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추억 속에서 잠자고 있던 내복을 꺼내 입고 보니 다소 거북스럽기는 했으나 몸도 마음도 한결 포근해짐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안온함이 익숙해질 때쯤 겨울이 가고 봄이 올 것이다. 오늘은 어머니를 위해 새로 나온 빨간 발열내복을 한 벌 사가지고 들어가야겠다."
내복의 추억 - 임태래
늦가을 날씨가 심술을 부린다. 오늘 아침엔 예고도 없이 찬바람을 몰고 와 빨간 수은주도 눌러버렸다. 산하를 수놓았던 장식들을 시기하듯 마지막 잎마저 떨구고 갈 기세이다. 첫 추위는 철지난 옷과 겨울옷을 맞교대할 시간을 주지 않고 찾아왔다.
연로하신 어머니는 장롱 속 깊이 두었던, 약간은 소독내 풍기는 내복을 꺼내어 놓으신다. 첫 추위에 떨면 올 겨우내 추울 터이니 무조건 입고 가라신다. 사내가 이만한 추위에 내복을 입느냐고 뿌리치다가 못 이기는 척 입고 말았다. 그러고 보면 결혼 이후 내복을 입어 본 기억이 별로 없다. 중년을 넘어도 청바지를 즐겨 입어왔으나 이제 몸을 생각할 나이가 된 듯하다.
군대 시절 겨울철 야간경계 근무시간에는 두어 벌씩 내복을 껴입어서 걸음걸이가 뒤뚱거리는 오리 모습 같기도 했다. 점호시간에 내복 바람에 일렬로 세우면 건너편 말년고참 한둘은 애인이 보내주었는지 여성용 빨간 핑크빛의 사제 내복을 입고 있어 웃음을 참지 못해 얻어맞은 기억도 난다. 내무반 페치카에서 타오르는 장작불과, 나일론이 들어가 거칠고 질겼던 국방색 내복이 걸린 빨랫줄의 조화가 아름다운 영상처럼 스쳐간다.
사실 내복은 화려한 재킷이나 코트처럼 뽐내지 않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주인을 따뜻하게 보호하는 가장 가깝고 소중한 존재이다. 그래서 첫 월급을 타면 대부분 부모님께 내의를 사드렸던 이유이기도 한 것 같다.
어린 시절 나에게 있어 내복은 어머니의 따뜻한 사랑이었다. 그때의 겨울은 왜 그리 추웠는지 모르겠다. 옛집의 창살문은 한지 꽃무늬로 장식하며 도톰하게 발랐으나 툭하면 찢어져 곳곳에 구멍이 뚫렸다. 찬바람이 불면 문풍지도 애처로이 울어대고 황소바람은 방 안까지 들어와 윗목에 떠놓은 숭늉을 얼게도 했다. 그래도 추위를 막아주고 우리에게 따뜻함을 준 것은 방 한쪽에 놓인 화롯불과 해진 내복이었다.
옛날 어머니, 누나들은 주로 빨간색 내복을 입었다. 남자들은 어두운 계통의 색이 많아 더러운 때가 끼어도 잘 볼 수 없어서 자주 벗지 않고 냄새가 나도록 오래 입었다. 명절이 가까워지거나 옷에서 냄새가 나면 어머니는 자식들을 목욕시키고 빨래를 하기 위해 옷 벗기기 전쟁을 치러야 했다. 그 시절에는 힘센 엄마가 미웠다.
많이 닳은 팔꿈치, 엉덩이, 무릎 한중간은 구멍이 뻥 뚫렸고, 떨어지고 해진 부분은 자주 덧대 기워 갑옷처럼 두꺼워졌다. 그래도 한번 입고 나면 추워서 도무지 벗고 싶지가 않았다. 형·언니들이 작아서 못 입거나 새것을 사면 그때야 동생 차지가 되었다.
내복 하면 몸을 가렵게 하던 이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햇볕이 좋은 양지 쪽에 쪼그리고 앉아서 이를 잡던 생각이 떠오른다. 내복의 안쪽 바느질 이음매 사이는 이가 가장 기생하기 좋은 장소다. 하얀 조그만 해충인 이를 양 엄지손톱으로 조이면 톡하고 터지곤 했다. 막 식사를 마친 놈을 잡으면 빨간 피도 보였었다. 장날이 되면 이약과 쥐약을 파는 방물장수가 있었다. 이와 벼룩을 박멸하기 위해 나라에서 하얀 가루약 디디티가 제공되기도 했다.
요즈음이야 섬유기술이 발달되어 옛날처럼 두툼하지가 않다. 가볍고도 포근하여 입은 태도 별로 나지 않는다. 하지만 자연을 거스른 탓일까. 이 잡는 이야기는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전설이 되었지만, 화학제품들이 범람해서인지 피부병 환자가 늘어나는 추세이다. 어린아이들의 아토피 증후군은 현대문명이 불러왔다는 얘기도 있다. 그러다 보니 온갖 문명의 풍요로움을 누릴 수 있는 도회를 떠나 시골로 들어가 황토 집을 짓고 자연 속에 사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있다. 자연에 순응하는 것이 건강한 삶의 방식임을 알게 한다.
내복도 패션인 양 여성들은 딱 달라붙은 스타킹이나 레깅스, 바지 하나만 입고 거리를 활보하고 다닌다. 색상도 가지가지 무늬가 있는 것도 있고 다양하다. 어린 소녀나 나이 든 아줌마, 날씬하거나 뚱뚱하거나 그런대로 멋지고 아름답다. 그 부드러운 곡선을 숨김없이 드러내준 의상이 그렇게 야하게만 보이지 않는 것은 현 시대에 물든 탓일 게다. 아마도 신이 여자에게 출산의 고통을 준 대신 멋진 다리를 뽐낼 수 있는 특권을 주었나 보다.
나이를 먹을수록 뼈에 바람이 들어 추위를 더 타게 마련이다. 불쑥 찾아와 여러 날을 콜록거리게 하는 감기는 약으로도 잘 낫지 않는다. 걸리지 않는 것이 상책이고 보면 내복을 어쩔 수 없이 입어야 할 일이다.
모처럼 추억 속에서 잠자고 있던 내복을 꺼내 입고 보니 다소 거북스럽기는 했으나 몸도 마음도 한결 포근해짐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안온함이 익숙해질 때쯤 겨울이 가고 봄이 올 것이다.
오늘은 어머니를 위해 새로 나온 빨간 발열내복을 한 벌 사가지고 들어가야겠다.
임태래 -------------------------------------------
청주 우암문학회 회원. 현재 공주대 경영대학원에서 공부중. 지난 20년간 중소기업을 경영한 후 최근 M/A하고 지금은 공주에서 농장운영과 경영컨설팅을 하고 있다.
당선소감
지혜의 샘물을 마시기 위해 한쪽 눈을 바친 오딘의 신화를 읽은 적이 있다. 어리석고 부족함을 잘 알고 있는 난 지혜를 갈구한 나머지 무모하게도 이 길에 들어서고 말았다. 그런데 이곳은 바다와 같아 갈증은 풀리지 않고 둔한 머리와 무지에 고통의 시간은 더해 갔다. 그 뒤 이 고통의 아픔이 지혜의 샘물임을 깨달았다.
수필이란 세계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좀 더 현명해지고 통찰력을 지닌 자로 변했으면 좋겠다.
이번에 기억창고에 자리한 추억들 중 하나를 꺼내 좀이 슬지 않도록 글로 펼쳐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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