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시간을 선물해 준 인사들, 그 착각이 주는 행복은 신의 선물이다. 쇼펜하워의 말이 생각난다. ‘우리는 다른 사람과 같아지려다가 자신의 3/4을 잃어버린다.’ 어쩌다 같은 자리에 앉았다고 격이 같아지는 것이 아니다. 기억의 조각을 퍼즐해 본다. 흐린 기억, 조연현 선생님은 나에게 가장 좋은 선물을 주셨다. 기분 좋은 착각, 나는 지금도 학생이다. 名士, 그 기억의 램프는 예술이다."
名士, 그 기억의 램프 / 이명희
기분 좋은 착각…, 그것은 미학의 원소다. 예술과 사랑이 그렇다.
얼마 전 서재를 정리하다가 빨간 소책자를 발견했다. 76년 발간된 「名士 에세이集」이었다. 우선 표지, 정물화가 눈을 끌었다. 작은 청색탁자 위 화병과 가늘고 긴 창으로 들어온 꽃밭, 그 착시효과 기법이 좋았다. 동전 크기의 원 안에 여인의 옆모습 실루엣은 책의 매력을 더해 준다, 열어보고 싶게…. 커피색이 된 종이 향도 좋다.
목차를 보다 놀랐다.
문학평론가 조연현 선생의 수필 「세월의 앙금」 中에서
二月 二十五日
통 기억이 흐리기만 했다
나의 건망증은 이 정도가 아니다.
尹柄魯씨 부인을 두 번이나 못 알아보고 부끄러운 실례를 한 일도 있다.
신속, 정확, 핵심으로 일축하는 냉철한 분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그 분의 일기를 통해서 인간적인 매력을 엿볼 수 있게 됐다. 스스로에겐 그렇게 소심한 면이 있다는 것이….
기억은 뇌건강의 문제가 아니라 조명의 문제다. 무대에 따라 사물은 달리 보인다.
어느 날 우연히 명동거리에서 조 선생을 뵙게 됐다. 새 옷을 찾아 입고 미용실에서 나오는 길이었다.
“안녕하세요?”
“어…, 학생!”
“?…”
여자는 남편과 있으면 주부로, 아기와 있으면 애기엄마로, 이렇게 혼자 걸어가는 여성은 솔로로, 그 배경에 따라 관념적 인상이 뇌 맵에 그려지는 것이다.
내가 처음 조연현 선생을 뵌 것은 신혼 때, 그 댁의 신년 문인초대 잔치에서였다. 한복을 입고 갔었다.
그 후 우리 아이 돌, 금호동에 새로 지은 경전주택으로 이사를 하고 집들이 겸, 문단 어른을 모셨다.
“윤 선생은 좋겠네요. 부인도 젊고 집도 잘 꾸민 새 집이고…,” 조 선생님은 정원수가 있는 넓은 잔디밭이 마음에 드시는 듯했다. 대지가 98평이었다. 그때 박재삼 시인이 금호 종점에 살았고 한참 후에 들으니 이유식 문학평론가도 문단 신인시절, 시골에서 상경하여 박 선생 댁 근처에서 하숙생활을 했다고 한다. 우리 집에도 왔었다고 하는데 기억이 없다. 그 때는 풋내기 새댁이었으니 두루 아우르지 못한 게 아쉽다.
지금 기억의 조각들을 모아 보면 어설프고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참 많다.
어느 분의 책 출간을 축하하는 조촐한 자리였다.
조연현 선생을 비롯한 문학평론가들과 조병화 시인도 함께 한 좌석이었다. 시인인가 하는 여자들이 민망한 농담을 늘어놓았다. 취기였을까, 어느 안전인데…. 손으로 턱을 고인 채 살짝 꼬고 앉아 있던 조연현 선생이 정색을 하고 불쑥 말했다.
“우리 문인들 부인 중에 미인 셋이 있어요. 최일남 소설가 부인, 문덕수 씨 부인, 윤병로 부인예요.”
여자들이 조용해졌다.
조병화 시인이 미소와 술잔을 들어 올렸다.
옛날 불빛이 새어나오는 인사동 거리는 아름다웠다.
멘델스존의 누나, 파니는 음악 신동이었지만 당시에는 여자가 무대에 서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음악을 접고 결혼을 해서 평범한 생활을 했다. 그러나 그는 작곡을 하며 집에서 일요 음악회를 열어 저명 예술인들을 초대했다. 파니는 괴테에게서 극찬을 받았다. 그의 미모와 피아노 연주는 당대에 널리 알려졌지만 괴테의 극찬은 그녀의 삶을 빛나게 했다. 명곡을 낸 배경이다.
즐거운 시간을 선물해 준 인사들, 그 착각이 주는 행복은 신의 선물이다.
쇼펜하워의 말이 생각난다. ‘우리는 다른 사람과 같아지려다가 자신의 3/4을 잃어버린다.’ 어쩌다 같은 자리에 앉았다고 격이 같아지는 것이 아니다.
기억의 조각을 퍼즐해 본다. 흐린 기억, 조연현 선생님은 나에게 가장 좋은 선물을 주셨다. 기분 좋은 착각, 나는 지금도 학생이다.
名士, 그 기억의 램프는 예술이다.
이 명 희 --------------------------------------------
1999년<한국수필>(수필), <한맥문학>(시)으로 등단, 기독시인협회 이사, 한국수필자문위원, 한국문학사료 발굴위원, 저서 : 시집 <시가 열리는 거리>, <그리움, 그 행복>, 수필 <딸이 딸에게>, <추억의 문인들 그리고...>, <행복한 오후> 외, 수상 : <순수문학상>, <한국수필문학상>
'계간 계간문예 > 계간문예 본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계간 계간문예 2015년 봄호, 시] 감나무 아래서 외 1편 - 강별모 (0) | 2015.06.26 |
---|---|
[계간 계간문예 2015년 봄호, 수필] 일탈을 꿈꾸며 - 이정림 (0) | 2015.06.16 |
[계간 계간문예 2015년 봄호, 수필] 봄바람이 분다 꽃피워야겠다 - 김영곤 (0) | 2015.06.04 |
[계간 계간문예 2015년 봄호, 수필] 성장통 - 김기자 (0) | 2015.06.04 |
[계간 계간문예 2015년 봄호, 수필] 진화의 덫 - 김경순 (0) | 2015.04.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