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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과 비평 2012년 4월호, 사색의 창] 어린 시절의 설날 - 박하

신아미디어 2012. 4. 22. 22:19

박하님의 수필을 『수필과 비평』에서 소개합니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어린 시절의 설날이 더욱 생각납니다.

 

 

어린 시절의 설날


   어느새 눈가에 잔물결이 일다니 세월이 참 빠르다.
   며칠 후면 설날이다. 지금은 그저 무덤덤하지만, 어릴 적에는 한 달
전부터 손꼽아가며 기다리고 기다리던 날이 설날이었다. 그 철없던 순
수의 시절로 달려가 본다.
   설날은 고운 설빔과 맛있는 떡국을 먹을 수 있어서 좋았다. 해마다
엄마는 설 며칠 전에 가래떡을 빼왔다. 어느 해 한 번은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던 새벽, 나는 인기척에 깨어나 어머니를 따라 떡방앗간에 갔다.
그날, 긴 가래떡 담은 함지박을 어머니가 마루 위에 놓자마자, 우리 칠남
매는 우와! 즐거운 비명을 지르며 말랑말랑 쫄깃쫄깃한 가래떡을 조청
에 쿡쿡 찍어 먹었다. 꿀맛이었고 단술도 달고 시원했다.
   설날에는 식구들이 고운 설빔으로 단장했다. 우리 집이 큰집이어서
친척들이 모이면 잔칫집처럼 법석거렸다. 상마다 설날 음식으로 가득
했다. 반짝반짝 닦은 황금빛의 놋대접에 담긴 떡국은 먹음직스러웠다.
황백 계란지단, 소고기볶음, 까만 김의 꾸미로 어우러진 떡국은 보기
만 해도 맛깔스러워 군침이 꼴깍 넘어갔다. 그 어린 시절, 나는 떡국을
먹으면 나이 한 살 더 먹는 게 무슨 큰 벼슬이라도 올라가는 것처럼
기뻤다.
   내가 일곱 살 되던 해, 어머니께서 집에 있는 흰 비단 천을 꺼내어
진달래꽃빛 물감으로 물들여 우리 세 자매에게 똑같이 설빔 한복을 지
어주었다. 할머니는 달빛처럼 하얀 옥양목 천으로 손녀들 버선을 지어
주었는데, 제일 어리다고 내 버선코에는 색실로 꽃수까지 놓아주고 비
단꽃주머니도 만들어 치마끈에 달랑 매달아주며 우리 손녀 예쁘다며 흡
족한 표정으로 바라보셨다.
   설날에 우리 형제들은 할아버지, 할머니, 부모님, 친척 어른들께 세
배를 드렸다. 어른들은 덕담 끝에 세뱃돈을 주셨다. 빳빳한 세뱃돈을
곱게 접어 비단주머니에 넣으며 이 돈으로 무얼 살까? 하고 행복한
고민을 했다. 집 앞 점방에서 몇 번이나 벼르고 벼른 끝에 큰맘 먹고
머리 리본을 샀다. 꽃분홍색 스폰지 바탕에 금박무늬 별이 찍힌 리본
인데, 머리에 꽂으니 나비가 된 것 같았다. ‘또뽑기’ 해서 탄 연둣빛
유리반지와 유리목걸이는 멋쟁이 꼬마숙녀인 나에게 꼭 필요한 장신
구였다.
   우리 집 마당에는 커다란 널판이 놓여있었다. 한복을 차려입은 동네
처녀들이 꽃무리 지어 놀러와 신명나게 널을 뛰어, 널 끝이 닿는 부분은
마당 두 군데가 움푹 꺼져 있었다. 나는 우리 동네에서 가장 예쁜 영애
언니와 널을 뛰고 싶었다. 주위에서 다 큰 처녀와 아이가 널뛰는 건 위험
하다고 말렸지만, 내 황소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처음에는 그 언니가
사부작사부작 널판을 눌러주더니 어느새 널판을 세게 누르자 내 몸은
팔랑개비처럼 공중으로 휙 날아오르다가 곤두박질치며 땅바닥으로 떨
어졌다. “저런 이마에서 피가 흐르네.” 하는 누군가의 소리에 기겁하며
울음을 터트렸다. 급기야 어머니 등에 업혀 설날에 권 의사 병원에 가서
이마를 대여섯 바늘이나 꿰매는 소동을 벌였다.
   셋째 딸인 나는 아우 터를 잘 팔아서 남동생을 줄줄이 넷을 본 덕분에
집안에서 귀염을 받았다. 호랑이 같은 할아버지께서도 복덩이라고 부르
며 귀여워했다. 그래서인지 자랄 적에 나는 버릇이 없었다.
   특히 나에게는 잊지 못할 추억이 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맞이한
설날이었다. 설날 아침에 보니 머리맡에 설빔 한복이 없었다. 하도 이
상하여 어머니께 물어보니 이제는 다 커서 학교 갈 때 입는 옷으로 준
비했다고 하셨다. 빨간색의 골덴 바지와 상의 반코트를 보는 순간! 고
운 한복이 아니라니…. 부아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나는 옷을 마당에
내동댕이치고는 큰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방 안을 도토리처럼 떼굴떼
굴 구르며 내 머리를 벽에 쿵쿵 세게 박았다. 어린 소견에 내 머리에
혹이 생기면 어머니가 가슴 아파할 것 같은 생각에, 아파도 참으며 더
세게 머리를 벽에 박았다. 울음은 봇물처럼 터져 그칠 줄 몰랐다. 어머
니는 무슨 애가 설날 정초부터 큰소리 내어 초상집처럼 우느냐고 꾸중
했지만 막무가내였다. 한참 동안 섧게 울다 보니 목이 아팠다. 그때 작
은언니가 내 곁에 오더니 울음만 그치면 옷을 금방 마련해주겠다고 귀
띔했다. 오래 울어서 지칠 대로 지쳐버린 상태였는데, 언니의 그 말은
구세주의 도움처럼 흐릿해져가는 내 정신에 반짝 희망을 안겨주었다.
평소에 언니의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믿을 만큼 신뢰했다.
나는 눈물을 뚝 그쳤다.
   작은언니는 그 즉시 덜커덩거리는 삼천리 버스를 타고 대구 양키시장
으로 달려가서 설날인데도 마침 문을 연 한군데 가게에서 비단저고리를
사왔다. 노란색 바탕에 깃과 끝동, 옷고름이 꽃자주 빛깔인 반회장저고
리다. 저고리는 내 품에 꼭 맞았다. 치마는 엄마의 자주 빛깔 뉴똥치마를
줄여서 만들어주었다. 작은언니는 그동안 집에서 여학교까지 걸어 다니
며 차비를 모은 돈으로 한복 입고 싶다는 내 소원을 이루어주었다. 한복
으로 여동생을 곱게 단장시켜준 천사 같은 언니! 철부지 나는 매화꽃
그려진 뿌연 민경(거울) 속 날 쳐다보며 방긋 웃었다. 그리고는 금세 연
한 배처럼 싹싹해져 “언니야 고맙다.” 소리를 연발하면서 언니 곁을 맴
돌며 연신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날은 파랑새가 내 어깨 위에 살포시 날아온 행복한 설날이었다.

 

 

 

박하  ------------------------------------------------------------
1999년 ≪수필과비평≫ 등단.
수필집: ≪파랑새가 있는 동촌 금호강≫, ≪인생≫, ≪멘토의 기쁨≫,

            ≪초록웃음≫, ≪퓨전밥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