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창적인 예술은 이렇듯 사고의 일탈로부터 창조된다. 일탈을 두려워하면 창조도 없다. 예술가들이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새로움을 찾아내지 못하는 보편적인 시각이 아닐까. 그래서 기존관념의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한 내 일탈의 날갯짓은 어제도 오늘도 멈추지 못하는 것이다."
일탈을 꿈꾸며 / 이정림
점심을 끝내자 누가 심리테스트를 하자고 나섰다. 잘 먹고 웬 심리 테스트인가 심드렁해 하자, 이건 미국 ≪타임스≫가 정확성을 보장한 자료라면서 신빙성을 보탰다. 테스트라는 것이 까다로운 설문으로 구성된 게 아니라 마음에 드는 숫자를 그냥 고르면 된다고 해서, 우리는 별 생각 없이 아무렇게나 번호를 찍었다. 그러자 그 숫자 속에 숨어 있던 내용이 나타났는데, 부모님께 효도하는 사람, 일을 매우 잘하는 사람, 교양 있는 사람, 의리 있는 사람, 매우 감정적인 사람, 등등의 답들이 나왔다. 그런 답은 별로 우리의 흥미를 끌지 못했다. 그 내용이 본인에게 그럴싸하게 들어맞는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허리를 못 펼 정도로 우리를 웃게 만든 것은 그 자리에서 가장 음전해 보이는 이가 뽑은 내용 때문이었다. 그가 뽑은 숫자는 3636이었는데, 내용은 ‘일탈을 갈망하는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그 의외의 결과에 놀라 다시 뽑아 보라고 재촉하자, 이번에 뽑은 숫자 4321에 숨겨져 있던 내용은 한술 더 떠 ‘불륜을 갈망하는 사람’이라고 나왔다. 이쯤 되면 재미로 시작한 놀이가 더 이상 웃어넘길 수만은 없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의 화제는 자연히 ‘일탈이란 대체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하는 이야기로 비약되고 말았다.
일탈이라고 하면 우선 도덕적인 탈선을 떠올리게 된다. 그래서 그런 답이 나오자 박장대소를 하고, 그 답을 뽑은 사람이 당황해 한 이유도 거기에 있었을 것이다.
오래 전에 내가 쓴 수필 <부부라는 것>의 내용이 새삼 생각이 났다. 아주 정숙해 보이는 여인도 남편의 육체 곁에서 또 다른 육체를 그리워할 수 있다는 비밀스런 감정을 갖는다는 내용이었다. 그 말은 남편만 외도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을 하기 위해 쓴 글이었는데, 부부라는 것은 마음속에서 부정(不貞)도 함께 느끼며 살아가는 그런 사람들이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부부란 하나이면서도 다른 개체이지만, 따지고 보면 다를 것이 조금도 없는 그런 관계라는 내용의 글이었다.
이따금 나도 위험한(?) 사랑을 하고 싶은 유혹을 느낄 때가 있다. 위험한 사랑이란 사회의 규범에서 벗어난 일탈의 감정이다. 그 일탈은 방어하는 이성을 무력화시킬 정도로 치명적인 매력을 지니고 있지만, 자신을 파멸케 하는 불행한 요소도 함께 지니고 있다. 한 시대를 풍미하던 선구자적인 여성들— 윤심덕·나혜석·김일엽, 그들은 그 일탈의 끝에서 얼마나 허망한 파멸을 맛보았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가끔 도덕적인 일탈에 빠지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가 있다. 그러나 그 유혹의 손을 잡으려면 저어하는 힘보다 더 강한 맹목성이 있어야 하는데, 아쉽게도 내게는 그것이 부족하다. 그리고 그 유혹의 손을 잡지 못하게 하는 결정적인 요소는 내 사고가 지극히 상식적이라는 것이다.
상식은 정답이다.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가려 주는 멘토와 같기 때문이다. 상식의 끈을 놓지 않으면 평생 내가 파멸의 구렁텅이로 빠질 염려는 없을 것이라는 이 안도가 나를 가끔 슬프게 한다는 것을 누가 알기나 할까.
그래도 나는 여전히 나비가 날갯짓을 멈추지 않듯, 일탈을 꿈꾼다. 일탈은 도덕적인 것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내 일탈은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보편적인 사유로부터의 자유이다. 평범한 사고의 틀에 갇히고 싶지 않은 내 정신은 그래서 늘 새로운 의미를 찾기 위해 자신을 각성시킨다.
문학도 결국 ‘낯설게 하기’에서부터 출발하지 않던가. 익숙한 것을 익숙하게만 보면 새로운 의미의 창조는 있을 수 없다. 익숙한 대상을 낯설게 보려는 사고의 일탈이 있어야만 독창적인 예술을 낳을 수가 있는 것이다.
피천득의 <수필>에는 덕수궁 박물관에 있는 청자연적에 대해 언급한 구절이 있다. 연적에 연꽃 모양을 가지런히 그려 넣었는데, 그중 하나만이 약간 옆으로 꼬부라져 있었다. 전체의 균형을 허물어뜨린 이 하나의 연꽃은 도공의 결정적인 실수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실수였다면 도공은 이 연적을 가마에서 꺼내자마자 깨 버리지 않았을까. 피천득은 이 연꽃을 ‘눈에 거슬리지 않는 파격破格’이라고 했다. 파격은 멋이다. 도공은 나란히 그려야 한다는 상식적인 생각을 버리고 파격으로써 일탈의 멋을 창조해 낸 것이다.
20대 때, 한국 화단의 원로인 이마동 선생을 알게 되었다. 선생이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학장으로 있을 때 학장실로 놀러 가면 차탁에 도자기 한 점이 놓여 있곤 했다. 그런데 그 백자 접시는 내가 보아도 정품이 아니었다. 그 접시는 귀가 일그러지고 운두에서 흘러내리는 선이 고르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선생은 그 접시가 가마에서 꺼내어 깨 버리기 직전에 건져낸 것이라고 했다. 화가의 눈에는 그 실패한 작품이 파격의 아름다움으로 비쳤던 것이다. 그래서 미술대학장실에는 불완전한 자기들이 마치 소중한 작품처럼 진열장에 모셔져 있었는데, 상식적인 눈에는 그 실패작들이 그저 아쉬운 그릇으로만 보였을 뿐이다.
‘동양에서 온 문화 테러리스트’라는 별명을 얻은 백남준도 고정관념을 깼기 때문에 세계적인 아티스트가 되었다. 누가 버려진 텔레비전으로 비디오 아트를 만들 생각을 했겠는가. 백남준의 스승인 작곡가 존 케이지는 피아노 앞에 앉아 4분 33초 동안 아무것도 연주하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고 한다. 그러나 아무것도 연주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그는 관객들이 들리는 음악뿐만 아니라 눈으로 보이고 몸으로 느껴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귀를 트여 준 것이고, 동양의 공空 사상을 예술로 풀어내 보여 준 것이었다.
독창적인 예술은 이렇듯 사고의 일탈로부터 창조된다. 일탈을 두려워하면 창조도 없다. 예술가들이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새로움을 찾아내지 못하는 보편적인 시각이 아닐까. 그래서 기존관념의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한 내 일탈의 날갯짓은 어제도 오늘도 멈추지 못하는 것이다.
이 정 림 ------------------------------------------------------
『수필문예』로 등단(1974), 한국일보 신춘문예 수필부문 당선(1976), 한양여대 문예창작과 강사, (현재) 계간『에세이21』 발행인 겸 편집인, 수필집 『당신의 의자』외 3권, 평론집 『한국수필평론』외. 이론서 『인생의 재발견-수필쓰기』(2007. 랜덤하우스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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