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하면 나는 상허尙虛의 수필 <冊>을 생각한다.
“책만은 ‘책’보다 ‘冊’으로 쓰고 싶다. ‘ 책’보다 ‘冊’이 더 아름답고
더 책답다.”로 시작되는 이 글은 당시 중학생이던 나에게 적지 않은
감동을 안겨 주었다. 책을 여인의 아름다움에 비유하고 ‘세수할 줄 모
르는 미인’이라고 표현한 대목에선 엉뚱하게도 가슴까지 울렁거렸
다. 이 글은 나에게 ‘冊’이란 글자를 유심히 살피는 계기가 되었고 책
에 관한 나의 사상이라 할까 자세를 정립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
쳤다.
‘冊’자는 책 두 권을 나란히 세우고 끈으로 허리를 묶은 형상이다.
이 형상에서 나는 책이란, 갖는 면이나 읽는 면이나 다같이 복수 개념
이란 사실을 중요하게 본다. 소장한 책이나 독파한 책이 많으면 많을
수록 허리를 묶는 끈이 길면 길수록 책은‘더 아름답고 책답다.’는사
상이다.
책을 간수하는 요령도 나는 이 ‘冊’자 속에서 발견한다. 책은 뉘어
서 쌓아 올리게 되어 있지 않다. 세워서 꽂되 ‘冊’자 쓰기의 순서대로
왼편에서 바른편으로, 단이 있는 서가라면 윗단에서 아랫단으로 차근
차근 꽂아 나가는 것이다. 그래야만 허리를 묶는 끈의 존재 이유도 설
명이 되어진다.
책이 몇 권 되지 않을 때는 이를 아무렇게나 서가에 꽂아도 별 문제
가 없지만 어지간히 많아지면 그렇게 할 수 없다. 자연히 같은 주제별
로 유별로 끼리끼리 모아지게 된다. 여기서 나는 ‘冊’자의 허리를 묶
는 그 끈이 단순히 책의 넘어짐을 방지하는 물리적인 끈이 아님을 본
다. 한 주제를 정립하고, 사상을 엮고, 서정을 부추기는 생명의 끈으
로 피가 흐르고 있음을 듣는다.
‘책은 세수할 줄 모르는 미인이다.’책은 꾸미지 않는 미인처럼 아
름답고 착하고 참된 위안을 변함없이 안겨준다는 뜻일까. 그러나 나
는 미인이 세수를 안 하고도 계속 미인일 수 있기 위해서는 그럴 필요
가 없을 만큼 항상 몸가짐을 깨끗이 해야 한다는 뜻도 함께 읽었다. 책
에 관한 나의 유별난 청결 사상은 바로 여기에서 출발한 셈이다.
나의 이 같은 사상은 한 지물포에서 우연히 유산지硫酸紙를 만나게
된다. 매끌매끌한 반투명의 얇다란 종이다. 물과 기름에도 곧잘 견디
어낸다. 나는 이 종이로 책만 사면 그 표지 겉을 아예 도배질했다. 서
툰 솜씨여서 걸핏하면 울고 떼어서 붙이려면 속종이가 물고 늘어지는
짜증나는 회오리를 겪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세수할 줄 모르는 미
인’에 대한 나의 지극한 짝사랑으로 흐뭇하게 회억된다.
책에 대한 나의 결벽증은 거기에서 머물지 않는다. 책이란 책은 내
것 네 것 없이 모조리 겉을 싸고 본다. 보다가 쉬게 될 경우도 책을 편
채 엎어놓거나 읽던 쪽을 접어서 흠을 내는 일은 결코 하지 않는다. 반
드시 쪽꽂이나 명함 종이 같은 것을 갈피에 끼우고 바르게 덮어 두었
다가 다시 펴 든다. 책을 읽으면서도 함부로 줄을 치거나 행간이나 여
백에 메모를 하지 않는다. 꼭 필요할 경우는 반드시 연필을 사용하고
나중에 말끔히 지운다. 오죽하면 한 학기나 한 학년을 사용하는 교과
서까지도 소모품으로 다루지 못하는 얼간이가 되었을까.
그렇다고 전혀 예외가 없었던 건 아니다. 사촌형이 손진태孫晉泰
≪국사대요國史大要≫를 주면서 대입 준비를 재촉했다. 역사책치고
는 이해하기 쉬운 서술이었다. 그러나 개조식으로 정리해 보라는 형
의 권유에 따라 간단한 것은 해당 쪽의 상단 여백에, 복잡한 것은 부
전지를 붙여가면서까지 정성스레 간추렸다. 제법 공부한 기분이 났
다. 그러나 책은 배불뚝이가 되어 볼썽사납고 땟국이 줄줄 흐르는
‘추녀’로 바뀌어졌다. 그런데도 그 속에선‘세수할 줄 모르는 미인’
의 향기 같은 게 은은하게 풍겼다.
상허의 말대로 책을 “일생에 천 권을 빌려보고 구백구십구 권을 돌
려보내고 죽는다면 그는 최우등의 성적이다. 그러나 남은 한 권 때문
에 도적은 도적이다.”나도 이 도적 대열에 끼게 되었으니 어쩌면 좋
은가.
학교 도서관에서 일을 하다 보면 제일 골치 아픈 것이 망실 도서다.
미국 같은 나라에선 5퍼센트 정도는 인정하고 있다지만 우리나라에
선 아직 그만한 탄력이 없다. 어떻게 해서든지 보충하지 않으면 안 된
다. 나는 이 문제를 새로 책을 구입할 때마다 서점으로부터 기증을 받
는 형식으로 해결을 했다. 그런데 한참이나 지난 후에 뜻밖에 이런 책
들이 슬그머니 되돌아오는 경우가 있다. 새로 등록할 명분이 없는 복
권이 된 것이다. 이런 책들 중에서 내 도심盜心을 충족시켜 준 몇권의
책이 내 서가에서 마치 애첩愛妾처럼 사랑을 받고 있다. 과연 ‘도적이
란 책윤리冊倫理가 따로 있는 것’인가.
내 책을 빌려가서 돌려주지 않는 친구도 있다. 그러나 나는 차마 그
얘길 꺼낼 수가 없다. 언젠가는 돌려주겠거니 하는 기대가 끝내 무산
되면 오히려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영원히 노라가 되어버린 미인의 전
도를 빌고 만다. 나 개인만이라도 5퍼센트의 망실 도서에 대한 탄력을
유지한다면 멋있는 일이 아닌가.
세상은 많이 달라지고 있다. 숱한 책들이 날로 쏟아져서 무슨 책을
얼마나 골라야 할지 서성거려질 지경이다. 예쁘게 단장한 책표지들이
매끄럽고 눈부신 코팅으로 나의 유산지에 얽힌 옛정을 애련하게 바라
본다.
나는 책을 좋아하고 사랑한다.‘ 冊’자가 상징하는 복수성複數性을
한없이 추구하고 싶다. ‘ 세수할 줄 모르는 미인’들과 화장기 없는
서정을 나누고 싶다. 그 체취만큼이나 싱싱한 사색의 향연을 즐기고
싶다.
아차! 나도 그런 ‘冊’을 펴낼 수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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