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호형선생을 뵐때마다 애정과 에너지가 넘치시는 분이라고 생각이 들었는데, 평론을 읽으면서 더욱 확신이 듭니다.
다음에 강호형선생과 만날 날의 즐거움을 생각해봅니다.
서사구조로 직조된 인간애, 그리고 해학성
- 강호형 ≪정류장에서≫를 중심으로
1. 서론
수필은 인간의 삶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진다. 글쓰기의 본향은 삶을
가꾸는 데 초점이 모아져야 하고, 삶을 가꾸는 수필 작업은 문학을 이상
으로 삼을 때라야 현대인의 욕구뿐만 아니라 문학의 본령에 다다르게
된다. 이는 문학이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는 의미다.
또한 수필은 인간의 내면성을 강조한다. 그 이유는 인간 본질 자체의
속성이 인간 내면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수필 속의 모든
재료는 인간의 상관물이며 인간 자신이 투영되어 있다. 작가의 일상적
그림자가 소상히 드리워지는가 하면 정서를 움직이는 그리움과 기다림
이 녹아 있다. 또한 분노를 풀어 헤치는 지혜가 있고 패배를 딛고 일어서
는 용기와 절망을 이겨내는 희망도 있다.
강호형의 수필에는 이러한 가치를 구현해 내는 근원의 힘이 내포되어
있다. 그의 글맛은 거창한 주제나 경이로운 소재에 있지 않고 화려한
문장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저 대상을 너그럽게 바라보는 관조의 눈
속에 있으며 가슴속 깊은 곳에 쟁여 있는 인간애가 독자의 눈을 자극하
면서 완성되는 데 있다. 이는 남다른 통찰력으로 자신의 심미적 안목을
드러냄이다.
≪정류장에서≫는 4부로 나눠져 있다. 1부에는 가족에 대한 이야기가,
2부와 4부에서는 대체로 이웃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3부에서는 자신
의 어릴 적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결국 휴머니즘을 축으로 하는 아름
다움을 주제와 결부시켜 잘 관조해 내었고, 이야기 자체가 사실적이며
문장에서의 표현도 거침이 없다. 나아가서는 반전을 적용하여 강조성을
나타내는 특징을 보이기도 한다.
2. 서사구조 속의 감동
수필은 사실을 바탕으로 하나 그것을 문학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니만
큼 일상의 삶을 문학적으로 승화시키는 일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제재
의 다양성을 그려내는 특성을 지닌 수필의 세계는 주로 일상이다. 그
중에서도 주를 이루는 것은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수필을 그리고자 함
에 있어 가장 먼저 사람을 생각한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그것은 사람을 통해 배우기도 하고 반성하기도 하며 사람답게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하기 때문이다.
강호형의 수필 역시 사람들의 이야기를 사실적으로 그려 놓았다. 그
가 서사구조에 의한 수법을 택한 이유는 수필의 건조성으로 인해 독자
들이 읽는 재미를 박탈한다는 사실을 직시한 데에 있다. 또한 그는 표현
이 미숙하거나 분식이 지나칠 때에도 읽는 재미가 없다는 것을 간파하
였다. 그래서 자신이 나타내고자 하는 메시지를 가장 잘 소화할 수 있는
기법을 선택함에 있어 서사적 수법을 취한 것이다. 서사구조는 의미화
의 부재로 인해 문학성의 악화를 초래하기도 하지만 쉽게 읽혀진다는
것에 대한 장점이 있는 까닭이다.
궁즉통이라던가, 마침내 동지 하나가 나타나기는 했다. 그러나 그 절
망적인 상황에서 만나게 된 동지는 너무나도 어렸다. 버스 앞쪽 의자
옆구리에 기대섰던 예의 열 살 남짓한 소년과 눈길이 부딪쳤던 것이다.
분노에 찬 두 눈과 꼭 다문 입이 금방이라도 덤벼들 듯한 기세로 그
대낮의 무법자를 노려보던 소년-그도 의협심과 무력감의 틈바구니에
서 심한 갈등에 시달리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러고 보니 소년은 주먹도
불끈 쥐고 있었는데, 야멸찬 표정이며 그 앙증맞은 주먹이 경황 중에도
웃음이 날 지경이었다. 그렇게 잔뜩 노려보던 소년은, 그러나 나와 시선
이 마주치는 순간 반짝 하는 눈빛 한 줄기를 보내고는 이내 울상이 되어
애원하듯 나를 채근하지 않는가. 말을 하지는 않았고, 말을 할 수도 없
는 상황이었지만 나는 소년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지금까지 나를 괴롭히고 있던 무력감, 열패감, 그리하여 더러
운 이기심에 안주하려던 자신에 대한 혐오감을 도저히 더 견딜 수가
없었다.
-<소년> 중에서
강호형은 강도행각이 벌어지고 있는 버스 속 상황에서 한 어린 소년
으로 하여금 생각을 바꾸고 행동을 불사하게 된다. 좌석을 다 메운 승객
들은 한결같이 “숨이라도 크게 쉬면 화가 곧 자신에게 돌아올”까 두려워
불의에 대해 철저한 방관자가 되고 있다. 그러나 그는 “평소에 혈압을
걱정하는 일이 없었는데도” 웬일인지 모르게 “목 뒤가 뻣뻣해지는 것을
느”끼고, “목이 타고 가슴속에서는 걷잡을 수 없는 방망이질”이 멈추지
않는다. 이는 일말의 정의감과 양심이 살아있다는 증거다. 까닭에 그는
무법자를 밀어 붙이는 책략을 강구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곧 이 모든
것을 여남은 살 먹은 어린아이로부터 전달받은 정의감이라고 고백한다.
자기 낮춤으로 해서 돋보이는 아름다운 정신이다. 작가의 마음으로 하
여금 독자를 포용하게 되는 넓은 공간이자 부피이다. 이야기를 듣던 아
내와 딸의 대경실색에도 의연할 수 있었던 것 또한, 현대인들의 특징적
인 “무력감과 열패감”, 그리고 “더러운 이기심”으로부터 탈피할 수 있었
기 때문이다.
<소년>은 어떤 사실을 단순히 전하는 데서 끝나는 이야기가 아니다.
사건이 갖는 의미를 보다 심화해서 진정한 의미의 폭을 확장하는 데 가
치를 두고 있다. 또한 다루고자 하는 것이 대상에만 국한되지 않고 체험
에도 비중을 두어 정의감을 각인시킨다. 서사구조를 통한 공감대 형성
과 극적효과의 연출이 돋보인다.
3. 애주가의 절개와 그 해학
음주는 정신적인 자유를 가져다준다. 취한 상태에서는 일종의 만족감
과 자유로움을 느낀다. 정신적인 환락 상태에서 자연이나 생명, 인생,
사회에 대한 느낌과 깨달음을 완성하게도 된다. ‘석 잔이면 큰 도가 통하
고 한 말이면 자연과 합쳐진다(三杯通大道, 一斗合自然).’는 이백의 ‘독작’이
증명이라도 하듯 만구를 무언케 한다. 술에 취한 상태에서 주체와 객체
가 하나 되어 몰아일체의 경지에 들기도 하고, 세속에 구애받지 않으며,
내재적인 정신에 의탁하여 고도의 철학적 깨달음을 얻기도 한다. 그래
서 사람들은 술을 좋아하게 되고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강호형의 술에 대한 사랑은 남다르다. 그는 인생의 희로애락을 술과
함께 하였고 술을 통해 자신의 감정과 감흥을 극대화하여 문학작품으로
승화시켰다. 술은 그의 생활과 떼려야 뗄 수없는 필수품이 되었다.
나는 할아버지 진상 머리에서, 할아버지가 손자 사랑 겸 주도 훈육酒
道 訓育의 일환으로 한 모금씩 하사하시는 그 술 맛에 이미 길이 들어
있었을 뿐 아니라, 날이 갈수록 그 양이 너무 적게 느껴져서 감질이 나던
터였으므로 모처럼 갈증을 풀 호기를 잡은 셈이었다. 얼마나 퍼 마셨던
지는 기억에 없다. 술독을 덮어 놓고 돌아서는 순간 방바닥이 불끈 솟구
쳐 올라 내 이마에 와 부딪쳐 쓰러졌고 일어서 보려고 안간힘을 쓸 때마
다 방바닥이 요동을 치는 그 요술나라 같은 방에서 몇 번 더 코방아를
찧다가 정신을 잃었던 기억뿐이다. 그만하면 어지간히 혼이 난 셈인데
도 정나미가 떨어지기는커녕 갈수록 맛을 들여, 60년을 한결같이 마셔
왔으니 그걸로만 따지자면 무애无涯 선생에 뒤질 것도 없다는 생각인
것이다.
-<주노설酒奴說> 중에서
강호형의 주량은 이백과 버금가며 “수주樹州, 무애无涯, 신곡新谷 선생”
과 어깨를 겨루는 대주객이다. 그의 작품 중 술을 소재로 한 여타 작품들
을 살펴보면 그는 대작할 상대 없이 혼자서 사색에 잠기거나 고민을 해
소하는 독음獨飮을 즐기는가 하면, 유쾌한 분위기에서 친구들과 교제를
이루는 회음會飮도 좋아한다.
그는 술을 통해 미물에 불과한 인간존재에 대한 무상함을 생각하고,
득의했을 때의 즐거움에 만끽한다. 폄적으로 인한 근심을 해소하기도
하고, 인생의 부침浮沈과 사상적 굴곡에 의한 삶의 노래를 듣는다. 술을
마시면서 한없이 흘러가는 세월 앞에서 무기력한 인간의 모습을 발견하
기도 하고, 술에 취하면서 탈피하기 어려운 속세의 굴레를 벗어나는 자
유인이 되기도 한다. 결국 그가 애주가가 된 동기는 술을 떼지 못하는
연유가 된다. 술에 대해 지독한 절개를 지키다가 그만 주노酒奴가 되고
말았다는 너스레에서 해학성을 발견할 수 있다.
비록 주노가 되었을지라도 그에게 있어 술은 정신을 흐리게 하거나
판단력을 잃게 하는 법이 없다. 오히려 진솔한 속마음과 울음과 웃음을
자유분방케 해 주는 촉매제로 작용한다. 따라서 그는 창작할 때도 술의
힘을 빌리는 까닭에 음주에 대한 예찬론을 설파하는 것이다. <주노설>
은 술을 마시지 못하는 사람도, 술에 대해 아는 바가 없는 사람도, 술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까지도 잠시나마 풍류객으로 만든다. 만연체의 문장
인데도 불구하고 물 흐르듯 웃음이 있고 흥이 있다.
4. 수필의 본령, 인간사랑
훌륭한 수필은 독자의 가슴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
힘은 인간을 이해하고, 이해의 범위를 확충하려는 노력에 의해 얻어진
다. 이는 평소 마음에 녹아있는 인간에 대한 정이 두텁지 않으면 어려운
일이다. 더구나 눈에 보인다고 모든 것이 지각되고 인식되는 것이 아니
기 때문에 관심과 애정이 두터워야만 한다.
강호형은 누군가를 위한 희생과 남을 위한 거룩한 인간의 본성을 작
품 속에 용해시킴으로써 인간적 체취를 승화시켜 나가고 있다. 삶을 새
로운 감동으로 발아시켜 내고자 하는 그의 수필 행위는 사람을 향한 애
틋함을 문학적으로 그려내는 일이다. 여기에는 반드시 그가 삶의 가치
나 의미에 대해 따뜻한 시선과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의 따스
한 시선과 마음은 문학으로서 형식미나 정서적 표현을 떠나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수필이 정의 문학이라는 속성에 값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소주 한 병을 다 마셨는데도 아이들은 여전히 기다리고만 있다. 과한
줄 알면서도 한 병을 더 시킨다. 나의 거동이 이상했던지 주모가 포장을
들치고 밖을 내다보더니 낭패한 표정이 되어 뭐라고 아이 이름을 부른다.
-중략-
똑똑하게 생긴 아이들이었다. 두 아이가 “고맙습니다.”를 합창하고는
더운 김을 후후 불어내며 그것을 먹고 있을 때 버스가 와 닿고 이어
큼직한 고무 함지박을 든 여인 하나가 내렸다.
“엄마다!”
두 아이가 동시에 소리치며 내닫는데 그 소리가 얼마나 생기가 있고
신선했던지, 잠시 이런저런 상념에 빠져 있던 나까지 정신이 들었다.
-<정류장에서> 중에서
강호형은 포장마차에서 독작을 즐기며 정류장 풍경에 눈을 판다. 결
국 파란 우산 속에 쪼그리고 앉아 누군가를 기다리는 어린 아이들을 발
견한다. 몇 대의 버스가 지나가도 아이들이 맞이할 사람이 나타나지 않
자 ‘누구일까?’를 유발하며 독자와의 동행을 유도한다. 그는 두 아이의
아버지가 “암을 앓다가 가산마저 탕진하고” 삶을 마감했다는 이야기에
마음이 무겁고 아프다. 그래서 “술기운이 꽤 올랐는데도” 자리를 뜨지
못하고 있다. 그는 분명 생계유지를 위해 장사 나간 엄마와 그 엄마를
기다리는 아이들의 행복을 빌었을 것이다.
<정류장에서>는 화자의 진솔한 소망과 함께 삶에 대한 의미를 다독이
는 존재의식의 천착이 엿보인다. 내가 사랑하고 아끼는 것을 타인과 같
이 공유할 수 있는 마음, 그 속에 정이 있다는 통찰을 통해 이상과 현실
의 부조화를 통합한다. 작가의 그 예지는 독자의 메마른 공명상자를 울
리기에 손색이 없다. 다만 아이들의 엄마를 지칭하는 “여인 하나”는 ‘여
인이’라고 표현해야 함이 옳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가마우지>를 통해서 들려주려는 요지는 힘든 가장들을
향한 애정이다. “아내에게 충성하고 자식에게 효도하려고 오늘도 ‘바람
부는 바다’로 나가는 ‘가마우지’들에게 축복이 있을지어다!”라며 가장들
의 위한 최대의 주문을 선포한다. “고달프다고 뽑아 버릴 수없는 나무가
마누라”이며 “떼어 버릴 수 없이 갈수록 애틋해지는 열매가 자식”인지라
마음은 바빠지고 몸이 고달픈 가장들이지만 그래도 힘을 내자는 선창이
고 구호이며 외침이다.
강호형이 좋은 수필을 쓸 수 있는 일차적 관심사는 그가 말하고 싶어
하는 내용이다. ‘나’를 내세우기보다 ‘우리’를 먼저 생각하는 동양적 가치
관에서 보면 가마우지들은 이시대의 귀감이 되는 어른이요 아버지가 분
명하다.
5. 결론
강호형의 수필은 어떠한 사상이나 심중에 떠오르는 정서를 표현하기
위해서 쓴 글이 아니다. 그 안에 담겨져 있는 내용을 보다 맛깔나게 버무
리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쓸 것인가보다 무엇을 쓸 것인가에
더 중요성의 비중을 두었다고 하겠다.
강호형의 ≪정류장에서≫는 특히 사람들과의 인연의 끈이란 연결 고
리를 통해 삶과 실존의 의미를 확인하고 있다. 그는 항상 어느 정도 이격
의 거리에서 삶과 사람을 바라본다. 그리하여 수필을 통해 보이지 않는
인간의 내면을 육안으로 바라보면서 서사구조를 통해 근원적인 가치와
본질을 규명하고, 애주가로서의 절개를 노래하며 어떤 형태로든 삶을
견고히 구축해 나가려는 의지를 보여준다. 수필이라는 양식 안에 유한
적 존재로서 살아가는 삶에 대한 판단과 영원한 것에 대한 추구, 자기
삶의 성찰, 특히 인간애에 대한 인식을 녹여 놓았다.
그는 ≪정류장에서≫를 통해 삶의 애환 속에 묻어나는 질펀한 이야기
를 들려주는가 하면 뚝심을 보여주고, 사람에 대한 기억을 윤기 있게
터치함으로써 효과를 내기도 했다. 또한 그의 작품에는 시대적 현실이
반영된 아픔이 있는가 하면 인간을 인간다운 삶의 행복 속에 곱게 남겨
둘 수 있는 이데올로기를 제공해 주고 있다.
다만 전반적으로 살폈을 때 ≪정류장에서≫는 기억의 유추가 과다한
관계로 주제나 제재의 중복이 종종 발견되었다.
정여송 ----------------------------------------------------------------------
≪수필과비평≫ 등단. 부경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문학석사).
무원문학상 본상(2005). 신곡문학상 본상(2006)
한국문협, 부산문협, 부산가톨릭문협,수필과비평작가회의, 한국수필문학진흥회,
현대수필문학회 회원.
수필집: ≪힘쓰는 여자≫, ≪마중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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