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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계간문예 2015년 봄호, 수필] 봄바람이 분다 꽃피워야겠다 - 김영곤

신아미디어 2015. 6. 4. 07:20

"봄이다. 햇살에 기대어 아기처럼 고요하게 잠들고픈 봄이다. 봄은 겨울을 털고 어제를 떠나보내고 당당히 일어선 삶이다. 폭설을 털고 한파를 잠재우고 절망을 꺾고 찾아오는 봄이다. 아픔을 통과해야 오는 봄이다. 눈물을 흘려보았기에 세상에서 가장 진하고 향기로운 봄이다. 와서 따뜻한 숨결로 생명을 불어넣는다. 그로인해 산천초목마다 보석 꽃을 왈칵 쏟아붓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혀 소란스럽지 않은 건 웬일일까. 오히려 한 톨의 소음조차 첫출발을 하는 이에게 방해될까봐, 거대한 적막으로, 위대한 낮아짐으로 봄이 온다. 이런 숭고한 봄을, 우리는 얼마나 더 오솔길을 걸어야 다다를 수 있을까. 해마다 봄은 오는데 언제나 겨울처럼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반면에 사계절 내내 가슴 속에 봄바람이 불고, 꽃이 피고, 별이 빛나는 사람이 있다. 봄바람이 분다 꽃피워야겠다 날마다, 남은 날의 처음처럼."

 

 

 

 

 

 봄바람이 분다 꽃피워야겠다       /  김영곤

 

   오늘도 여전히 겨울을 껴입은 채, 공연을 하고 있었다. 보석같은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창문 너머로 누군가가 엿듣고 있었다. 공연을 마치고 가다가 나도 모르게 주차한 기흥휴게소. 곧바로 내리려고 했으나 아침부터 지금까지 집요하게 내 생각뿌리까지 적셔오던 보슬비, 잠시 망설였다. 비를 지워야 할 우산이 없었던 것이다.
   잠깐만……, 그러고 보니, 아, 이건 봄비 아닌가!, 봄이구나, 봄이 와 있었구나!
   문을 활짝 열고 와락 봄비를 껴안았다. 함께 글썽이며 무작정 걸었다. 어디로 갈까 서로 묻지도 않았다. 휴게소 옆에는 자그마한 산이 연결되어 있었고 그 동산 오솔길을 걷고 있었다. 거기엔 목련과 벚꽃도 두꺼운 겨울바람을 벗고 싱싱한 봄으로 화장하고 있었다. 나도 탐스런 봄을 꽉꽉 눌러 담고 또 담았는데, 내려오는 길은 오히려 민들레 씨앗처럼 가벼웠다. 이제야 봄이 내게로 온 것이다. 내게서 봄향기가 흐르고 다시 새싹이 돋는다. 그리웠던 봄, 그리웠던 나를 다시 되찾는다. 나도 봄이다. 다시 시작이다.
   해마다 봄은 겨울을 밑거름으로 새 생명을 일으키며 꽃피운다. 그렇다면 이런 기적을 일으키는 봄을, 누가 먼저 맞이할까 궁금해진다.
   ‘봄 사랑이 알큰하게 피어난다 알큰한 그 숨결로 남은 눈을 녹이며 더 더는 못 견디어 하늘에 뺨을 부빈다(미당)’는 매화. 봄햇살로 푸짐한 노란불꽃 지펴놓는 산수유꽃, 생강나무꽃, 뒤를 잇는 개나리꽃. 이에 뒤질새라 앙증맞게 강아지꼬리를 흔들며 봄 길목에 서성대는 버들강아지, 그리고 점점 붉은 가슴으로 타오르게 하는 진달래꽃, 철쭉꽃의 향연. 심지어 참나무에 얹혀 살아야 하는 겨우살이도 꽃을 피운다. 이른 봄부터, 못난이 애벌레에서 화려한 변신에 성공한 무당벌레와 노랑나비들도 봄을 활짝 맞이한다. 저멀리 섬진강에도 봄철 산란기를 맞아, 남해로 내려가서 살던 황어들이, 아직은 차가운 물을 힘차게 거슬러 올라온다.
   그런데 이렇게 화려한 봄의 무대, 그 뒤안길에서, 이른 봄부터, 먼저 봄이 되고자 고군분투하는 야생초를 소홀히 해선 안될 일이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자세히 보지 않으면 그저 잡초일 수밖에 없는 존재 아닌가.
   눈을 녹이며 피어난다는 복수초는 얼지 않으려고 스스로 몸 온도를 높인다. 그래서 작은 곤충이 찾아와서 몸을 녹이면서 꽃가루받이도 도와준다. 복수초의 황금빛 꽃잎은 햇살이 닿으면 금잔 모양이 된다. 아, 봄햇살 품은 금잔을 들고 다같이 축배를! 먼저 체온을 나누고자 하는 가슴에, 먼저 봄이 기웃거리는 것이리라.
   한편 노루귀는 늘씬한 몸매를 자랑하고 싶지만 꽃샘바람을 피하려고 털을 달고 나온다. 그리고 큰 나무가 봄햇살을 독차지하기 전에 서둘러 가랑잎을 비집고 올라온다. 사회적 약자로서 살아남기 위한 치열한 몸부림인 것이다. 강한 식물을 이기려면 ‘힘’이 필요한 게 아니라 ‘극복하는 지혜’가 필요한 것이다. 누구든 자신만의 명확한 생존전략이 없으면 어디서든 살아남기 힘들리라.
   바람꽃은 어떠한가. 봄바람의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바람처럼 꽃을 피운다. 바람의 신은, 서로 뜨겁게 사랑했으나 바람꽃이 되어버린 여인 아네모네를, 해마다 잊지 않고 서둘러 춘풍을 보내어 지상의 별꽃으로 피어나게 한다. 그녀를, 그대를, 나를 못견디게 보고 싶어 봄바람이 부는 것이다. 그러나 봄꽃을 피우고 안 피우고는 나의 기다림이 얼마나 간절한가에 달려 있다.
   그 외에도 수많은 야생초들이 빈 들마다 봄을 실어나르고 있다. 그들은 짓밟힐수록 더욱 향기가 짙어진다. 삶이 가파를수록 더욱 깊고 강하게 뿌리내린다. 그리고 다시 지워지지 않는 봄의 밑그림이 되어주는 그들, 경외의 기립박수를 보낸다.
   작년 3월초, 막차를 타고 서울에서 천안에 도착하니 밤 12시가 넘었다. 20분 걸으면 충분한 거리라서 여유롭게 걷다가 길을 잃고 말았다. 1시간이 지나서야 도착한 집 근처. 바로 그때, 올려다본 밤하늘 때문에 얼마나 깜짝 놀랐던지, 그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하늘이, 그 별들이, 너무나 가깝게 내려와 있어서 뻗으면 손에 잡힐 정도였다. 그랬다. 도시 불빛이 있을 땐 맨눈으로 40여 개의 별이 보이지만 없을 땐 4천 개까지 보인다고 한다.
   달력이 전혀 없는 옛날 사람들에게는 봄을 알려주는 중요한 별이 ‘아르크투루스’였다. 아라비아인은 ‘하늘의 수호성’으로, 이집트인은 ‘신전의 별’이라고 신성시했던 별, 전체 별 중에 세 번째로 밝은, 목동자리에 있는 별이다. 이 별과 함께 사자자리의 레굴루스(20위), 처녀자리의 스피카(16위), 이 세 별이 봄의 길잡이가 되어준다. 서로 손을 맞잡으면 ‘봄의 정삼각형’이 된다. 이들은 모두 더 멀리 있을 뿐, 사실은 태양보다 1만 배 이상 더 밝다. 황홀한 봄의 절창이, 신비스런 봄의 호수가 저 하늘 높이에도 출렁이고 있다. 그 위로 북두칠성이 봄을 퍼마시려고 호시탐탐 맴돌고 있다. 그렇다. 하늘에서도 봄을 맞이하고 별빛 영롱한 꽃을 피운다.
   봄이다. 햇살에 기대어 아기처럼 고요하게 잠들고픈 봄이다. 봄은 겨울을 털고 어제를 떠나보내고 당당히 일어선 삶이다. 폭설을 털고 한파를 잠재우고 절망을 꺾고 찾아오는 봄이다. 아픔을 통과해야 오는 봄이다. 눈물을 흘려보았기에 세상에서 가장 진하고 향기로운 봄이다. 와서 따뜻한 숨결로 생명을 불어넣는다. 그로인해 산천초목마다 보석 꽃을 왈칵 쏟아붓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혀 소란스럽지 않은 건 웬일일까. 오히려 한 톨의 소음조차 첫출발을 하는 이에게 방해될까봐, 거대한 적막으로, 위대한 낮아짐으로 봄이 온다. 이런 숭고한 봄을, 우리는 얼마나 더 오솔길을 걸어야 다다를 수 있을까. 해마다 봄은 오는데 언제나 겨울처럼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반면에 사계절 내내 가슴 속에 봄바람이 불고, 꽃이 피고, 별이 빛나는 사람이 있다.
   봄바람이 분다 꽃피워야겠다 날마다, 남은 날의 처음처럼.

 

 

김 영 곤  ------------------------------------------------

   월간문학 신인작품상 수필 당선, 한국문인협회, 종로문인협회, 대표에세이 및 국제문학예술협회 회원, 매직어린왕자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