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 여배우', 우리는 어디서나 배우일지 모릅니다. 그리고 유명한 배우가 되기를 꿈꿉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가면서 유명과 무명의 차이가 무엇인지에 혼돈을 겪게됩니다. 여기 가슴을 따뜻하게 하는 한편의 수필이 있습니다.
무명여배우
“나는 무명 여배우입니다.
영화판 연극판에서 20년 넘게 산다지만, 이름은 고사하고 이제는
얼굴도 잊혀져가는 배우랍니다. 그래도 배우라는 타이틀은 놓고 싶
지 않아요. 처음이나 지금이나 내 심장을 뛰게 하는 것은 오직 카메
라 앞과 무대뿐이니까요. 작품이 나를 홀대하고 관객이 나를 외면해
도 나는 죽는 날까지 배우로 살겠어요.
유명 여배우, 사실 한 인간으로 여자로 부러워할 것은 없어요. 자
기 몸이 어디 자기 것인가요? 사랑인들 마음대로 할 수 있나요? 인기
관리 차원에서 신비주의로 투명인간이 되어야지, 거짓말은 식은 죽
먹기고 여차하면 상납의 상납으로 줄줄이 엮어야 해요. 이름 세 자
날리려고 하이에나 우글대는 회색 정글에서 아바타로 살아야 한다니
까요.
나, 그렇게 살 수는 없지요. 하루에 3천 개의 잔상을 담는 머리가
있고, 1백 개나 되는 거울이 반짝인다는 심장을 지니고 있는데, 차라
리 이렇게 이름 없는 배우로 살아가겠어요.” ‘무명 여배우’는 소리
없이 말을 하는데…….
며칠 동안 나는 그 카페 앞을 서성이기만 했다.
이태원 사거리, 남산에서 내려오는 2차선 도로가 끝나가는 곳에
‘무명 여배우’는 있다.
비닐자재 지붕이 바람에 펄럭이는 재래시장과 형광등 불빛에 눈
이 시린 현대식 마트가 마주보고, 제과점과 떡집이 나란히 있는 길
가. 가라오케 ‘열정’과 스테이크 하우스 ‘비바체’를 지나면 카페 ‘무
명 여배우’간판이 보인다. 행인의 시선을 사로잡기 위해 각양각색으
로 단장한 다른 간판과는 달리, 목재로 마감한 전면에 작고 흰 고딕
체로 반듯하게 쓰여 있다.
무질서하고 현란한 간판 속에서 단아해서 돋보이는 ‘무명 여배우’
라는 다섯 글자. 생명이 실린 것일까. 오롯이 바라보는 모습이 수수
하나 도도하다. 휘황하게 펼쳐지는 유명 여배우들의 허명虛名을 비웃
듯 무심해 보이는 그것은 오만하기까지 하다. 바람이 아무리 세차도
코웃음으로 마주할 것 같은 한 여자의 모습 그대로다. ‘나는 무명 여
배우’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인간으로서의 자존감을 생명으로
아는 사람, 그녀는 어디 있는 것일까. 카페 여주인일까. 상상 속의 인
물일까.
밤은 흔들리는 불빛들을 거리에 쏟아내는데, 나는 다시 돌아볼 새
도 없이 차창에서 눈을 돌리고 그곳을 떠나야 했다.
그해 어느 봄날, 어머니는 집안의 연례행사인 천렵을 마련하셨다.
30리 밖 주사어른에게서 날을 받고, 트럭 두 대를 동원했다. 동네
사람들과 아버지 친구들을 가득 태운 트럭 뒤칸은 사방을 새끼줄로
둘러쳤다. 다른 한 대에는 돼지 두 마리에 떡이며 술, 과일과 과자궤
짝들이 얹히고 일꾼들과 일가친척이 탔다. 한 옆에 짙은 화장에 꽃단
장을 한 두 여자가 장구를 앞에 놓고 자갈길에 흔들리며 앉아 있다.
어머니가 부른 요정 ‘부벽루’의 기생들이다.
수타사 계곡 겹겹이 바위로 둘러싸인 용담龍膽에 도착하자, 불을
피워 가마솥을 걸고 일꾼들과 동네 아낙들은 음식을 장만하기 시작
했다. 그때부터 기생들은 장구를 치며 노랫가락을 풀어냈다. 음식이
차려지고 술이 돌자 노랫소리는 사방으로 퍼져나갔고 아버지 친구들
은 춤을 추며 흥겹게 놀았다. 동네 사람들과 아이들은 그것을 구경삼
아 둘러앉아 음식을 먹으며 웃고 떠들었다. 온 산이 불붙은 듯 진달
래가 한창이었다.
모시 한복을 정갈하게 차려입은 어머니는 꽃나무 그늘에서 일곱
살 된 나를 곁에 앉히고 그 광경을 말없이 바라보셨다.
나의 어린 시절, 가장 행복했던 날의 가장 슬픈 일로 남겨진 풍경
이다.
그때 어머니는 마흔 중반으로 병이 깊은 상태였다. 여자로서의 기
능도 상실한 채 삶의 의욕마저 잃어버릴 만큼 병고에 시달렸다. 그날
의 천렵은 그 와중에도 거를 수 없다는 어머니의 뜻에 따라 숙모들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더욱이 꽃 같은 기생들을 부른 것은 아무도
모르게 어머니가 독단적으로 하신 일이다.
그녀들의 활기찬 춤과 노래를 보고 들으며 이제 어머니는 젊지도
건강하지도 않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려는 것이었을까. 어쩌면 모
든 사람에게, 아버지에게까지도 늙고 병들어도 대쪽 같은 심지만은
변함없음을 보여주고 싶었던 자존심의 발로였는지도 모른다.
이틀 후, 나는 다시 그곳을 찾았다.
오후 3시의 거리는 늦은 잠에서 부스스 깨어나는 것 같다. 음식점
과 카페들은 드문드문 문이 열려 있다. 차가운 바람 속에서도 하얀
자태로 곧게 서 있는 ‘무명 여배우’는 아직 문을 열지 않았다. 서너
걸음 정도의 카페 앞을 지나는데 창으로 실내가 들여다보인다. 커튼
도 없이 작고 큰 세 개의 탁자와 스무 개 남짓한 의자가 놓인 작은 공
간이다. 벽에는 수채화 두 장이 표구 없이 걸려 있다. 어느 바닷가 도
시 풍경으로 전문 화가의 그림은 아닌 것 같다. 무명 여배우의 고향
이 바닷가일까. 아니면 이곳을 찾은 이방인이 두고 간 것일까.
메뉴판에는 ‘50종의 와인과 구은 치즈, 직접 뽑은 레귤러커피’가
전부다.
내부도 메뉴도 별다른 장식 없이 간단명료하다. 모두가 수사修辭로
포장하기에 급급한 세상에서 담백한 공간과 말들이 차라리 봄비같이
청신한 생명력을 갖는다.
‘사과 속에는 수많은 꽃들이 죽어 있다.’고 한다. ‘무명 여배우’라
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말할 수 있을 때까지 그녀의 가슴에는 얼마
나 많은 슬픔과 기쁨의 꽃들이 피고 졌을까. 그러나 배우는 매일 죽
어야 다시 살아날 수 있다. 무대가 아닌 현실이라 해도 그녀는 무명無
名이라는 죽음 같은 실패를 겪고 정직하게 말할 수 있기에 진실이라
는 아름다운 삶을 피워낼 수 있었다.
지금도 얼굴 모를 ‘무명 여배우’는 어느 무명 수필가의 시린 가슴
을 적셔주며 봄을 향해 말하고 있다.
“나는 무명 여배우입니다.”
이옥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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