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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수필과비평』[2019년 2월호, 통권208호 I 사색의 창] 물든다는 것 - 송진련

신아미디어 2019. 3. 13. 10:41

"의령 머릿골에서 출발하여 쉼 없이 달려온 스승님의 지난한 생애에 물든다. 문학을 향한 집념과 제자 양성을 위해 오른 가파른 언덕에 서서 뒤돌아 보는 아찔한 벼랑의 감격에 물든다. 가없는 사막과 혹한의 설원도 마다않고 앞만 보고 나아가는 용기에도 물든다."


 





   물든다는 것      -    송진련



   서서히 물들었다. 물든다는 것은 마음이 마음을 만나는 것이라 했다. 봄엔 황금능선, 여름엔 세석고원, 가을엔 빗점골, 드디어 종석대의 종소리에 물든 것이다.
   스승님의 네 번째 작품집 ≪지리산 종석대의 종소리≫ 출판 기념회가 열리는 지리산을 향한다.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 사이로 가을이 빠끔히 얼굴을 내밀고 짙은 녹음도 성큼 다가온 계절을 내치지 못하는 듯 멈칫거린다. 청잣빛 하늘과 황금들판을 지난다. 심산유곡으로 접어들자 양쪽으로 서서 길을 열어 주는 키 큰 나무들 사이로 푼푼한 쑥부쟁이가 반긴다. 가는 허리를 뽐내듯 간들거리는 억새 사이로 마타리의 노란 머릿결도 언뜻 보인다. 버스가 지나는 곳마다 지리산 전문 산악인 스승님의 설명 한마디 마디에 혼이 섞여 녹아내린다. 정갈한 숲에서 내뿜는 달콤한 냄새와 곱게 물들어가는 단풍이 눈길을 끈다. 달궁, 심원 마을, 주능선…. 한꺼번에 많은 지명들이 머리 입구에서 헷갈린다. 들은 것 같기도 읽은 것 같기도 하다.
   성삼재서 노고단을 향한다. 기대로 부푼 맘까지 끌어안고 나무 계단을 지나 언틀먼틀한 길도 뒤뚱거리며 걷는다. 벼랑 끝에 매달린 붉나무에 불이 붙어 활활 타오르고 흙 한 줌 없는 절벽 바위틈에 소나무 한 그루가 꿋꿋이서 있다. 스승님도 때로는 지독한 고독을 씹으며 이 길을 걸었을 것이다. 그 길 끝에서 문학의 싹이 움터서 거목이 되었듯이 벼랑 끝의 나무는 살아남기 위해 뿌리를 내리고 바위 깬 것이리라.
   한참을 오르다 노고단 산장에 도착해 편안한 벤치에 앉아 땀을 식히노라니 누군가 “저기 종석대가 보인다.”고 소리친다. 돌아보니 나뭇잎 사이로 검은 삼각형의 꼭대기. 눈으로 가슴으로 수도 없이 되뇌던 곳이다. 우번대사가 여인을 따라나섰다가 득도를 한 종석대라니. 장소를 옮겨가며 사진으로 담는다. 우번대사가 여인에게 홀린 것처럼 나는 문학이라는 남성에게 홀린 것이 틀림없다. 한 십 년 문학세계에 빠지면 좋은 작품을 영글어낼 수가 있을까. 종석대에서 문학의 종이 울리기를 감히 상상하는 동안 출판기념회가 열린다.
   작품 낭독에 이어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시가 노고단을 휘돌아 산아래로 울려 퍼지고 대피소 주변에서 휴식을 취하던 등산객들도 함께 어우러진다. 감동으로 일렁이던 식을 마치고 되돌아 내려오는 길, 성삼재, 종석대, 무넹기 등 작품 속의 선경을 직접 내 눈으로 확인하는 기쁨을 어떤 말로 표현할까. 작품 속에서는 지리산을 하루에도 몇 번을 오르내렸지만 드디어 현실이 되고 보니 온몸이 금방 지리산에 물들어 버린다. “지금 나는 지리산 천왕봉을 오를 수가 없지만 준엄한 자연의 순리와 세월을 겸허히 순종하려한다.” 스승님 자서의 한 구절이 섬광처럼 나타나 가슴이 저리고 코끝이 찡하다.
   미흡하기 그지없는 제자로서 저서 4권을 분석해 본다. 작품의 영역은 지리산을 구심점으로 물 나이테 벙글듯 넓은 외부 세계로 향한다. 첫 수필집에서는 화개동천에서 성안마을까지 99개가 넘는 지역을 제시했다. 두 번째는 서진암에서 신밭골까지 수많은 지명을 명시하고, 세 번째는 지리산을 빠져나와 사람이 그리운 시대의 자화상을 열거, 삶의 실핏줄 같은 뿌리를 찾아나섰으며, 여러 이유로 문학의 꿈을 접었던 제자들에게 창작의 원형을 찾아 선보인 작품들이다. 네 번째 수필은 지리산에서 부는 영원한 푸른 바람과 그리움을 바닥에 깔고 가끔 추억나들이와 다음 생을 꿈꾸기도 하고 철학적 심미안으로 본 세계를 그려내고 있다. 두 발로 직접 걸으며 온몸으로 부딪쳐 생산한 살아있는 정보의 보고인 4권의 수필집에 심취하는 기쁨을 오래도록 맛보고 싶다 .
   나도 한때는 음악으로 꿈을 이루겠다고 잰걸음 친 적도 있고 평생교육원 문창과를 다니며 욕심도 부려 보았으나 결과물은 없었다. 뒤늦게 문학관을 오르내리며 꿈을 키우다 스승님의 격려에 힘입어 수필가라는 빛나는 이름표를 달고부터 얻은 것이 많다. 흘러가는 것에 대한 아름다움과 세상의 물욕과 근심들이 물처럼 노을처럼 조금씩 사라지는 일에 익숙해진다. 재방송도 없고 녹화도 안 되는 인생길을 되돌아볼 수 있는 기분에 환호한다. 젊어 이루지 못한 길에 대한 회한을 문학으로 보상받으려 하는지도 모르겠다.
   ‘현실적 명예와 욕망의 갈림길에서 뜨겁게 가슴을 태운 적도 있지만 불같은 욕망을 지리산정에 묻고 나니 참으로 편안합니다.’ 스승님은 지리산정에 묻은 씨앗 한 톨이 발아하여 거대한 숲을 이루었으니 더 넓은 세상으로 뻗어나가길 기도해 본다. 지금도 수많은 사람이 지리산 매력에 빠져 오르내리지만 문학적인 옷을 덧입혀 세상에 알린 사람은 많지 않다.
   출판기념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꿈을 꾸듯 그림붓을 잡는다. 평사리 악양 들판에서 동서로 미끈하게 뻗은 주능선 한가운데 기백이 넘치는 스승님의 당당한 모습을 그려 넣는다. 새해 벽두와 꽃샘추위의 춘삼월, 폭우 쏟아지는 여름, 일찍 내리는 가을 서릿발, 한 치 앞도 가늠할 수 없는 겨울의 눈 속을 헤맨 끈기와 용기까지 화폭에 다붓이 담는다.
   의령 머릿골에서 출발하여 쉼 없이 달려온 스승님의 지난한 생애에 물든다. 문학을 향한 집념과 제자 양성을 위해 오른 가파른 언덕에 서서 뒤돌아 보는 아찔한 벼랑의 감격에 물든다. 가없는 사막과 혹한의 설원도 마다않고 앞만 보고 나아가는 용기에도 물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