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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과비평 2018년 05월호, 통권199호 I 세상 마주보기] 한복 사랑 - 변양섭

신아미디어 2018. 6. 26. 09:08

"한복은 약간 굽은 등을 가진 사람에게도 적당하다. 내 몸의 단점들을 살짝 감싸 빛솔같이 해 주는 한복을 나는 좋아한다."







   한복 사랑    -    변양섭

   나는 한복을 사랑한다. 한복 입은 내 모습을 보면 스스로 행복해진다. 한복은 그 옛날 1600여 년간 이어진 우리 민족의 고유 의복이다. 긴 세월 우리 선조들이 입었던 옷. 지금은 관리하기 쉽고 입기에도 간편한 옷에 밀려 명절이나 특별한 날에만 겨우 입는 실정이 되어버렸다.
   내 유년 시절 명절이 돌아오면 전날 밤부터 때때옷을 입어보고 내일을 기다리며 잠 못 이루곤 했다. 어느 날엔가는 색동저고리에 빨간 치마를 입고 조심성 없이 뛰놀다 치맛자락에 걸려 넘어지기도 했다. 치마가 찢기고 무릎이 깨져 어른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날들도 이제는 추억 속 한 폭의 수채화로 남아 있다. 어쩌면 한복을 입는 즐거움에 설이며 추석날을 더 기다렸던가 보다.
   밤늦도록 호롱불 아래서 한복을 짓던 어머니 생각이 난다. 재봉틀도 없이 바늘에 실을 꿰어 한땀 한땀 온 정성을 다해 바느질하시던 옛 모습, 그 안에는 어머니의 깊은 사랑이 함께 꿰매어져 가고 있었다. 중이 적삼, 여름엔 삼베나 모시로 옷을 지으셨고, 겨울엔 광목 속에 솜을 놓아가며 사계절 따듯한 마음을 담아내셨다. 예전에는 왜 하얀색으로 옷을 지었을까? 검은색이나 짙은 색이었다면 때가 탄 것도 얼룩진 것도 표가 덜 날 텐데, 은연중 백의민족이란 민족성이 배어서였을까?
   꿈 많고 청순했던 여고 시절 청명원에서 일주일간 숙박을 하며 예절교육을 받았다. 끝나는 날 어머니를 초청해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실습했던 큰절, 평절, 반절을 보여 드리기도 하고, 한식을 정성껏 차려놓고 변화된 우리들의 모습을 보여드렸던 생각이 난다. 친구들과 저고리 고름을 서로 매주며 열심히 연습했기에 지금도 고름 매는 것은 자신이 있다. 좌, 우 어느 쪽으로 치맛자락을 보내야 할지 몰라 당황하기도 했다.
   속곳에 속치마, 그 위에 치마, 속저고리 위에 저고리, 복잡한 옷차림이다. 긴 치마를 입었으니 밟히지 않고, 땅에 끌리지 않도록 조심 또 조심해야 한다. 저고리 위에 배자와 마고자를 입어야 하고, 남자들은 바지저고리 위에 조끼와 마고자를 덧입어야 하는 불편함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편한 것만을 선호하다 보니 언제부턴가 명절 때도 한복을 잘 입지 않게 되고 숫자가 점점 줄고 있어 생활에서 점점 멀어져 가고 있다. 나 또한 불편하지만 그래도 한복을 선호한다. 특별한 날이나 명절 친척의 결혼식에 열심히 한복을 차려입고 나간다. 가까운 사람에게 그것이 예의라는 내 나름의 생각 때문이다.
   요즈음은 고궁에서 한복을 입은 외국인이나 사람들이 기념촬영하는 모습을 볼 기회가 많아졌다. 고궁이나 문화의 날에 한복을 입은 사람은 무료입장을 시키기도 하며. 나라에서도 한복 입는 기회를 만들어 주는 편이다. 전통한복과는 많은 변화를 가져왔지만, 거부감 없이 일상에서 착용할 수 있는 생활한복 또한 우리 옷의 특징은 살아 있으니 다행스러운 일이다.
   더구나 평창겨울올림픽 개막식에 동정이나 고름 하나 없이 와이어와 구슬만으로 표현했던 선수단의 입장 시 피켓요원들의 드레스는 한복인 듯 아닌 듯했다. 그러나 벽화에서 영감을 받아 고려시대의 한복을 현대화한 한복의 변형이라고 한다. 정말 이름다운 요정의 옷이다. 아마 평창에 모였던 우리뿐 아니라 세계인도 그 아름다움에 매료되지 않았을까? 혹독한 추위를 감출 수 있도록 센스 있게 입은 의상과 예쁜 조바위를 쓰고 나타난 시상식 도우미들의 복장 또한 우리 조상들의 슬기를 보는 듯했다. 간편하게 입을 수 있는 생활 한복이며 개량 한복, 심지어 한복 드레스까지 나왔다. 얼음판의 꽃을 피워가던 피겨스케이팅, 민유라와 외국인 겜린이 입은 한복의 묘한 조화는 환상적인 모습이다. 다양하게 변해가는 우리 아름다운 한복의 국제화 시대를 실감할 수 있었다.
   해마다 겨울이면 전주에서 열리는 수필세미나에 꼬박 참여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한복을 입은 사람들이 그리 흔치 않았던 한옥마을이었다. 한복 대여점이 늘고, 젊은이나 학생들이 무리 지어 한복을 입고 사진 찍기에 여념 없는 것을 보며 나 또한 즐거웠다.
   작년 부활절 생활한복을 입고 찍은 사진은 흰 저고리에 붉은 치마가 배경과 잘 어우러져 나의 수필집 사진으로 올렸다.
   올해 부활절에 입을 요량으로 마음에 드는 한복을 한 벌 샀다. 정성 들여 옷을 차려입고 치마를 살짝 들어올리며 조심조심 발걸음을 옮기지만 몇 번 치마 끝이 밟히기도 하며 성당엘 갔다. 긴 시간의 부활 전야 미사가 끝나고 부활 축하 인사를 나누며, 신부님은 “오늘은 특별히 상을 세 분께 드리겠다.”라고 하셨다. 첫 번째, “부활절이면 잘 차려입던 한복이 줄어들기 시작했다.”며 한복을 입고 온 세 사람 중의 한 사람, 성당에 오신 분 중에 연세가 제일 높으신 분, 가족이 제일 많이 참석한 가정을 꼽으셨다. 한복 입은 사람 중 내가 ‘베스트 드레스’ 상을 받게 되었다. 한복은 이렇게 뜻밖의 행운을 주었다. 처음 몇 보이지 않는 한복 차림이 어색하고 쑥스러웠지만, 상을 받고 보니 역시 한복 입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생활한복이며, 전통한복을 즐겨 입는 내게 자부심이 생겼다.
   한복은 약간 굽은 등을 가진 사람에게도 적당하다. 내 몸의 단점들을 살짝 감싸 빛솔같이 해 주는 한복을 나는 좋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