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수필과 비평/수필과비평 신인상 수상작

[월간 수필과비평 2015년 5월호, 제163회 신인상 수상작] 그날의 실수 - 이윤희

신아미디어 2015. 5. 1. 15:57

"수납장 속의 수많은 흔적 중에는 그 댁에 사용했던 천 조각도 있다. 창을 가리기엔 작고, 거실 탁자 위에 얹을 러너로는 충분할 것 같다. 오래전에 손놓은 일이지만 이젠 눈대중으로도 용도와 치수를 가늠해 버린다. 스물세 살 된 작은아이가 서너 살 되던 그해, 그녀의 뱃속에는 첫아기가 갓 들어섰다고 했다. 형형색색인 젊은 날의 내 삶 조각을 펼쳐본다. 길지 않은 인연으로 스쳐 간 그 친구, 결 곱던 그녀는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지금도 부끄럽던 그날의 실수를 기억하고 있으려나."

 

 

 

 


 그날의 실수       -  이윤희


   매서운 칼바람이 창가에 서성이는 햇살 속을 비집고 든다. 홑이불 자락같이 얇은 커튼은 찬바람에 못 이겨 맥없이 팔랑인다. 이럴 땐 도톰한 이중직 커튼이면 참 좋으련만. 뒷방 수납장에서 한때 만지작거리던 자투리 천들을 뒤적인다. 빼곡한 조각 천들을 보니 새삼스럽다. 저 많은 천으로 내가 작품을 만들었다니 믿기지 않는다. 홈패션에 필요한 여러 가지 부속품들과 구매 영수증 한움큼도 그대로 있다. 오래전의 일들이 머릿속에서 분자식을 만들며 바삐 움직인다.
   “짚신장수 헌신 신는다.”라는 말이 당시의 내 처지와 꼭 맞아떨어졌다. 새로운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열심히 페달을 밟으면 큰아이는 제 것인 줄 알고 신이 났다. 자동차가 그려진 사내아이용 폭신한 침구 세트를 다른 사람이 와서 가져갈 때마다 아이는 실망하는 기색이었다. 내 아이에게 주고 싶지만 정작 그리하지 못했다.
   분양받은 아파트에 치장할 커튼 비용은 만만치 않았다. 입주할 때 장식해야 할 커튼값을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고 말하기도 했다. 인테리어 디자인에 관심이 많던 나는 직접 제작하려고 학원에 다녔다. 배워둔 게 아까워서 자잘한 천으로 집 안팎을 꾸몄더니 주위 사람들의 주문이 이어졌다. 이름이 알려진 홈패션 가게보다 훨씬 값싸고 정성이 배어 있다며 만족스러운 대가를 챙겨 주었다. 남은 재료는 소품을 만들어 공짜로 주기도 했다. 계획에도 없던 돈벌이가 생겼으니 들어오는 주문을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남의 것을 꾸며주는 일은 적잖게 신경이 쓰여 막상 부탁을 받게 되면 머뭇거려졌다.
   하루는 큼직한 일감을 주문받았다. 지인이 시댁을 새로이 장식해 드리고 싶다며 나에게 코디네이터 역할을 요청했다. 퇴근 후 같은 취미를 즐겼고 서로의 가치관 정립에 진정한 조력자 역할을 했던 친구였다. 티끌 하나 보기 힘든 차분한 그녀가 무척 조심스러웠다. 숙련된 장식 가게를 권했으나 내가 적임자라고만 부탁했다.
   그곳은 구형 단독주택인데 면적은 넓지만 쓸모없는 공간이 많고 작은 창문도 많아 치수를 재야 할 곳도 여러 군데였다. 견본 책자를 본 그 댁 어르신은 커튼 색상을 골고루 원했다. 단일 색을 선택하면 통일감을 주어 기품이 있고 재료비 부담도 적다. 재단 후 못 쓰게 되는 자투리 천 활용도가 높기도 하여 이런저런 장단점을 조심스레 설명하는 나에게 비용은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거실, 안방, 작은방 순으로 용도에 알맞은 디자인을 선택하여 재단했다. 하얀 속지에 드문드문 놓인 자수 위를 가위는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신나게 나아갔다. 우아하게 날염된 값비싼 커튼지도 삭둑삭둑 두 동강을 내어버렸다. 커튼의 생명은 적절한 간격과 주름 너비에 달려 있다. 저택에 드리워질 멋스러운 실루엣을 상상하며 열심히 주름을 잡아댔다. 규모가 큰 집인 만큼 일거리가 생각보다 많아 점심 끼니를 거른 줄도 모르고 일했다. 주어진 시간 내에 마무리해야 하므로 쉬어 가며 할 수 없는 조바심이 일었다. 자그마한 소품을 재미 삼아 만들 때와는 달리 대폭의 커튼 천은 방 하나를 차지했다. 대형 진열장만 없을 뿐 홈패션 가게와 다를 바가 없었다.
   세 살배기 아이는 먹던 과자를 손에 꼭 쥔 채 재단해 놓은 천 위에서 잠이 들었다. 내가 점심을 걸렀으니 아이도 굶은 셈이다. 다음날은 안 가려고 떼쓰며 울어대던 작은아이를 놀이방에다 떼어 놓고 재봉틀을 열심히 밟아댔다. 다행히 약속 날짜를 넘기지 않고 일을 끝마칠 수 있었다. 초보자인 나에게 큰 일감을 맡겨준 그녀가 고마워 휴지케이스와 식탁보도 덤으로 만들었다. 완성된 작품을 우리 집 거실 창에 걸어 보았다. 마음에 쏙 들었다. 흡족한 기분으로 그 집으로 향했다.
   창틀 전문가가 커튼 걸이를 설치하는 동안, 작은 주방 창에 여분의 천으로 장식용 커튼을 즉석에서 꾸몄다. 식탁보와 소품도 펼쳐내 보였다. 그 댁 식구들은 놀라며 좋아했다. 익숙한 사람에겐 별것 아니지만 모르는 사람은 신기한 모양이었다.
   거실 커튼을 걸기 시작했다. 한 가닥씩 핀으로 걸어 올릴 때마다 커다란 창 위에 드리워지는 명암이 멋스러웠다. 실루엣 끝을 쫓아가던 내 시선이 맨 아랫단에 멈춰 섰다. 그 순간,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댕강 올라간 커튼 자락 아래로 벽과 마룻바닥이 훤히 보였다. 우리 집에서 꼭 맞았던 커튼은 제 주인도 못 알아보고 따로 놀았다. 일반주택과 아파트의 천장 높이가 달랐던 것이다. 모든 건축물의 높이는 동일하다고 단정해버린 것이 큰 실수였다.
   초보 실력자의 반전은 방금 반색하던 그 댁 식구들의 얼굴에 짜증을 불렀다. 그 댁에는 혼사가 예정되어 며칠 후 손님을 치러야 했다. 처음부터 무리한 작업이었다. 욕심이 과했다는 깨달음 외에는 그 무엇도 탓할 일은 없었다. 잘못은 온전히 나의 몫이었다. 좋아했던 나를 기어코 선택해 준 그녀를 위한다면 일의 경중에 따라 현명한 판단을 내려야 했었다. 그 순간의 나는 내가 아니고 싶었다. 퇴근 후 같이 공부하며 꿈을 키우던 그녀와의 관계를 떠올리면 내 속은 다 빠져나가고 껍데기뿐이었다. 그녀의 굳어버린 표정은 고가의 커튼값이 아까워서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거의 완벽하리라 여겼던 내게서 얻은 실망감이 더 컸을 것이다.
   자신감으로 꽉 찼던 심신에 충격이 가해졌다. 며칠을 끙끙 앓았다. 한 지붕 아래 사는 사람이 못 알아차릴 수가 없을 터였다. 규모가 큰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했다. 몸이 약한 나는 자그마한 소품이나 만지작거리기에 딱 맞는다고 정문일침을 가했다. 집에서 아이나 잘 돌보는 게 덕이었다. 이것저것 욕심내다 보면 두 마리 토끼를 모두 놓치는 격이 되고 말 일이었다. 경험이 부족해서 저지른 실수라고 돌리고 마는 건 나 자신을 위로하는 말뿐이었다.
   부족했던 기술로 겁 없이 남의 집 코디네이터가 되어 망친 일이 내 평생의 잊을 수 없는 교훈으로 남아 있다. 요즘, 뉴스 보기가 두렵다. 비전문가가 전문가로 둔갑하고, 원칙과 규정을 무시하여 사상누각으로 메꾸어 나가는 각종 부실공사가 국민의 생명을 위태롭게 하였다. 어떤 분야이거나 전문성은 있게 마련이다. 소박하고 적은 수입이지만 만족감을 주는 것이 내게 꼭 맞는 일이며 재미와 보람도 함께할 것이리라.
   수납장 속의 수많은 흔적 중에는 그 댁에 사용했던 천 조각도 있다. 창을 가리기엔 작고, 거실 탁자 위에 얹을 러너로는 충분할 것 같다. 오래전에 손놓은 일이지만 이젠 눈대중으로도 용도와 치수를 가늠해 버린다. 스물세 살 된 작은아이가 서너 살 되던 그해, 그녀의 뱃속에는 첫아기가 갓 들어섰다고 했다. 형형색색인 젊은 날의 내 삶 조각을 펼쳐본다. 길지 않은 인연으로 스쳐 간 그 친구, 결 곱던 그녀는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지금도 부끄럽던 그날의 실수를 기억하고 있으려나.

 

 

이윤희  -----------------------------------------
   수필문예대학 수료, 수필문예회, 수필미학회, 경산문협 회원.

 

 

당선소감


   거대한 여객기가 망망대해에 굉음을 울리면서 떨어지더니 바닷속으로 흔적 없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꿈이었습니다. ‘반드시 길할 것’이라는 해몽을 얻었습니다. 며칠이 지나고 받은 축복은 바로 등단 소식이었습니다. 가장자리에서만 서성이던 저에게 성대한 기회를 주신 심사위원님들께 머리보다 가슴으로 글을 쓰겠다는 약속을 합니다. 길잡이가 되어주신 선생님들과 문우님들에게 기쁨을 함께하고 싶습니다.
   유채꽃 군락을 만났습니다. 지나치기 아까워 사진기를 챙겨서 노란 물결 속으로 걸어갔습니다. 수많은 꽃이 눈부신 햇살을 받아 형형색색의 별천지였습니다. 봄꽃들의 감미로운 합창에 내 마음도 출렁거렸습니다.
   수필은 사람 사는 이야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타인의 글 속에는 나의 삶도 숨을 쉬고 있었습니다. 채우기에 바빴던 나를 비춰주고 비워주는 거울이기도 했습니다. 숨죽였던 나를 일깨워 용기를 주기도 했습니다. 나를 넘어 독자와 혼연일체를 이루는 격조 있는 글쓰기에 매진하리라 다짐해 봅니다.
   노란 나비들이 날아간 자리, 올해는 근교 유채밭에 꽃이 유난히 만발했습니다. 꽃봉오리들이 바람결에 일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