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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수필과비평』[2019년 2월호, 통권208호 I 사색의 창] 안개는 꿈을 동반한다 - 서이정

신아미디어 2019. 3. 13. 10:35

"나는 이 꿈길이 행복으로 가는 길이거니 믿고 싶어 한다. 행복이 어디 있는지 잘 모르면서 어렴풋이 글을 그려보는 것이다. “산 너머 저쪽 하늘 저 멀리 행복이 있다고 말들 하기에” 칼 부세도 행복이라는 꿈을 찾아 남 따라갔다가 눈물 글썽이며 돌아왔다고 노래했다는데. 어쩐지 나는 돌아오지도 못 할 것 같아서, 오색실을 베틀에 걸고 행복을 직조한 문장 한 줄을 짜기 위해 날개가 시도록 안개를 헤치며 팔랑팔랑 날아갈 수밖에 없을 것 같아서. 내 예감에 덜컹거리는 바람이 걱정이다."


 





   안개는 꿈을 동반한다      -    서이정



   “저는 특파원이 되고 싶습니다.”
   나는 놀랐다. 중1 국어 수업 시간이었다.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꿈을 발표하라고 했다. 여학생은 거의 간호사였다. 남학생은 교사나 경찰이었다. 나는 특파원이 무슨 일을 하는 건지 잘 몰랐다. 내가 사는 곳은 시골 깡촌이었다. 그런 마을에 있는 학생의 입에서 튀어나온 꿈, ‘특파원’, 그건 지금까지 잊지 못하는 인상이 되었다. 깡촌 사람들은 하루를 살면 그만인 듯이 살았다. 꿈이 없었다. 나 또한 꿈이란 게 없었다. 꿈에 대해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그날은 반 친구들의 것을 대충 베껴서 내 차례를 어물쩍 넘겼다.
   내가 막연하나마 꿈을 떠올린 것은 가슴에 안개가 피기 시작하면서였다. 그것도 실체가 아주 희미한 안개 같은 것이었다. 어렴풋이 상이 나타난 것은 스물 즈음이었다. 우아한 미소로 한가를 거니는 고운 여인의 자태가 나를 동경하게 했다. 향을 선사하는 여인, 그것이 되어 보고 싶었다. 커피숍이라는 데를 유람하듯 다녔다. 메모지 모으고 성냥 모으는 재미에다가 커피가게 이름들이 퍽 낭만스러웠다. 그린비, 목신의 오후, 젊은날의 초상, 아라미스, 솔베이지의 노래, 푸른 옷소매, 녹지, 아비뇽, 쉘부르의 우산, to you, 까뮈까지. 커피향을 사르며 사색의 미로를 더듬어가는 사람, 그가 가게 이름만큼이나 향취를 느끼게 했다. 하지만 그 우아한 여인은 안개 낀 골짜기로 슬그머니 들어가 버렸다.
   그 안개 끝에 목장이 나타났다. 정갈한 푸른 언덕이 좌악- 누워 있었다. 한없이 뻗은 초원에서 소들이 느긋하게 풀을 뜯는 그림이 평화로웠다. 파란하늘은 더없이 맑고, 햇빛이 찬란히 쏟아지는 목초지를 하얀 드레스를 입고 빨간 파라솔을 돌리며 여인이 다가왔다. 한가로이 노니는 소들을 눈으로 쓰다듬는 나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오후의 태양 아래서 어미소가 부르는 나지막한 소리를 들으며 송아지들은 총명한 눈망울로 돌아본다. 그런 풍경 뒤에 땀내 나는 노동이 있다는 것을 안 것은 한참 뒤였다.
   세상에 꿈꾸지 않는 자가 있는가. 하지만 인생길은 언제나 안개가 자욱하여 저마다 꾸는 꿈이 다를밖에 없다. 삶이 복잡한 미로를 헤매는 나그네라 한다면 그 안개 낀 대지의 어느 자락에 꿈이 있고 그 꿈을 찾아 나는 미로를 헤도는 한 마리 나비이거니.
   만인지상의 권력을 추구하는 자나 인류공영에 이바지하는 자나 역사에 길이 남을 그 무엇을 남기고자 부심하는 자나 ‘이들의 꿈에 비하여 내 꿈은’ 너무도 보잘것없어 나는 꿈을 꾸지 않았다.
   서른과 마흔 사이, 나를 흔드는 일들이 지나갔다. 도서관에는 성벽처럼 견고한 책장에 한 사람의 각기 다른 세계가 얼마나 넓은지를 품고 책들이 서 있었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하지만, 이들을 자원 삼아 나도 뭘 좀 지어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꿈같은 생각을 했다. 나는 거기서 안식을 얻고 싶었다. 글 언저리에 기웃거리게 되면서 좌절을 만나고 그러면 다시 아롱다롱 반딧불이 보였다. 안개 속에서 보는 불빛은 내게 큰 숨을 쉬게 했다. 그건 아주 특별하거나 남다른 일이었다. 글자는 읽기 쉬워도 세상을 읽기란 읽기도 헤아리기도 정말 어렵다. 마치 무거운 바윗덩어리를 짊어진 시시포스처럼 그러면서도 그런 시작이 여기까지 오고 말았다.
   나는 이 꿈길이 행복으로 가는 길이거니 믿고 싶어 한다. 행복이 어디 있는지 잘 모르면서 어렴풋이 글을 그려보는 것이다. “산 너머 저쪽 하늘 저 멀리 행복이 있다고 말들 하기에” 칼 부세도 행복이라는 꿈을 찾아 남 따라갔다가 눈물 글썽이며 돌아왔다고 노래했다는데. 어쩐지 나는 돌아오지도 못 할 것 같아서, 오색실을 베틀에 걸고 행복을 직조한 문장 한 줄을 짜기 위해 날개가 시도록 안개를 헤치며 팔랑팔랑 날아갈 수밖에 없을 것 같아서. 내 예감에 덜컹거리는 바람이 걱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