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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수필』, 월간 좋은수필 2018년 11월호, 신작수필23인선 I 독서법과 사람법 - 황경원

신아미디어 2019. 4. 16. 09:59

"그녀가 보낸 답장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금요일 밤엔 1시 전에 자면 벌금 물어요. 오래오래 식구 셋이 얘기하고 차도 마시고… 좋은 다큐도 찾아보고… 금요일 이 시간은 초저녁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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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서법과 사람법           /    황경원 


   밤 열두 시. 아무리 허물없는 사이일지라도 전화를 걸기엔 너무 늦은 시간이다. 잠시 망설이다 문자를 보냈다. 뜻밖에 탁구공처럼 그녀의 답장이 금세 날아왔다. 내가 물었다.


   “아니, 여태 안 주무셨어요…?”
   “벌금 물어요.”
   벌금…?
   그녀의 뜬금없는 대답에 순간 의아해졌다.


   나의 독서법은 나의 사람법과 꼭 닮은 꼴이다. 사소한 단어 하나, 문장 하나에도 쉽게 걸려 엎어지고, 또 거기서 헤어 나오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린다.
   글 한 줄을 붙들고 머언 신화의 바닷가를 몇날 며칠 헤매기도 하고, 때론 지옥문 위에 앉아 긴 생각에 잠기기도 한다.
   남이 볼 땐 아무 것도 아닌 것에, 내 가슴은 봉숭아 씨앗처럼 민감한 폭발을 일으키곤 하는 것이다. 나의 이런 고질적인 습성 탓에 고작 책 한 권을 읽는데 달팽이가 이웃마을 가는 것보다도 더 오래 걸린다. 자꾸만 쌓여가는 읽어야 할 책들과, 나의 느린 독서걸음이 빚어내는 불협화음에 늘 속이 시끄러웠다.
   어느 순간, 책 읽기의 욕심그릇을 깨끗이 비워버렸다. 단 한 권이라도 내 마음에 길을 내어주는 책을 온전히 사랑하자 마음을 고쳐먹은 것이다.
   의외로 소처럼 되새김질하며 독서하는 즐거움이 컸다. 깊이의 쾌감이 나를 바다처럼 충만하게 해주었다.


   나의 사람 관계도 독서법과 다를 바 없다. 많은 사람을 원치 않는다.
   나는 소외된 약자들을 위해 기꺼이 희생하는 이들을 존경한다. 사회 정의 구현과 인류의 발전을 위해 자신의 생을 완전 연소시키는 혁명가들도 우러러 존경한다.
   하지만 내가 진정 사랑하는 이들은 길섶에 핀 풀꽃 같은 이들이다. 가만히 들여다보아야 보이는 사람들. 보면 볼수록 따뜻한 사람들.


   틈만 나면 가족 여행을 다니던 때가 있었다. 전국 지도를 눈 감고도 그릴 수 있을 만큼, 비경을 찾아 다녔다.
   외지고, 구석진 곳에 은거하고 있는 그들을 발견해내어 하나가 되는 순간, 온몸을 타고 흐르던 환희. 조금 과장해서 나는 그것을 바타이유의 ‘작은 죽음’이라 우기고 싶다.
   모래밭의 물처럼 그 추억의 시간들이 모두 빠져나갔다. 이제 빈 독처럼 덩그마니 나 홀로 남아, 그 시절 추억의 씨앗들을 헤아려 본다.
   벚꽃이 눈부시게 산화하던 군산가도의 봄밤, 숲속에 꼭꼭 숨어있던 도적폭포의 짙은 에메랄드 물빛, 은해사 숲속에 낭자하던 휘파람새 소리, 사하라의 조그만 사막여우 발자국, 베트남 소수민족 여인의 의상에 달려 있던 은방울 장식….
   여전히 숨차게 아름답다, 그 장면 장면마다 깃들어 있는 선한 웃음과 다정한 몸짓의 사람들, 무엇보다 지금은 멀리 떠나고 없는 내가족이 거기 있기에 아름다운 것임을 안다.
   사랑하는 이와의 헤어짐보다 더 큰 아픔이 있을까…. 이처럼 몸으로 감각되어지는 사랑은 가장 인간적인 것이란 생각이 든다.
   프루스트의 《읽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다 내 마음이 멈춘 곳도 바로 사랑의 자리였다.


   “몇 시간 후 프랑수와즈는 마지막으로, 아프지 않게 조심하면서 살아 계실 때는 그저 희끗희끗했지만 이제는 완전히 세어버린 할머니의 머리칼을 빗겨 주었다.”
   화자의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직후의 장면을 그린 대목이다.
   고통이 사라진 죽은 사람을 마치 산 사람처럼 아플까봐 머리칼을 살살 빗겨주는 사람….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일. 그 사랑의 판타지 앞에서는 죽음도 두려움일 수 없을 것이다.


   그녀가 보낸 답장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금요일 밤엔 1시 전에 자면 벌금 물어요. 오래오래 식구 셋이 얘기하고 차도 마시고… 좋은 다큐도 찾아보고… 금요일 이 시간은 초저녁이에요.’




황경원 님은 수필가. 《한국산문》 등단. 수필집: 《종이배를 타고 온 여자》, 포토에세이집: 《눈부신 모퉁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