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눈빛과 마음, 말 한 마디가 얼음같이 차가운 불안 덩어리를 녹일 수 있을 것이다. 사랑이야말로 불안의 해결책이기에."
불안의 해결책 - 정찬경
환자들은 늘 불안하다. 진료는 어찌 보면 불안과의 싸움이다.
“이러다 실명하는 거 아니에요?”
“내 눈, 이거 평생 보고 살 수는 있는 거죠?”
진료실에서 눈의 건강에 조금이라도 문제가 있다는 소리를 들으면 흔히 이렇게들 묻곤 한다. 내가 보기엔 걱정할 만한 일이 아닌데도 그런 경우가 많다. 건강에 대한 불안, 없는 이가 있을까. 건강뿐이랴. 사람들의 마음에는 크든 작든 다양한 불안이 깔려있다. 인터넷에 떠도는 불확실한 정보도 불안을 가중시킨다.
안과에서는 그런 대표적인 질환이 녹내장과 황반변성이다. 녹내장은 시신경이 약해지는 병이다. 수백만 개의 시신경섬유 중 일부가 서서히 손실되고 그 약해진 부분의 시야가 손상된다. 점점 전체적인 시야가 좁아져 시력을 잃을 수도 있다. 그러나 심해질 때까지 자각증상이 별로 없어서 검진을 통해서 발견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차라리 모르고 살 때가 편했건만 여러 경로를 통해 이런 지식을 얻게 되어 자꾸 불안해지는 것이다.
황반변성은 망막 중에서도 초점을 맺는 중심부위인 황반의 노화가 오는 경우이다. 중심부의 흐림이나 상像이 불분명해지는 느낌이 올 수 있는데 확진을 위해서는 정밀한 검사가 필요하다. 이 질환 역시 자신도 모르게 서서히 온다고 알려졌기에 조금 침침하기만 해도 더럭 겁이 나는 것이다. ‘이러다 나에게도 그 무서운 황반변성이 오는 건 아닐까.’ 하고 말이다.
또 하나는 비문증이다. 눈앞에서 뭐가 떠다니거나 날아다닌다는 증세를 호소하는 분들이 꽤 많다. 눈을 공에 비유하면 공의 비어있는 부분에 떠다니는 부유물질이 비쳐 보이는 것이다. 이 역시 노화에 의해 생기는 것으로 눈의 안쪽 빈 공간의 ‘유리체’라는 조직 안에 잡다한 물질이 새로이 생겨나는 것이다. 드물게 망막박리라는 심각한 합병증을 유발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시력이나 눈의 건강에 별 위협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아무리 설명을 해주어도 환자들의 불안은 쉽게 가라앉지 않는다.
불안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우리는 세상에 태어난 그 순간부터 불안을 느끼는지도 모른다. 연약한 아기로 이 세상에 던져진 한 존재는 자신을 보호해줄 부모에게서 친밀한 몸과 마음의 접촉을 통한 사랑을 느끼며 그 불안을 그나마 이겨낸다. 이 시기에 이런 관계가 제대로 형성되지 않으면 분리불안장애나 또 다른 정신질환으로 이어질 수 있음은 잘 알려져 있다. 어른이 되어도 불안은 늘 우리를 쫓아다닌다. 건강, 일, 생활, 인간관계 등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끊이질 않는다.
중요한 일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거나 앞으로 잘 못해낼 것 같을 때 오는 불안감은 정말 클 것이다. 가장家長들이 많이 느끼는 불안이다. 전에 한 외과의사가 눈이 침침하다며 찾아와서 봐주었는데 당뇨병성 망막증이 있었다. 오래전 일이지만 그의 눈빛에서 느껴지던 불안감을 잊을 수 없다. 수술을 하며 살아가야 하는데 시력이 떨어지면 어떡하나 하는 불안감. 적절한 치료를 하면 실명을 막을 수 있고 직업수행에 별 문제가 없을 거라 위로의 말을 건넸지만 그의 떨리던 눈동자는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불안은 동병상련으로 많이 줄어들 수 있다. 의사들은 환자에게 “저도 이 약 먹고 살아요.” 한다든가 “저도 가끔 그런 증세가 있어요.”, 혹은 “그런 분들 정말 많아요.” 하는 말을 종종 해준다. 환자들은 자신만이 그런 어려움을 겪는 게 아니라는 사실에 적잖이 안도하게 되고 의사의 치료에도 순응하게 되어 경과도 호전되고 스트레스에서도 벗어나는 경우가 많다.
불안을 해소하는 데는 위로의 말을 해주며 함께 있어주는 것만큼 좋은게 없는 것 같다. 힘들거나 어려움이 있을 때 한 공간에 같이 있어주는 건 큰 위안이 된다. 가족은 늘 함께 있다. 그래서 가족이 그토록 소중한 것이다. 수술실에서도 환자들이 불안해하면 자주 말을 걸어줘야 한다. 혼자 고립되어 있지 않음을 느끼게 해야 한다. 가끔 손을 잡아주면 효과가 더욱 커서 불안이 가라앉고 호흡이나 심박동도 안정된다. 나를 돌보는 이가 곁에 있다는 사실이 주는 위로가 무척 큰 것임을 알 수 있다.
알랭 드 보통은 그의 저서 ≪불안≫에서 불안의 원인을 사랑의 결핍, 속물근성, 기대, 능력주의, 불확실성이라 말했다. 사랑의 결핍이 불안의 첫째가는 원인이라면 사랑이야말로 불안의 으뜸가는 해결책이 아닐까. 내게 닥쳐오는 사건이나 환경은 나만의 노력으로 해결해 나가기 어려운 요인들이지만 사랑만큼은 작게나마 행할 수 있다. 내 주위의 이들을 진심으로 아껴주고 위로하는 건 마음만 먹으면 조금씩은 실천할 수 있으므로. 사노라면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밖에 없는 크고 작은 불안을 극복하려면 서로 사랑하는 것이 가장 좋은 해결책 중의 하나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역시 사랑이 묘약이다.
나를 만나러 진료실을 찾는 많은 이들의 불안을 덜어주는 것, 그것이 나의 일이다. 그들의 불안으로 나 역시 힘들기도 하고 때론 그 불안을 해결해가며 함께 기뻐하기도 한다. 나 역시 종종 불안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 정체 모를 불안은 그림자처럼 내 삶을 따라다닌다. 책 속에 빠져들거나 글을 쓰면 불안을 잊게 된다. 불안 대신 행복감이 서서히 내 마음을 채운다. 그러고 보니 행복이란 ‘불안이 없는 마음’이 아닐까.
따뜻한 눈빛과 마음, 말 한 마디가 얼음같이 차가운 불안 덩어리를 녹일 수 있을 것이다. 사랑이야말로 불안의 해결책이기에.
'월간 수필과 비평 > 수필과비평 본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월간『수필과비평』[2019년 4월호, 통권210호 I 세상 마주보기] 어느 봄날의 기묘한 선행 - 하병주 (0) | 2019.05.30 |
---|---|
월간『수필과비평』[2019년 4월호, 통권210호 I 세상 마주보기] 좋은 추억 만들기 - 정호경 (0) | 2019.05.30 |
월간『수필과비평』[2019년 4월호, 통권210호 I 세상 마주보기] 옹기 항아리 - 장미자 (0) | 2019.05.29 |
월간『수필과비평』[2019년 4월호, 통권210호 I 세상 마주보기] 비밀의 정원 - 이정자 (0) | 2019.05.29 |
월간『수필과비평』[2019년 4월호, 통권210호 I 세상 마주보기] 미운 오리새끼 2 - 유인철 (0) | 2019.05.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