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접 운전하며 보는 사계절의 강산은 얼마나 곱고 예쁘게 보일까? 무사고 운전 하기를 바라면서 늦게 공부하는 제자들을 다시 한 번 칭찬한다."
저도 운전해요 - 유종인
지난 늦가을, 오랫동안 소식을 나누지 않은 사람에게서 전화가 왔다. 받아보니 기쁨에 넘치는 목소리가 내 귓전을 울렸다. “선생님, 저도 운전해요.” 자신감 넘치는 기운이 나에게까지 전해져 기분이 좋았다. 몇 년 전 특별한 학교에서 반 년 동안 함께했던 나이 많은 제자들 중 한 명이었다.
학력인정학교인 N 초·중·고교가 우리 지역에 있어 제때 학교를 다니지 못한 사람들이 공부를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얻게 되었다. 일 년 동안 방학이 없는 탓에 초등학교는 4년, 중·고교는 각각 2년이면 졸업을 하게 되는 정규학교 형태였다. 초등교사 자리가 하나 비었다는 연락을 받고 그 학교에 갔다. 퇴직하고 오랜만에 교단에 서기도 했지만 어린 학생들이 아닌 나이 많은 학생들 앞에 서니 낯설고 당황스러웠다. 동심으로 돌아가 열심히 배우려는 50대에서 80대까지의 여학생들이 모여 있었다. 무덥던 유월 중순 어느 날, 평균 연령 예순여덟인 그들과의 동행이 시작되었다.
밝은 눈빛들과 마주하니 나도 모르게 걱정이 앞섰다. 한 학년에 25명씩 4학년까지 있었다. 나는 2학년을 맡아 한글과 수학을 가르쳤는데 수준들이 달라서 꽤나 힘들었다. 다른 학년 선생님의 자문도 듣고 늦깎이 학생들이라 그러려니 하고 이해하며 하루하루 보내니 더욱 정이 들었다.
넓은 운동장은 크고 작은 고급승용차에서부터 트럭, 오토바이 등 각종 교통수단의 전시장 같았다. 중고교 학생들은 운전을 하고 다니기도 하고 연령대도 초등보다 더 젊었다. 우리 반 학생들은 나이도 많았지만 한글을 익히지 못해 운전면허를 갖고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통학버스와 지인들의 차를 이용해서 함께 통학을 했지만 그렇게도 하지 못하는 학생들은 어려움이 많았다.
그 해결책으로 통학버스가 가지 않는 시골의 나이 많은 초등학생들은 담임선생님이 사는 곳까지 가서 태우고 와서 수업이 끝나면 데려다 주어야 했다. 월요일에서 금요일까지 이른 시간에 운전하여 학생들이 살고 있는 시골 마을에 들렀다. 학생 네 명을 태우고 가서 공부시키고 하교까지 책임을 지자니 부담스럽고 피곤했다. 각자의 집에 데려다주고 오면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 내 시간이 없어져버리는 것 같았다. 이래저래 그 일을 오래할 수 없었다.
학생들과 함께했던 아기자기한 이야기를 다 기억할 수는 없다. 그래도 시대와 가정환경 탓에 공부를 하지 못한 눈물겨운 사연을 들을 땐 나도 콧등이 시려오곤 했다. 더구나 여자로 태어난 이유로 제때 못 배운 게 한이 되어 늦게나마 학구열에 불탔던 애처로운 모습들이 더욱 눈물겨웠다. 유난히도 더운 여름날 선풍기 몇 대가 돌아가는 열악한 교실이지만 창밖의 파란 나뭇잎들이 골바람에 살랑거리고 여인들의 희망 섞인 웃음바람이 넘쳐 더위를 식혀주었다.
국어교과서의 단원별 문장을 쓰고 읽고 받아쓰기를 하며 점수를 주고 칭찬했다. 한 자라도 더 알고 싶어 하는 학생들의 의욕에 용기를 얻을 수 있었고 위안이 되었다. 함께 책 읽는 소리가 꼭 개구리 합창 소리처럼 들려오는 듯했다.
필기해 놓은 문장들을 두 번씩 반복해서 불러주며 천천히 받아쓰기를 진행하는데 수준 차이가 많아서 어느 학생이 아직 다 쓰지 못했는지 확인하느라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오십대와 팔십대의 속도가 다르다 보니 어찌할 것인가? 서로 이해하며 맞춰가는 수밖에……. 열 살 남짓 초등생 같은 마음의 학생들이 내가 지나가면 손으로 글씨를 가리면서 볼이 빨갛게 변하는 것을 보니 웃음이 났다.
동생과 친구처럼, 몇몇 분한테는 누나같이 대해 주며 함께 지내다 보니 가을이 훌쩍 지나고 눈 내리는 겨울이 왔다. 교실과 복도는 물론이고 화장실 청소당번을 정해놓고 깨끗한 환경을 꾸미던 일도 생각난다. 가정에서 갖가지 간식거리를 가지고 와서 정겹게 나눠먹던 모습들이 떠오른다.
그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면 내가 하루 두 번씩 내 승용차에 태우고 다녔던 네 명의 학생들이니 서로 미운 정 고운 정이 새록새록 들었다. 선생님과 제자가 매일 함께 얘기하며 등하교를 하다니 세상에 이런 사제지간이 또 어디 있겠는가? 꽃단장에 향수까지 뿌리고 멋을 부리다 조금 젊은 학생한테 핀잔을 듣던 할머니초등학생도 이따금 생각난다.
동승했던 육십 중반에 접어드는 한 학생이 똑똑하고 의지가 강해서 어느 날 한글을 다 익히고 나면 꼭 운전을 배우라고 권유했다. “예, 공부 열심히 해서 저도 운전면허를 취득해 선생님을 모시고 드라이브도 할게요!”라고 하며 수줍은 듯 자신 있게 말해서 꼭 그렇게 하라고 격려를 해주었다.
너무 오랜만에 교단에 서서 목이 터져라 열정을 다한 탓이었을까? 아니면 평생 아이들 가르치며 노래를 너무 많이 불러서인지 말을 많이 하면 목이 자주 쉬고 아팠다. 크고 작은 이비인후과를 여러 군데 방문해 보고 최종적으로 성대에 작은 물혹이 있어서 그렇다는 것을 알았다. 대학병원에서 수술 날짜를 잡아놓고 어쩔 수 없이 학교를 그만두기로 결심하였다. 학생들에게는 숨겨왔기에 이별이라는 것은 전혀 모르고 지내다가 헤어지는 날 모두들 깜짝 놀랐다. 그해의 마지막날 꼭 철부지 같은 제자들과 눈물 흘리며 아쉬운 작별을 해야 했다.
그리고 한 해 반이 훌쩍 지난 가을 날 야무진 행숙이 학생의 전화가 왔다. “선생님! 저도 운전해요!” “어? 드디어 면허를 땄네요! 축하해요, 고생 많이 했어요.”라고 말을 하고 마음속으로 박수를 쳐주며 기뻐했다. 환하게 웃는 당당한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 학생은 십여 년 전부터 그 학교를 다니고 싶었지만 주위 사람들의 이목이 두려워 망설였다고 했다. 늙은 나이에 무슨 학교를 다니느냐고 비웃을까봐 고민했지만 자녀들의 적극적인 응원을 받아들였단다.
직접 운전하며 보는 사계절의 강산은 얼마나 곱고 예쁘게 보일까? 무사고 운전 하기를 바라면서 늦게 공부하는 제자들을 다시 한 번 칭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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