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가족 A형들은 차돌맹이 재질이고, AB형들은 그보다 무른 화강암이고, B형은 손만 대면 깨지는 푸석돌이다. 제아무리 강한 돌도 세월에는 못 이긴다. 차돌도 풍화작용으로 둥근 돌이 되겠지만, 그날을 기다리는 것이 백년하청이니 그것이 문제다."
A형과 AB형의 조합調合 - 김수인
등장인물
AB형: 큰아들, 작은며느리
A형: 아이들 아버지, 큰며느리, 작은아들
B형: 나
우리 가족들의 혈액형은 온통 A형과 B형으로 이루어졌다. 여기서 제일 물러터진 게 B형이고 제일 강한 사람들이 A형들이다. 나는 애당초에 시시콜콜 따지는 A형 남자에게 두 손 두 발 다 들고 항복한 사람이다. 하지만 지난 설 명절에 속칭 천재 아니면 바보라는 AB형들이 A형들에게 굽실거리는 꼴을 보고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역시 B형의 핏방울이 섞이면 나처럼 약자로 전락하나 싶어 AB형들에게 마음이 기울어졌다. 꼼꼼한 A형들의 눈을 피해 “느그 두 사람은 헛똑똑이들이다.”라고 쿡 쥐어박듯 핀잔을 줬다.
AB형인 큰아들과 작은며느리는 평소에 처세하는 것과 말하는 걸 들어보면 꽤 똑똑한 편이다. 어디에 내놓아도 지고 살 것 같지 않다. 반면에 A형인 작은아들과 큰며느리는 말수가 적고 내성적이라 은근히 동정심을 불러일으키곤 한다. 한데 명절에 두 아들 내외가 우리 집에 와서 며칠 지내는 풍경을 보니 얌전한 A형들이 AB형들을 단단히 잡고 있었다. 똑똑하다는 AB형들의 콧대는 어디 팔아먹고 훈련된 조교처럼 쉬지 않고 움직이는 가엾은 꼴이라니.
덩치 큰 맏아들과 자그마한 둘째 며느리는 밥을 먹다가도 아이들이 화장실 가자면 번개같이 일어나서 뒤처리를 했다. 종일 뛰어놀던 아이들을 씻겨 재우는 일도 AB형들이 맡아서 했다. 반면 A형인 큰며느리와 작은아들은 평소에 길들인 배우자들을 부려 먹으며 쾌재를 부르는 듯했다. 아이들이 화장실을 가든 말든 밥 먹을 것 다 먹고 뜸을 들인 후에야 빈 그릇을 들고 어슬렁거리며 부엌으로 향했다. 설거지를 하는 척하다가 “제가 할게요.” 하면 못 이긴 척 물러나 주는 게 A형 가족의 모습이다.
제 남편 시키지 않는 작은며느리나, 제 안사람 앉혀 두는 큰아들이나 둘 모두에겐 마음이 여리다는 공통점이 있다. 옴니암니 다투어도 먼저 말을 건네는 쪽이 후한 사람들이다. 자존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살얼음판 같은 집안 분위기가 싫어서 먼저 풀려고 하는데 그 점을 이용해서 길들인 성싶다.
AB형 두 사람은 A형과 만나 몇 년 부딪히다 보니 모서리가 날아갔는지 파도에 부대낀 몽돌처럼 동글하게 변해 가고 있다. 몇 번 겨누다 가정의 평화가 깨질 위기를 경험하고 아예 체념했나 보다. ‘육신이야 고달파도 심장 상하는 것보다 낫지 않는가.’ 차라리 내가 하는 게 속 편하다는 주의다.
저녁을 먹은 후 어릴 때처럼 심부름 잘하던 작은아들인 줄 알고 감주 좀 가져 오라 했더니, 긴 허리를 낙타처럼 쭈-욱 펴고 일어나는데 거짓말 좀 보태서 10분쯤 걸렸다. 날렵하지 못한 굼뜬 행동에 가족 모두가 배꼽을 잡았는데, 나를 무릎 꿇게 한 장본인까지 하회탈 같은 웃음을 멈추지 못하는게 아닌가. 아마도 자신의 유전자를 너무 닮았다는 승부욕 때문에 눈물을 흘리며 웃는 듯했다.
A형 아들은 마음을 내면 후벼파고 씻는 성향을 지녔다. 지난 추석엔 욕조 실리콘에 곰팡이를 지우지 못해 안달이더니, 건강제일주의 신조를 내려 두고 독한 세제를 붓고 솔로 문질러 새하얗게 만들어 주고 갔다. 어찌나 깨끗하던지 욕실에 누워 자고 싶은 생각이 들게 했다.
한데 이번에는 강아지를 목욕시킨다고 한다. 등에 피부병으로 앉은 딱지를 불려서 떼겠다는 것이다. 꼼꼼한 손에 부스럼 난 강아지를 맡기는 게 염려되었지만 설마 하고 두었더니 족히 한 시간은 걸리는 듯했다. 참다 못해 욕실 문을 열었더니 딱지가 저절로 일어날 때까지 시간을 끌고 있단다. 세심한 A형 아들 덕택에 강아지의 털빛이 윤이 나고 포슬포슬해져서 고맙긴 했다.
A형 큰며느리 역시 우유병도 꼼꼼히 씻고 식기도 반짝반짝 윤이 나게 씻어야 직성이 풀린다. 설거지하는 데 꽤 긴 시간을 소비한다는 소문을 은근 슬쩍 듣고는 있다. 어쩌다 가 보면 장난감 왕국 같은 집인데도 정리가 잘되어 있고 향기가 솔솔 난다. 양파를 썰어도 가지런히 담아야 하고, 제수를 담아도 각을 맞춰 반듯하게 담아내곤 한다. 이삿짐센터 아주머니가 아기키우는 엄마가 이처럼 깨끗하게 하는 집이 없다며 칭찬할 땐 듣기 좋았다.
한데 팔척장신에 한 성질 하는 큰아들을 잡고 산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고요한 그 모습 어디에 내 아들 휘어잡는 카리스마가 숨어있는지 놀라운 일이다. 꼼꼼해야 휘어잡나? 나도 닮아볼까 싶다.
우리 가족 A형들은 차돌맹이 재질이고, AB형들은 그보다 무른 화강암이고, B형은 손만 대면 깨지는 푸석돌이다. 제아무리 강한 돌도 세월에는 못 이긴다. 차돌도 풍화작용으로 둥근 돌이 되겠지만, 그날을 기다리는 것이 백년하청이니 그것이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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