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수필과 비평/수필과비평 신인상 수상작

[월간 수필과비평 2015년 6월호, 제164회 신인상 수상작] 하얀 자전거 - 고연숙

신아미디어 2015. 6. 5. 19:29

"산책하러 간 공원 입구에 하얀 자전거가 한 대 서 있다. 버려져 낡은 듯 했지만 가까이 가보니 아직도 쓸 만한 자전거다. 주인 잃은 자전거는 지나간 시간을 생각하듯이 망연히 서 있다. 자전거 위로 깊고 쓸쓸한 가을 하늘에서 낙엽이 하나 툭 떨어진다. 떨어지는 늦가을 낙엽과 함께 저 자전거마저 어디론가 떠나버리고 나면 이제 다시는 자전거 꿈을 꾸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든다."

 

 

 

 

 

 하얀 자전거        -  고연숙


   아직도 나는 자전거를 타지 못한다. 자전거를 타지 못하면서도 어린 시절 꿈속에서는 걸핏하면 자전거를 타고 어딘가로 떠나는 꿈을 꾸었다. 자전거를 타고 바다 건너 어디론가 떠나기도 했고 달나라를 향해 날아가는 꿈을 꾸기도 했다.
   자전거는 늘 꿈과 추억이었으며 아픔이었다. 자전거를 타고 싶었지만 우리 집엔 자전거가 없었다. 아버지에게 자전거를 사달라고 매달려보았으나 엄격한 아버지가 자전거를 사주실 리 만무했다. 여자아이들이 치마를 펄럭대면서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것을 용납하지도 않으셨거니와 아버지는 자전거 이야기만 나오면 화부터 내셨다.
   자전거는 어린 시절의 아련한 추억을 불러일으킨다. 지난 시간을 되돌릴 수 없듯이, 이제는 자전거를 탄다는 것이 엄두가 나지 않기 때문에 더욱 그런지도 모르겠다. 내 오른쪽 무릎에는 꽤 큰 흉터가 하나 있다. 열 살쯤에 동네 오빠의 자전거를 빌려 자전거 타는 것을 배우다가 생긴 상처다. 뒤에서 자전거를 잡아주던 오빠가 없어진 것을 알아챈 순간 허둥대다가 바윗돌에 부딪히면서 나뒹굴어지고 말았다. 그때 일 이후로 아버지 앞에서 자전거 이야기를 꺼내면 불호령이 떨어졌고, 그 사건은 지금까지도 깊은 마음의 상처로 남아있다. 그러면서도 자전거에 대한 동경은 더욱 깊어져만 갔다.
   아이들과 뒷골목이나 놀이터에서 놀던 시절, 자전거를 마음대로 타고 다니는 친구들은 늘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친구들이 타고 달리던 파랑색, 노란색, 하얀색 자전거는 오랜 기다림 뒤에 찾아오게 될 무지개와 같은 것이었다. 파랑색 자전거를 타고 쌩쌩 달리는 친구를 바라볼 때면 하늘을 날거나 물결이 찰랑대는 바다를 신나게 헤엄치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노란색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친구를 보면 형형색색의 꽃이 피어 있는 꽃밭 속을 훨훨 날아다니는 노란 나비를 바라보는 것 같았다. 하지만 하얀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친구를 바라보면, 그들이 저 멀리 보이지 않는 곳으로 훨훨 날아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얀 자전거를 보면 먼저 저세상으로 떠난 동생이 떠오르기 때문이었다.
   내가 여섯 살 때 태어난 남동생은 워낙 잘 생겨서 동네사람들이 모두 부러워했을 정도였다. 간신히 걸음마 떼기 시작할 즈음에 아버지는 흰색 세 발 자전거를 사가지고 오셨다. 세발자전거를 열심히 타고 다니던 동생이 어느 날 저녁에 열이 펄펄 끓어 병원에 급히 달려갔더니 폐렴이라는 것이었다. 동생은 입원한 지 일주일 만에 저세상으로 떠나고 말았다. 흰 눈이 펄펄 내리던 날 가족들이 오열하는 가운데 동생과 함께 흰색 세발자전거도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
   동생의 하얀 자전거에 대한 아픈 기억 이후 나는 자전거를 타고 달나라로 날아가는 꿈을 자주 꾸곤 했다. 영화 <이티>에서 자전거를 타고 달나라로 날아가는 장면을 보았을 때의 충격을 나는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자신들을 억압하는 어른들을 따돌리고 아이들과 함께 자전거를 타고 달나라로 날아오르는 이티의 모습은 정말 환상적이었다. 이 복잡한 세상을 떠나 자전거를 타고 아이들과 함께 달나라로 달아나는 꿈을 꾸는 날이면, 나는 학교에서 아이들의 손을 더욱 꼭 쥐어주곤 했다. 나는 위선적인 어른들의 대열에서 빠져나와 아이들과 함께 이티 편이 되고 싶었다.
   얘들아, 자전거를 타고 너희들과 함께 달나라로 갈 수는 없지만 너희들과 손잡고 걷고 싶구나. 지금도 첫새벽 맨발로 너희들에게 다가가고 싶다. 너희들 속에는 내가 가야 할 길이 있고 가서 닿아야 할 자리도 있다. 학교의 화단 가득 금빛 물방울을 튕기며 피어나는 금잔화를 뒤로 하고 너희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가고 나면,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텅 빈 교실의 빈 책상 앞에 쓸쓸히 서 있곤 했단다. 이제 갓 피어난 새순같이 여리고 순수한 마음들 사이에서 나는 어떤 존재였을까 생각해본다. 때로 너희들에게 좀 더 가슴을 열어 따뜻이 껴안아주지 못한 나의 분필 묻은 손이 부끄럽구나. 자연은 그냥 그대로 있어도 완벽한 조화이고 아름다움이듯이, 너희들은 그대로 있어도 순진무구함이고 희망이었다. 너희들에게 자연스러움이 아닌 억지스러움을, 내용이 아닌 형식을, 희망이 아닌 절망을 가르쳐 준 것은 아닌지 두려울 뿐이다.
   그늘 아래 서 있는 자전거는 누군가의 기다림이 되어주기도 하지만, 누군가의 그리움이 되어주기도 한다. 가끔 자전거 둥근 바퀴 사이로 지나온 시간을 되돌아본다. 두 바퀴가 구르는 윤회 속에는 아득한 기다림과 그리움의 시간들이 모였다 흩어진다. 삶의 흔적과 같은 자전거는 시계의 태엽을 되돌리듯 새로운 시간을 향하고 있다. 시간도 흐르고 물도 흘러가버리지만 지나온 삶의 흔적은 자전거의 발자국과 같이 우리의 마음속에 그대로 남아 있다. 오늘도 자전거는 달리지만 우리들 인연의 고리는 저 멀리 흩어져 있다. 해 질 녘 돌아가야 할 집은 저기 있는데, 정적같이 다가오던 어둠을 바라보면서 그냥 먼 길을 달리는 자전거가 되고 싶었다. 이 세상의 모든 아픔과 운명의 굴레를 풀어내고 영원으로 향하는 자전거를 타고 어디론가 달려가고 싶었다. 정거장과 이정표가 없어도 끝없이 달리는 두 개의 바퀴처럼, 저 하늘과 바다로 이어지는 영원의 길로 날아가고 싶었다. 이제 살아온 날보다는 살아갈 날이 짧다고 생각하니 자전거를 타고 달리고 싶은 마음도 갈수록 사라져 가는 듯하다.
   산책하러 간 공원 입구에 하얀 자전거가 한 대 서 있다. 버려져 낡은 듯 했지만 가까이 가보니 아직도 쓸 만한 자전거다. 주인 잃은 자전거는 지나간 시간을 생각하듯이 망연히 서 있다. 자전거 위로 깊고 쓸쓸한 가을 하늘에서 낙엽이 하나 툭 떨어진다. 떨어지는 늦가을 낙엽과 함께 저 자전거마저 어디론가 떠나버리고 나면 이제 다시는 자전거 꿈을 꾸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든다.

 

 


고연숙  ----------------------------------------------------
   제주 출생. 한국문인협회 회원, 제주문인협회 회원, 제주여류수필문학회장 지냄. 수필집: ≪아름다운 뒷모습≫ 외 다수.

 

 

 

당 선 소 감


   젊은 시절이나 지금이나 몸에 주렁주렁 장신구 달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몸에 장신구를 걸치기보다는 마음에 한 획의 내공을 키우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문학을 하는 데 있어서도 외장보다는 내실을 다지는 것이 소중한 일이라고 생각해 왔다. 이런 저런 문학모임이나 단체에 끼어다니기보다는 조용히 앉아 좋은 작품을 한 편 읽고 쓰는 것이 더욱 중요한 일이라 여겼다.
   지난 1월말 전주에서 열린 ≪수필과비평≫ 행사에 우연히 참석한 이후 이런 생각이 편견에 가까운 것이라고 느끼게 되었다. 그곳에 참석한 사람들의 문학에 대한 진지한 모습과 태도는 나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제 나의 수필도 관념이 아닌 현실로, 독선이 아닌 공존으로 나아갈 때 보다 풍요로운 문학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새삼스레 다시 등단의 절차를 밟는다는 사실이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이를 계기로 문학에 대한 새로운 다짐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첫사랑에 대한 기억만큼이나 가슴이 들뜬다. 내 가슴에 예쁜 장신구 하나를 달아주신 심사위원님들과 수필과비평사의 여러분들께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