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수필과 비평/수필과비평 본문

월간『수필과비평』[2019년 2월호, 통권208호 I 사색의 창] 폭설이 내리던 날 - 양재봉

신아미디어 2019. 3. 15. 11:13

"제설작업을 해 높게 쌓인 길가의 눈 사이를 달렸다. 따뜻한 보금자리, 활활 타오르는 장작 난로, 김이 모락모락 나는 뜨거운 군고구마가 눈에 어른거렸다."


 





   폭설이 내리던 날      -    양재봉


   기해년 아침이다. 기사 하나에 눈이 꽂힌다. 미국에서 어떤 복권당첨금이 1조 5000억 원까지 올랐다고 한다. 미국은 땅도 크고 세계 1위 경제 대국이다. 누구나 부러워하는 선진국 아닌가. 복권만 해도 상상을 초월하는 금액이다.
   지구촌의 경찰이라며 으스대는 군사력도 최강이다. 그런 힘으로 그러는걸까, 트럼프의 억지가 도를 넘는다. 우린 언제면 그런 힘을 가질 수 있을까. 꿈이라도 잘 꾸면 몇 억짜리 로또라도 당첨되려나. 그러고 보니 나도 소박한 횡재를 한 적이 있다.
   우리는 돼지꿈을 길몽이라 한다. 그런 꿈을 꾸면 기분부터 좋다. 웬 좋은 일이 생길까 기다려지고 복권을 살까 망설이기도 한다. 하루가 여사하지 않다.
   지지난겨울, 그런 꿈을 꾸진 않았지만, 기분이 달떴다. 오랜만의 겨울 나들이를 준비했다. 워낙 추위를 타는지라 내복까지 챙겨 입고 내 애마는 새벽 길을 달렸다. 아직 열여섯 살 이팔청춘(?)이건만 요즘 들어 힘겹다 투덜대는 것 같아 마음이 애잔하다.
   배터리도 수명을 다하고 있는지 시동을 걸 때면 길길길 천식 앓는 노인처럼 갈그랑거리는 소리를 낸다. 강추위라도 오는 날은 더 그렇다. 주인을 닮아 간다며 웃는다.
   공항 외곽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새벽이라 한산했지만 구석진 곳을 골라 차를 세웠다. 옆엔 하얀 승용차가 백설기 같은 고운 피부를 자랑이라도 하듯 반짝인다. 애마는 은색빛이 바래서 희끄무레하다. 잘 다녀온다는 눈짓에 녀석은 토라진 듯하지만, 고작 짧은 이틀간의 이별이다.
   비행기가 땅을 차고 오르더니 구름으로 들어간다. 아들이 차를 바꾸자는 말을 했는데 어쩌면 곧 영원한 이별을 할지도 모른다. 슬픈 이별은 건강에 안 좋은 거라며 도리질했다.
   전주에 도착했다. 신나는 날이다. 오랜만에 보는 문우님들과 인사를 나누느라 웃음이 떠나질 않는다. 유익한 세미나는 밤까지 이어졌다. 하늘에선 우리의 만남을 설레게 하얀 눈이 펑펑 쏟아져 내렸다. 축복 받은 밤이다.
   호사다마라던가. 지난밤 과하게 즐겼던 턱을 톡톡히 치르게 되었다. 하늘, 바다, 땅 모든 교통이 마비되었다. 문학기행도 취소되고, 사상 유례 없는 폭설은 제주도라고 예외가 아니란다. 뉴스 화면에 나오는 제주공항은 발 묶인 관광객들로 난민 수용소를 방불케 했다.
   제주도 팀은 서울로, 인천으로, 부산으로 이산가족이 되었다. 친척집이나 지인에게 갈 수 없는 회원은 공항 근처에 숙소를 잡고 비행기 뜨기를 기다렸다. 나는 부산 처형 집으로 향했다. 눈이 가장 적게 내릴 거라는 계산에서다. 예상대로 역시 남쪽으로 향할수록 쌓인 눈이 적다. 그리고 누구나 처가에 가면 좋은 대우를 받지 않는가.
   처형 집에서 이틀을 보내면서 문뜩 떠오르는 그 녀석, 시동이 안될 거라는 생각에 머리를 굴려 보지만 뾰족한 수가 없다. 스스로 웬만한 응급조치는 할 수 있기에 응급 서비스를 보험에서 뺀 것이 후회된다. 주차료도 만 원이면 될 것을 이만 오천 원 거금을 내야하게 생겼다.
   딸은 아예 컴퓨터를 끌어안고 비행기표 예약에 몰방하고 있다는 전갈이다. 그 덕분에 생각보다 이르게 제주공항에 도착했다. 골판지를 깔고 누워있는 사람들, 난민 틈을 지나는 것 같은 착각이 들게 했다.
   두꺼운 눈을 뒤집어쓰고 있는 차 앞에 섰다. 눈을 치웠다. 운전석에 앉아 시동이 안 걸릴 거라면서도 요행을 바라는 마음으로 키를 꽂았다.
   ‘제발 걸려라.’ 염원을 담고 살며시 돌렸다. 비익 비익 길길길 첫 시도는 실패다. 몇 분을 기다렸다가 다시 시도했다. 길길 길길길 용을 쓰는가 싶더니 부르릉 하고 기적이 일어났다. 녀석이 살아난 거다. 이런 횡재가 어디 있나.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운전대와 하이파이브를 하며 소릴 질렀다. 누가 보면 당연한 건데, 그러는 날 보고, 미쳤다 할 것 같아 얼른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차료를 내려 계산대에 섰다. 비행기 표를 보여 달라기에 보여줬더니 무료라며 그냥 가라 한다. 이틀치라도 받아야 하는 거 아니냐고 하자, 제주도청에서 폭설 기간엔 돈을 받지 말라 했다고 한다. 또 횡재했다.
   총각 때였다. 돼지꿈을 꾸고 딱 두 번 복권을 산 적이 있다. 한 번은 꽝, 한 번은 오백 원짜리가 당첨되자 그 후론 복권을 사 본 적이 없다. 그런데 돼지꿈을 꾸지도 않았는데 25,000원짜리 횡재라니, 돼지꿈 복권 당첨보다도 낫지 않은가.
   제설작업을 해 높게 쌓인 길가의 눈 사이를 달렸다. 따뜻한 보금자리, 활활 타오르는 장작 난로, 김이 모락모락 나는 뜨거운 군고구마가 눈에 어른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