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십여 년 전 외삼촌은 월남전에 참전하였다. 월남의 남쪽 나트랑 파견부대에서 의약품과 생필품을 보급하는 수송부대에서 근무하셨다. 타국에서 보내오는 안부 편지에 어머니의 마음을 정성들여 대필하고 답장을 써 보냈다. 한참 서신이 끊겨 부모님이 매우 걱정하던 때에 삼촌은 귀국하였다.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겼다는 일화에 가족들은 부둥켜 안고 울었다. 조카들에게 번쩍거리는 연필깎이와 연필을 주었다. 손잡이를 돌리며 몽당연필을 깎고 자랑하던 그 시절이 세월의 강 너머에 오롯이 머문다."
비밀의 정원 - 이정자
일상의 탈출을 꿈꾸며 고대하는 날이다. 어머니께서 젊은 시절 외출복으로 아껴 입었던 월남치마의 매력을 떠올리며 자매들은 여행지를 선정하였다. 패키지여행이라 두려움이 앞서지만 야무진 막내가 국제 가이드 역할을 자청하여 나선다. 여명이 드리운 인천 국제공항에 노란 풍선을 띄운다. 창공을 날아가는 창가 너머에 눈부신 태양이 황홀하다.
네 시간여의 비행으로 베트남 하노이 공항에 안착하여 둘러본다. 현지 가이드를 만나 일정을 안내 받으며 바딘 광장으로 향한다. 베트남 영웅 호찌민 주석 관저와 청사 건물들이 우뚝 솟아 있다. 사방이 깔끔하고 단정한 노란색이다. 이곳에서의 노란색은 황금을 뜻하며 부를 상징한다니 점점 솔깃해진다. 여행 오기 전 호찌민 주석 시신을 관람할 수 있다는 말에 참배하고 싶었다. 9월부터 3개월 동안 방부처리 기간으로 출장 다녀온다는 해설에 아쉬움이 남는다. 사후에도 영원한 영접을 받으며 추앙받고 있는 것이 놀랍다. 부정부패에 앞장선 지도자의 검소함이 곳곳에 남아있어 숙연해지는 광장 거리이다.
관광용 경차를 타고 전통거리와 시장 구경을 한다. 시민들이 좁은 도로에 자전거를 타거나 오토바이를 타고 질주하지만 질서 정연함이 놀랍다. 세월의 더께를 고스란히 간직한 건물 지붕에 날아온 식물이 자생하고 있다. 행인들도 검소한 차림이다. 넓은 도로에 큰 자동차가 없고 버스도 없어서 환경이 잘 보전되고 있다. 하노이 국립 역사박물관에서 베트남의 역사를 마음속 깊이 품어본다.
숙소가 있는 하롱베이로 향하며 9월 2일에 개통한 고속도로를 달린다. 96년간 프랑스의 지배를 받아 건물들이 프랑스풍이지만 집들은 규격화되어 사회주의 위엄이 서려 있다. 차창 너머 보이는 푸르른 평원은 커피와 노니, 바나나 농장이 펼쳐진다. 고깔 모양의 모자를 쓰고 일하는 여성들만 가끔 보인다. 전쟁 때문에 여성 인구가 많아 남성들은 대우받으며 살고 있지만 인구의 부조화가 안타까운 곳이다.
한참을 달려 목적지에 도착하자 커다란 극장 건물에서 명쾌한 소리가 흘러나온다. 그곳은 수상 인형극이 펼쳐지는 공연장이다. 벼농사를 주로 하는 농민들은 농한기가 되면 이웃들과 더불어 인형극놀이를 하며 교류한다. 경쾌하고 발랄한 노래에 맞춰 춤추는 인형들은 물고기와 뒤뚱거리는 오리들이다. 커다란 용이 나타나 마을의 안녕을 기원한다는 자막이 나온다. 인형극은 이 지역의 특색있는 문화로 발전시켜 관광객을 불러 모으고 있다. 흥겨운 가락에 피로가 풀린다.
첫날의 일정을 마무리하며 숙소인 리조트로 향한다. 수상 건물이지만 호수에 있는 궁전처럼 웅장하고 찬란하다. 커다란 크루즈 선박 분위기다. 여장을 풀고 자매들은 맥주에 수다를 안주 삼아 쌓인 회포를 풀어낸다. 식구가 많아 고생하던 시절의 아픔을 실타래처럼 풀어내는 힐링의 밤이다. “와 우리들 세상!” 막내가 언니의 살갗을 비비며 어리광을 부렸다.
하롱베이 선착장에서 유람선에 올랐다. 그림처럼 펼쳐진 천혜의 경관에 환호하며 만세를 부른다. 아득한 옛날 이곳에 외적이 침입했을 때 하늘에서 용이 내려와 폭풍우와 격랑을 일으켰다. 그때 용이 내뿜은 천둥과 벼락이 떨어져서 수천 개의 섬이 생겼다는 이야기를 가이드는 진지하게 이어간다. 올망졸망 3,000여 개의 섬들이 군락을 이루며 큰 섬은 1,960여 개나 된다. 파도와 갈매기 냄새가 없는 삼무의 신비로운 곳이다. 사자섬과 코끼리섬, 거북섬 등 해상의 동물원이다. 키스하는 형상의 섬은 베트남 지폐의 배경으로 멋지다. 관망하는 이의 마음에 따라 갖가지 형태로 보이는 자연의 오묘함은 보물이다. 보트를 타고 석회동굴을 지나 깊숙이 들어간다. 높은 절벽에서 내려오는 골드 원숭이들이 바나나 얻어먹을 때마다 재주를 부린다. 사람과 비슷한 아기를 보듬고 있어 사랑스럽고 귀엽다. 이들도 아파트에 살고 있다는 이야기에 층층이 구멍이 난 곳을 유심히 바라본다.
호수 같은 바다에서 점심 식사는 특별하다. 활어회에 싱싱한 특산물 새우와 조개류 만찬에 입이 호사한다. 동생이 <남행 열차>를 선창하며 흥을 돋우니 분위기가 무르익어 노래방 기기에 1달러씩 붙인다. 다섯 자매와 일행들이 손잡고 고향을 들어보며 친숙해진다.
하롱베이 최대의 케이블카를 타고 바다에 그림처럼 펼쳐진 섬들을 바라본다. 태풍이 불어도 변함없는 신비스러운 이곳은 조물주의 안식처일까. 비밀의 정원은 끝이 없다. 외국의 투자를 무조건 받아들이는 베트남의 열린 정책은 머지않아 지상낙원이 되리라는 기대를 해본다. 리조트에 돌아오니 현관 입구 무대에 멋진 악사들이 흥겨운 노래로 반겨준다. 숙소를 찾아온 손님들이 가방을 내려놓고 함께 어울린다. 언어는 달라도 표정은 명랑하다.
이른 시간 리조트 주변 산책을 하며 눈이 행복하다. 치솟는 분수대 앞에서 유별난 추억을 만들고 나선다. 서둘러 도착한 엔뜨 국립공원이다. 케이블카를 타고 왕스님 모신 신전을 둘러보며 소중한 인연에 가슴이 뜨거워진다. 구불구불 놓인 계단을 내려오니 규모가 큰 음식점 마당에 악사들이 연주한다. 서로 반기며 <아리랑> 노래에 저절로 손을 붙잡는다. 타국에서 함께한 동포의 눈빛이 애틋하여 울컥하는 순간이다.
하롱베이 여운을 남기고 하노이 중심부에 있는 롯데월드 65층 전망대로 올라간다. 하늘을 날아오르는 아찔함에 사방을 둘러보니 거대한 도시이다. 롯데타워 투명 유리판 바닥에 드러누워 미래의 세상을 그려본다.
하노이에서 유명한 ‘센 레스토랑’ 세계 각처에서 여행 온 사람들이 북적인다. 자연과 사람이 함께하는 울타리에 먹을거리 볼거리가 넘쳐난다. 경차를 타고 홋다이를 한 바퀴 돌며 야시장 풍경과 음식점의 속살을 엿본다. 커다란 호숫가에 총총한 별들이 쏟아진다. 반짝이는 추억을 건져내어 훌훌 털어보니 가족들 얼굴이 다가온다.
오십여 년 전 외삼촌은 월남전에 참전하였다. 월남의 남쪽 나트랑 파견부대에서 의약품과 생필품을 보급하는 수송부대에서 근무하셨다. 타국에서 보내오는 안부 편지에 어머니의 마음을 정성들여 대필하고 답장을 써 보냈다. 한참 서신이 끊겨 부모님이 매우 걱정하던 때에 삼촌은 귀국하였다.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겼다는 일화에 가족들은 부둥켜 안고 울었다. 조카들에게 번쩍거리는 연필깎이와 연필을 주었다. 손잡이를 돌리며 몽당연필을 깎고 자랑하던 그 시절이 세월의 강 너머에 오롯이 머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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