 전 사람인, 중간 키에도 미치지 못하는
이 고매한 명상가의 숨결을, 그의 높은 정신을 더듬고 있었다.
서재에 딸린 조그만 방으로 가서 그의 시선인 양 창문을 통해 밖을
내려다보니 아름드리나무 사이로 안마당과 성채의 일부가 보인다. 그리
고 멀리 숲과 포도밭 구릉이 물결친다. 서재에 없는 벽난로가 이 방에만
있는 것이 좀 특이해서 물었다. 난로의 불똥이 튀어 책이 화재를 입을까
염려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일천 권의 장서는 당시로서는 상당한 양
이었고 그 중에는 친구 라 보에티가 남긴 것도 꽤 있었다고 하니 그것을
염려한 때문이리라.
벽난로 위에는 원래 한 쌍을 이루는 라틴어 명문이 있었다고 한다.
그중 하나는 라 보에티에게 바치는 헌사이고 또 하나는 가히 몽테뉴의
‘귀거래사歸去來辭’라고 할 만한 것이었다.
서력기원 1571년 2월 28일, 미카엘 몬타누스는 서른여덟 번째 생일을
맞이하여, 이미 오래전부터 궁정에서의 굴종과 공직의 부담에 지친 나
머지, 절반도 채 안 남은 여생을 박식한 처녀의 품에서 아무런 근심 없이
평온하고 자유롭게 보내기 위해 이곳에 돌아왔다. 원컨대 운명이 그로
하여금,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이 성을 수리하고, 그리하여 자유롭고
조용하고 한가로운 삶을 누릴 수 있게 해 주기를 바란다.
이 글귀에서 보듯이 몽테뉴가 판사직을 버리고 성에 칩거한 것은 법
관생활이나 궁정의 암투에 대한 환멸과, 계속되는 전란으로부터 벗어나
쉬고 싶은 심정이 간절했기 때문이리라. 처음부터 글을 쓰려고 은퇴한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그의 말에 의하면 글을 쓰게 된 것은 순전히 그의
기질에서 비롯된 엉뚱한 시도라고 했다. 이렇다 할 글감이라고는 없었
으므로 ‘자신을 소재로 하여’ 글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1572년부터
74년까지 쓴 글은 주로 그리스, 로마의 고전을 기둥으로 삼아 거기에
나름대로 논평을 덧붙인 정도에 머물렀고 1578년부터 1580년에 걸친 에
세이에서는 자신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그 ‘자신의 탐구’야말로 몽테
뉴가 그토록 존경했던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을 그대로
실천한 것이었다. 몽테뉴는 성에 은거하면서 끊임없이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고 그 결과를 ≪에세≫에 기록해 나갔던 것이다.
1580년 두 권으로 출판된 ≪에세≫는 초판을 찍은 후 5판을 거듭했고
17세기에도 꾸준히 개정판이 나와 1603년에는 영국에서 번역판이 출간
되었는데, 그때 베이컨이 ≪에세≫를 읽고는 제목까지 똑같이 딴 ≪에
세이≫(불어의 essais를 영어로 번역한 것이 essay이다.)를 펴낸 것이 오
늘날 우리가 서양의 수필을 ‘에세이’라고 부르게 된 연유이다.
1587년에는 초판을 대폭 수정, 증보하여 세 권으로 된 ≪에세≫를 펴
냈고 그는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자신의 책을 수정하고 보완하는 일에
매달렸다. 임종 시 그의 책상 위에는 여섯 번째 중판을 준비하던 1588년
판본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고 한다. 지금 눈앞의 책상 위에도 ≪에세≫
한 권이 펼쳐져 있다. 그 속에는 “내가 책을 만든 것이 아니라 내 책이
나를 만들었다.”라는 그의 유명한 말도 적혀 있을 것이다.
그의 숨결이 남아 있는 듯해, 방을 다시 한 번 돌아보고 탑에서 빠져나
오니 시간은 어느새 오후 세 시가 가까웠다. 서둘러 보르도 시내에 있다
는 아키텐 박물관으로 향했다. 오로지 그의 무덤을 보기 위해서였다.
발소리를 낮추며 조명이 어두운 실내로 들어섰다. 높다란 침상에 한 남
자가 반듯하게 누워있었다. 합장하듯 두 손을 가슴에 모우고, 그것은
토기로 빚은 그의 인물 모형이었다. 침상 밑에는 정교하게 조각된 석관
이 보였다. 로마 귀족들이 연회 때, 해골을 보며 죽음을 상기했다고 하듯
석관 위에서 우리를 빤히 바라보는 해골도 우리에게 그것을 일깨우려는
것처럼 보였다.
몽테뉴는 예측하지 않은 순식간에 찾아오는 죽음을 바랐다. 심지어
그것을 ‘이상적인 죽음’으로 생각했으며 멋진 죽음이란 ‘사람들에 둘러
싸여 임종을 맞는 것이 아니라 혼자 죽어가는 것’이며 자신이 꿈꾸는
죽음은 ‘내 집을 나가 내 식구들과 멀리 떨어져서 침대 위에서보다는
차라리 말 위에서 죽고 싶다.’고 했으나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그는 별
로 좋아하지 않는 가족들에게 둘러싸여 1592년 9월 13일 자신의 2층 침
실에서 후두염으로 사망했다. 죽기 며칠 전부터 몽테뉴는 설염을 앓아
말을 할 수 없었다. 자신의 사후 처리에 대해서는 마음대로 처리하라고
했다.
그는 사람들이 아직 멀쩡하게 살아있는 자신의 장례 순서와 명예를
미리부터 걱정하며 대리석으로 된 자신의 묘비를 보고 기뻐하는 모습,
장례를 어떻게 치러야 할지 갑론을박하는 모습을 보고 비웃었던 것이다.
그는 추도사도 준비하지 말라고 했다. 자신이 그 추도사를 들을 자격
이 없어서가 아니라 죽은 자신이 추도사를 들을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
그의 유언대로 장례식은 간단하게 치러졌다.
몽테뉴의 심장은 몽테뉴 성 근처에 있는 생 미셸 성당으로 옮겨졌는
데, 당시에는 심장을 따로 보관하는 것이 흔히 있는 일이었다. 이어서
몽테뉴의 아내는 남편의 시신을 보르도의 푀양회 수도원에 매장하려고
했으나 진취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몽테뉴의 유해를 성당이 아닌
보르도의 대학으로 옮기고자 했다.
그의 유해가 보르도 대학의 입구 홀에 놓여 있다가 이곳, 아키텐 박물
관으로 옮겨지게 된 연유는 알 수 없다. 파리의 소르본느 대학 앞에서도
명상에 잠겨 있는 그의 동상을 볼 수 있었다. 진리의 전당인 대학 앞에
세워진 그의 모습은 지성과 자유를 상징하는 높다란 깃발처럼 보였다.
그는 알고 있었을까? 사후의 명성 따위에 흔들리지 않을 사람이긴 하
지만. 그의 ≪에세≫는 1640년, 스페인에서 금서목록에 오른 데 이어
1676년에는 로마 가톨릭의 금서에 올랐다.
그가 죽고 나서 17세기에 들어와 회의주의는 가톨릭의 적으로 취급
되었고, 몽테뉴는 무신론자라는 비난을 면치 못했다. 파스칼은 몽테뉴
가 말한 ‘어리석은 시도’나 ‘죽음에 대한 신앙 없는 태도’를 보여 준 ≪에
세≫를 혼란스럽다고 비판했으며 파스칼만이 아니라 다른 여러 종교인
들도 그의 탄핵에 합세했던 것이다.
몽테뉴에 대한 가톨릭의 태도 변화는 루이 14세로 상징되는 프랑스의
보수성과도 연관되었다. 그 결과 1669년부터 1724년까지 55년간 ≪에세≫
는 프랑스에서 출판조차 될 수 없었다. 반면 영국에서는 1685년에 새로
운 영역판이 출판되었다. 그러나 18세기에 몽테뉴는 재발견되고 재해석
되었다. 반세기 동안 프랑스에서 출판되지 못한 ≪에세≫는 1724년 영
국에서 출판되어 프랑스로 들어왔다.
몽테뉴는 계몽주의의 선구자로 철학자라는 대접을 받게 되었고, 독일
의 헤르더(1744-1803)는 몽테뉴를 자연회귀를 주장한 사람으로 높이
평가했다. 19세기에 와서 영국의 비평가이자 수필가인 헤즐리트는 인간
으로서 느낀 점을 솔직하게 쓴 용기를 가진 최초의 인간으로 그를 숭상
했다. 독일의 니체는 몽테뉴의 문화상대주의와 ‘간결하고 발랄한 회의
주의’를 찬양하고, 프랑스의 빌레는 몽테뉴를 콩트 실증주의의 선구자로
평가했다.
이러한 사실을 아십니까? 몽테뉴 선생.
선생은 ≪에세≫로 프랑스에 모랄리스트의 전통을 구축하였을 뿐만
아니라 17세기 이래의 프랑스 문학, 유럽 각국의 문학에 큰 영향을 끼치
셨습니다. 인간이란 무엇이며 우리를 둘러싼 세계와 문화를 어떻게 인
식할 것인가를 성찰하는 데 크게 기여한 진정한 휴머니스트요, 무엇에
도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르네상스인, 무엇보다 우리에게 ‘에세이’를
선물한 최초의 에세이스트이신 선생께 충정어린 묵념을 바칩니다, 하고
거기 작은 키로 누워있는 동양의 현자와도 같은 사람 앞에서 나는 정중
히 머리를 숙였다.
근원도 없이 피어올랐다가 사라지는 한 조각 구름을 바라보며 죽음을
생각했던 시간들이 떠올랐다.
‘죽음은 살아있을 때나, 죽었을 때나 그대에게 관여치 않는다니…. 왜
냐하면 둘 다 그대의 것이 아니기 때문.’ 이런 조언을 아끼지 않은 죽음
의 대 명상가에게 나는 두 번째 예의를 표했다. 그리고 단 한 번뿐인
내 생애의 값진 순간, 그것에 감사하는 세 번째 합장례를 드렸다. 그것은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살아있다는 그것에 대해서였다.
맹난자 --------------------------------------------
≪에세이문학≫ 발행인, 한국수필문학진흥회 회장 역임 .
수필집: ≪빈 배에 가득한 달빛≫ ≪남산이 북산을 보며 웃네≫
≪삶을 원하거든 죽음을 기억하라≫ ≪라데팡스의 불빛≫ 외 다수.
현대수필문학상, 남촌문학상, 정경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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