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수필과 비평/수필과비평 본문

월간『수필과비평』[2019년 2월호, 통권208호 I 세상마주보기] 가파도를 걷다 - 신정호

신아미디어 2019. 3. 25. 08:39

"새해가 또 밝았다. 세월은 이리 휙휙 지나가는데, 지나온 발자취를 돌아보니 그리움만 쌓여간다."


 





   가파도를 걷다      -    신정호


   가을 축제가 끝난 가파도는 5월이면 청보리로 일렁였을 들판이 또다시 새봄이 오기를 기다리는 듯 말끔히 손질되어 있었고 그나마 시들어가는 해바라기 밭이 축제의 끝을 메우고 있었다.
   내가 초등학생이었을 때 어머니를 따라 제주도에서 사 년쯤 머물렀는데 그 무렵 교회에서 만난 오빠는 고등학교 2학년쯤 되었었나 싶다. 어머니는 교회 고등부 학생이었던 오빠를 아들처럼 챙겨주셨고 오빠도 어머니를 따랐다. 오빠는, 가끔 우리 집에 왔을 때 어머니가 만들어주신 불고기는 정말 맛이 최고였다고, 어느 크리스마스엔 털실로 짠 장갑도 선물해 주셔서 눈물이 나게 감사했고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어릴 적 기억에 미남은 아니었지만 오빠가 있는 곳엔 늘 웃음이 터졌었다. 대학교수로 재직하다 은퇴한 오빠와 아내인 화가 언니랑은 그때부터의 인연이 지금까지 계속되어 이젠 가족처럼 오빠, 언니로 지내고 있다.
   지난 봄 하늘나라에 가신 어머니는 일흔이 훌쩍 넘은 오빠인데도 늘 처음보았던 대로 고등학생으로 대하셨다. 오빠가 몰래 담배를 피우던 모습을 목격하고 진노했던 어머니께 애걸복걸 빌었다는 얘기를 하려면 소리 내어 웃기부터 하셨던 어머니 생각이 난다.
   오랜만에 제주에서 뭉친 우리 삼남매에게 오빠내 외는 가파도의 유명한 짬뽕을 맛보이고 싶다고 가파도를 가자고 했다. 모슬포항에서 5.5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가파도까지는 여객선으로 십 분 정도 걸린다. 맑고 푸른 바다에 하얀 물살이 솟구치는 가파도를 향하는 배 안에서 언니는 남편을 어느 왕국의 술탄 모시듯 평생을 살았다면서, 오늘 아침도 그 바쁜 통에 잣죽까지
끓여서 대령했다고 투정 섞인 말을 내뱉지만 내면엔 사랑이 묻어나왔다.

   우리는 소녀 같은 언니의 안내로 푸른 파도가 철썩이는 가파도를 걸었다. 반짝이는 눈과 웃음 짓는 얼굴로 벙거지 모자를 눌러쓰고, 자그마한 꽃술이 붙어있는 머플러를 두르고 에이프런 원피스를 덧입은 언니는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를 떠올리게 했다. 호리호리한 키에 은발이 매력적인 오빠는 청바지에 푸른 셔츠, 챙이 좁은 중절모를 쓰고 앞장서 걸어가는 뒷모습이 멋쟁이 청년 같다.
   가파도를 관통하는 가운뎃길을 걷다 보니 어린 왕자가 노란 스카프를 목에 두르고 파도가 출렁이는 바위에 앉아있는 그림이 걸린 천연 염색집 가게도 지나고, 돌담 위에 뿔소라 껍질과 전복 껍질을 덧붙여 놓은 담장도 지나고, 배가 홀쭉한 길냥이가 야옹거리며 먹이를 찾는 모습도 보았다. 길의 끄트머리쯤 조그만 가게에 ‘해물짬뽕’이라고 쓰인 큰 간판이 눈앞에 보였다. 식탁에 놓인 해물짬뽕은 식탐이 적잖은 내가 보기에도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큰 그릇에 산처럼 온갖 해물이 덮여 있었다. 소라, 전복, 홍합, 꽃게, 새우, 해초 등등. 바다가 통째로 들어있는 짬뽕이어선지 맛있게 먹다보니 바닥이 보였다. 미식가가 아니라도 먼 길을 찾아와 먹을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른 배를 두드리며 해안도로를 따라 걸으니 산방산이 바로 코앞인 듯 가까이 보이고, 파란 하늘과 푸른 바다가 맞닿아 있어 수평선을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햇빛은 부드럽게 내리쪼이는데 바위틈에서 바람 따라 흔들리는 해국이 예쁘다.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인 듯 지붕 밑 처마 끝에 전복껍질을 붙여놓고, 처음 보는 자색 조약돌로 쌓아놓은 독특한 돌담도 보았다. 길을 따라 걷다가 바닷가에 드문드문 세워진 정자에 앉으니 이런 평화로움이, 아름다움이 어디에 또 있을까.
   오빠는 “너랑 친한 사람들 명단 다 써서 보내라. 내가 맛있는 귤 보내줄게.” 하며 싱긋 웃는다. 참 따뜻하다. 금방 식는 뜨거움이 아니라 화톳불 같이 은은히 오래가는 따뜻함이다. 어쩌다 친구들과 놀러왔다가 안부전화를 하면 달려나와 우리 일행에게 맛있는 것을 사주기도 했었다.
   천천히 담소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배 타는 곳에 도착했다. 돌아갈 배를 기다리다가 자전거 대여소 앞 의자에 앉아 맞은편 푸드 트럭에서 만들어준 홍차라떼를 마시며 가파도의 풍경을 가슴에 담고, 여기에서만 나온다는 청보리 미숫가루와 말린 톳을 사들고 배에 올랐다. 우리를 위해 오늘 하루 멋지고 따뜻한 감동을 안겨준 두 분에게 감사하면서 언제까지나 연인처럼, 오누이처럼 사랑하며 건강하게 지내시길 마음속으로 빌어 본다.
   제주는 내 마음의 고향이다. 정겹고, 따스하고, 바닷내음이 나는… 머무른 시간은 어린 시절 잠깐이었지만 관덕정, 칠성통을 거쳐 다니던 학교 길은 늘 그리웠고, 얼굴이 하얗고 예뻐서 친구들이 서로 그 애 옆에 가려고 했던 숙희도 보고 싶다. 언덕 위에 자리 잡은 KBS 방송국의 어린이 합창단원으로 뽑혀 방송국을 드나들던 시절도 그립다. 단복인 수박색 주름치마에 하얀 칼라를 덧붙인 상의가 자랑스러워 일부러 학교에도 입고 가서 은근히 뽐냈던 그 시절이…. 이젠 가끔은 가파도의 하루도 그리워하리라.
   새해가 또 밝았다. 세월은 이리 휙휙 지나가는데, 지나온 발자취를 돌아보니 그리움만 쌓여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