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수필과 비평/수필과비평 본문

월간『수필과비평』[2019년 2월호, 통권208호 I 사색의 창] 겨울나무 - 좌여순

신아미디어 2019. 3. 18. 11:02

"언어도 다 버리고 경관으로 양분을 섭취하며 침상에서 가만히 굳어가는 어머니는 이제 비로소 나무가 되는 중인가 보다. 다음 생에 언제나 평온함을 품고 사는 고결한 나무로 태어나기 위해 준비 중이시다."


 





   겨울나무      -    좌여순


   겨울에 보는 나무는 무채색이다. 어머니가 계신 곳을 향해 달리는 차창 밖으로 겨울 색채의 풍경들이 지나간다. 잎을 다 내려놓은 나무들이 굽이진 산길에 쓸쓸한 가지를 내밀고 고요하게 서 있다. 세상에 나서 단 한 번도 자리를 옮긴 적이 없는 토박이들이다. 나무는 아무런 변화도 없는 듯이 그 자리에 서 있지만 계절을 한바퀴 순환하는 동안 말없이 나이테를 새기며 조금씩 몸집을 키워간다. 다시 봄, 여름, 가을을 맞는다.
   지난 가을에는 내장산을 다녀왔다. 생애 처음 단풍구경을 한다는 목적으로 떠나본 여행길이었다. 부드러운 노랑을 가진 잎과 불타는 듯 강렬한 붉은 잎이 강도를 달리하며 어우러져 있다. 울긋불긋한 나무는 사람들을 불러 모으며 찬란한 풍경을 선사한다. 나뭇가지에 달린 것도 아름답지만 떨어지며 바닥을 흥건히 물들여 놓은 풍경은 어느 예술가가 그려놓은 문양 같다. 사람들은 탄성을 지르며 불타는 산중으로 모여들고 황홀한 빛에 마음을 빼앗긴다.
   조화라도 부린 걸까? 단풍은 안토시아닌이나 카로틴, 타닌과 같은 색소가 드러나 보이는 것이라고 한다. 한여름 활발하게 광합성 작용을 할 때는 보이지 않던 색소들이다. 생장이 왕성한 봄과 여름에 부지런히 양분을 만들어 공급하다가 기온이 내려가면 겨울 채비를 한다. 엽록소에 가려졌던 노랑 혹은 빨강이나 갈색의 색상이 두드러지며 우리에게 황홀한 빛을 품은 단풍으로 보여준다. 나무는 잎으로 공급하는 수액의 길마저 차단한다. 이제 미풍만 불어도 잎을 놓을 준비가 되었다.
   생장에 몰두하던 푸른 시기는 가고 왁자하던 엽록소를 떠나보내고 나니 비로소 나타나는 호젓한 자유의 절정이다. 얼마나 아름다운 황혼인가. 처음으로 나무가 부럽다는 생각을 했다. 오빠와 언니, 나와 동생까지 품에서 떠나보낸 뒤의 어머니가 생각났다. 어머니에게 과연 화사했던 때가 있었을까? 꽃 피는 봄이나 여름 같은 때 혹은 단풍 드는 가을 같은 때가 과연 있었을까?
   어머니에게도 생동하는 젊은 시절이 있었다. 어머니는 바느질이나 뜨개질 솜씨가 아주 좋았다. 내가 결혼하고 오래지 않은 어느 날의 장면이 생생하다. 친정집 마당으로 들어서는데 어머니는 마루에 앉아 재봉틀을 돌리고 있었다. 사돈에게 선물할 하얀 모시옷을 짓는 중이었다. 어머니는 집에서 자주 입는 초록색 짧은 소매 옷을 입고 계셨는데 그날은 유난히 곱고 세련되어 보였다. 그러나 평소 행복했는가에 대해서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다.
   아버지는 밖에서는 어질고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어머니 입장에서 볼 때 그건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남들에게 사람 좋다는 소리를 듣는 데 반해 가정 경제나 가족의 행복에는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던 것 같다. 아버지는 40대 초반에 돌아가셨고 병원비는 고스란히 빚으로 남았다. 여러 가지 이유로 어려움이 많았던 어머니는 그즈음에도 자주 아팠다.
   오늘은 어머니를 뵈러 가리라 생각하던 참인데 요양원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고열이 나서 병원엘 모시고 가봐야겠다고 한다. 병원으로 모시기 위해 마주한 어머니는 더욱 말라 보였다. “어머니, 저 왔어요.” 어머니는 빤히 보기만 하신다. 그 눈길에 담긴 의미는 아무리 보아도 읽어낼 수가 없다. 바싹 마른 나뭇가지처럼 앙상해지는 어머니를 뵐 때마다 얼음벽은 한 겹씩 어머니와 세상 사이에 덧씌워지고 있는 것 같다. 어머니는 우리에게서 멀어지며 더욱 황량해져 간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아득한 겨울 속으로 깊이 침잠해간다.
   혈액을 뽑고, 엑스레이를 찍고 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링거를 맞는다. 링거를 맞는 중에는 좀 주무셔도 좋으련만 줄곧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반복하신다. 뭐라고 말씀하고 싶으신 걸까? 소통이 불가능해진지는 이미 오래다. 아주 가끔은 생각이 있으나 표현이 안 되는 것 같은 눈빛을 보낼 때가 있다. 어떤 날은 “맞다.”라든지 “좋다.”라든지 하는 맥락에 맞는 단어로 놀라게도 하신다. 그러나 늘상은 의식이 아주 아득한 곳에 계신 것 같다. 어머니에게서 알아들을 수 있는 단어는 몇 되지 않는다. 맥락 없는 음성이다. 어머니의 의식은 대체 어디로 가 계신 건지요.
   검사 결과는 역시 폐렴이다. 요즘 부쩍 폐렴으로 입원을 자주 한다. 폐는 점점 낡아가는 상태여서 더욱 이런 일이 잦아지고 깊어질 것이라 한다. 오늘도 입원이다. 70세도 되기 전에 찾아온 파킨슨 증상은 십수 년을 지내는 동안 어머니의 뇌를 망가뜨리고 한쪽 팔을 접어놓았다. 한쪽 다리를 펴지 못하더니 다른 쪽 다리도 굳어가고 나머지 팔마저 움직임이 어렵다. 나무처럼….
   겨울나무는 고독하다. 왕성하던 잎을 다 내려놓고 찬바람 속에서 깊은 명상에 잠긴 수도자의 모습으로 서 있다. 그래서인지 그 모습은 더욱 경건하고 성스럽게 보인다. 수필가 이양하는 “불교의 윤회설이 참말이라면 나는 죽어서 나무가 되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윤회설이 사실이라 하여도 나무로 태어난다는 것은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 같다. 아마도 커다란 축복이 주어져야만 가능한 영광일 것이다. 사람으로 태어나 생로병사를 겪는 일이야말로 죄 때문에 신으로부터 내려진 벌임에 틀림이 없는 것 같다.
   언어도 다 버리고 경관으로 양분을 섭취하며 침상에서 가만히 굳어가는 어머니는 이제 비로소 나무가 되는 중인가 보다. 다음 생에 언제나 평온함을 품고 사는 고결한 나무로 태어나기 위해 준비 중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