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하고 싶지만, 어느 날일지 내 손에 온기가 남아 있을 때 사랑했던 사람들에게 작별의 말을 나누고, 의연하게 악수를 청할 수 있을까. 그리하여 호젓한 마음으로 발걸음도 가볍게 떠날 수 있을까.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고 삶의 완성이란 말을 믿는다면 그날을 위한 준비는 슬픔만도 아닐 것이다. 어머니가 고운 수의를 장롱 속에 깊이 넣어 두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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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성을 위한 / 임정숙
단단히 일렀음에도 약속을 어긴 사무실 여직원의 처신이 은근히 섭섭했다. 변명하듯 전화기 너머 그녀는 애사인 만큼 많은 이들에게 알려야 한다는 상사의 채근에 어쩔 수 없었음을 강조했다.
예측했던 우려였다. 귀 얇은 그녀를 탓하기엔 이미 부고는 거미줄 같은 인연으로 일파만파 퍼져나갈 건 당연했다. 물론 상중의 날 위해 애써 준 직원과 윗분의 세심함을 헤아리면 더할 데 없이 고마운 배려이다. 그러나 몇 해 전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의 경험으론 신중함이 필요했다.
한 직장에 몸담은 근무자로서 며칠은 출근이 어려울 상황을 제대로 알려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그러나 생각지 못한 간접적인 관계의 사람들까지 전해진 부고로 인해 불편했던 기억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본의가 아니라 하지만 자칫 오해를 빚는 경우가 있어 순간 촉각이 곤두섰다. 한편으론 겉도는 위로의 씁쓸함도 불편한 감정으로 남아 있었던 부분이기도 했다.
누구든지 생면부지의 낯선 이도 한 생을 마감한 고인의 마지막 길에 유족과 슬픔을 함께하는 의식은 존엄하고 경건한 아름다움이다. 그러나 어머니 임종 소식마저 단체 모임과 공적인 사이까지 알려지는 건 여전히 신경이 쓰였다.
어수선한 잡념은 한나절이 지나니 의미가 사라졌다. 유난히 무더운 여름 날씨에도 나로 인한 인연의 행렬이 끊이질 않았다. 사흘 동안 조문객의 따뜻한 발걸음은 끈끈함이 돋았다. 잔물결처럼 이는 감동은 지나친 선입견에 옹졸했던 마음을 무안케 했다.
우리의 장례 풍습은 슬픔으로 망연한 유족에게는 많은 사람이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도 나름의 정서로 위안이고 힘이었다. 빈소로 직접 찾진 못했어도 정성으로 위로를 보내 준 지인들께도 진정 고개가 숙어졌다.
‘생전 장례식’이란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처음엔 다소 충격적이었다. 고인이 되고서 치르는 장례가 아닌 임종 전 가족, 지인과 함께 이별 인사를 나누는, 살아서 치르는 장례식을 뜻했다.
몇 년 전 캐나다에서 평생 의사로 살아온 한 교민은 암 말기 진단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기존 장례식을 죽은 자가 아닌, 산 자를 위한 무의미한 것으로 생각했다.
“망자는 빈소에서 잠깐 예를 받은 뒤 찬밥신세다. 그건 억울하지 않은가. 찬밥이 아니라 그들의 손을 잡고 웃을 수 있을 때 따스한 밥을 나누며 작별 인사를 하고 싶다.”
교민 신문에 자기 뜻을 알리고 조문객을 맞았다. 그의 부탁에 따라 남자들은 야외 평상복을, 여자들은 꽃무늬 있는 예쁜 옷으로, 조의금은 사절이었다. 즐겁게 담소하고 작별인사를 나누는 자리를 원했던 바람대로 그는 가족, 지인과 와인을 마시고 음식을 나누며 뜻깊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엔 가족들만 슬픔을 나눴을 뿐이다. 유언에 따라 별도의 장례식을 하지 않았고 안장한 후에서야 부음을 전했다고 한다.
최근에도 흡사한 방식의 생전 장례식을 치른 이들이 화제에 오르기도 했다. 형식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는 장례 문화로 새로운 변화가 오고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
어찌 보면 우리의 장례 풍경은 고인보다는 유족을 보고 문상을 하러 가는 경우가 많다. 행여 상주가 섭섭하지는 않을지 상주와 나의 이해관계 등을 따져 사회적 위치와 존재감을 확인하는 빈소가 되기도 한다.
어머니는 아셨을까. 당신과 육 남매 자식의 문상객이 북적거렸던 장례식장에 누가 다녀갔는지, 사람들이 자신을 얼마나 애도하고 슬퍼했는지, 그런 이들로 차마 이승을 떠나면서 자꾸 뒤를 돌아보신 건 아닌지, 정들었던 사람들과 제대로 작별하지 못했음을 애석해하셨는지도 모르겠다.
생전장례식은 생명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은 이에게는 잔인한 말이 될 수도 있다. 어머니가 암으로 여위어 가는 모습을 속절없이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무례한 나날은 우울했고 쓸쓸했다. ‘나 좀 살려다오’ 깊은 한숨에 묻힌 어머니 희미한 음성은 이따금 환청으로 맴돈다.
부정하고 싶지만, 어느 날일지 내 손에 온기가 남아 있을 때 사랑했던 사람들에게 작별의 말을 나누고, 의연하게 악수를 청할 수 있을까. 그리하여 호젓한 마음으로 발걸음도 가볍게 떠날 수 있을까.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고 삶의 완성이란 말을 믿는다면 그날을 위한 준비는 슬픔만도 아닐 것이다. 어머니가 고운 수의를 장롱 속에 깊이 넣어 두었던 것처럼.
임정숙 님은 2000년 《문학공간》 신인상, 저서: 수필집 《흔드는 것은 바람이다》 《사소함도 꽃이다》, 단편소설 《강훈이》, 현재 (사)세계직지문화협회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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