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있어 ‘뒷방 아제’의 이미지는 그날 이후 ‘행화촌 아제’로 바뀌었다."
행화촌 주막 - 구활
창랑에 낚시 넣고 조대에 앉았으니
낙조청강에 빗소리 더욱 좋다.
유지에 옥린을 꿰어 들고 행화촌에 가리라.
나는 이 시가 그냥 좋다. 해 질 무렵에 강물 위에 동그라미를 그리며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니 문득 살구꽃 피는 마을에 있는 주막에 가고 싶구나. 버들가지에 꿰어 온 고기를 주모에게 내어 준 후 막걸리 한 사발 들이켜며 열무김치 한 입 씹어보는 그 맛.
조선조 인종 때 대사헌에 올랐던 송인수(1499−1547)의 시다. 그는 벼슬자리에 있으면서 조정의 곳곳에 숨어 있는 간신배들을 대빗자루로 쓸어내는 개혁을 단행했다. 그러나 명종 원년 을사사화가 일어나면서 잔당들에게 역공을 당해 선영이 있는 청주로 낙향하여 두문불출로 세월을 보냈다. 이때 지은 시다. 그는 이 년 뒤 더 이상 행화촌에 나들이를 하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다. 임금이 간신들의 고자질에 홀딱 넘어가 사약을 내렸기 때문이다.
세버들 가지 꺾어 낚은 고기 꿰어 들고
주가를 찾으러 단교를 건너가니
온 골에 행화 져 쌓이니 갈 길 몰라 하노라
충절을 세워 청사를 빛낸 김상용, 김상헌 형제의 재종질인 김광욱의 시다. 선조 39년 문과에 급제한 후 벼슬이 형조판서를 거쳐 우참찬에 이르렀다. 용모와 행동이 단정하고 고아했으나 성격이 편협하여 교우가 넓지 못했다.
성리학의 태두인 회제 이언적과 퇴계 이황을 헐뜯는 당시의 실세 정인홍을 사정없이 몰아붙인 강직한 선비였다. 그가 환생하여 오늘을 살고 있다면 대통령들을 역사 속에서 삭제하는 등 과거를 부정하는 정권을 쥔 사람들이 많은 괴로움을 당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는 도연명을 사모하여 공명부귀를 물리치고 강호에 파묻혀 낚싯대를 들고 일렁이는 유유자적하는 삶을 살다 떠났다.
버들가지 꺾어 잡은 고기 꿰어 들고 허물어진 다리 건너 주막 찾아 나섰더니 살구 꽃잎이 함박눈처럼 쌓여 여기가 어딘지 주모가 기다리는 목로주점을 찾지 못하겠네. 참으로 감칠맛 나는 시다.
중국에선 유부녀가 외도하는 것을 ‘붉은 살구가 담장을 넘는다紅杏出墻.’고 표현하는데 우리 옛 선비들이 행화촌을 즐겨 찾았던 건 담장을 넘는 살구를 줍기 위함은 아닌 것 같다. 어쨌든 민물고기 조림 안주로 지는 해 배웅하는 석양주 한잔했으면 좋겠네. 정말 좋겠네.
내 고향에는 ‘뒷방 아제’라는 중학교 국어 선생이 살고 있었다. 인근 도시에 가족이 있다는 소문은 돌았으나 별 내왕은 없는 듯했다. 그는 학교에서 일찍 퇴근하는 날이면 대나무 낚싯대를 메고 강에서 피라미 낚시를 하여 다리 입구의 선술집에서 막걸리를 마시곤 했다.
비 오는 날이나 할 일이 없어 노는 날은 노래를 불렀다. <고향 생각>과 같은 고향을 그리워하는 노래인데 그는 고향이란 노랫말은 빼고 대신에 떠나버린 연인의 이름을 넣어 애달프게 부르곤 했다. “사랑하는 나의 혜련을 한 번 떠나 온 후에 날이 가고 달이 갈수록 내 맘속에 사무쳐 자나깨나 너의 생각 잊을 수가 없구나.”
‘뒷방 아제’는 술 취한 몸을 바지랑대가 서 있는 빨랫줄에 의지하여 흔들 흔들하면서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계속 불러댔다. 특히 비 오는 날은 햇빛도 들어오지 않는 뒷방에 앉아 염불 외듯 그 노래를 흥얼거렸다. 동네 사람들은 노랫소리가 들리기만 하면 “지랄하네, 또 병이 도졌네.” 하고 손가락질을 했지만 나는 잃어버린 사랑을 그리워하는 ‘뒷방 아제’가 너무 가련하여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혜련이가 미워지기도 했다.
대학 이학년 봄이었나. 열차에서 내려 방천 둑길을 따라 집으로 돌아오는데 낚싯대를 둘러메고 강으로 나가는 ‘뒷방 아제’를 만났다.
“고기 잡으러 가십니까?”
“그래, 맨날.”
오후의 햇살 속에 선연하게 드러나는 그의 걸음걸이는 슬픈 눈빛의 명배우 몽고메리 크리프트를 흉내 내는 듯 축 처진 어깨가 우수의 요령을 흔들며 지나가는 것 같았다. 그날 그가 걸어가는 둑길에는 살구꽃이 아닌 벚꽃들이 축구 경기장의 함성처럼 환하게 피어 있었다.
내게 있어 ‘뒷방 아제’의 이미지는 그날 이후 ‘행화촌 아제’로 바뀌었다.
청명날 보슬보슬 이슬비 내려
길을 가는 나그네 찢기는 마음
목동아 쉬어 갈 주막은 어디에
가리키는 멀리 살구꽃 마을
−‘두목杜牧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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