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 내 인생길 30킬로미터쯤에서 달리고 있다. 왜 이렇게 숨이 차고 가슴이 답답할까? 쉴 만한 그늘이라도 있을까 싶어 두리번거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럴 때마다 십여 년 전 마지막 결승점을 통과한 순간을 떠올린다. 주먹을 불끈 쥐고 힘차게 두 팔을 들어 올렸을 때의 감동이 나를 좀 더 나아가도록 재촉한다. 오늘도 황금빛 완주 메달은 나를 보며 환하게 웃고 있다."
황금빛 메달 - 장경동
마라톤 기록증 보관 파일은 나의 소중한 보물 중 하나이다. 완주 메달이며 기록증이며 땀으로 얼룩진 배 번호가 고이 간직되어 있다. 가장 애착이 가는 것은 첫 출전 대회의 완주 메달이다.
십여 년 전, 극한의 고통에서 진정한 삶의 희열을 느낄 수 있다는 마라톤에 빠져들었다. 인생의 쓴맛을 은근히 즐기는 나에게 그것은 매력적이었다. 2002 전주·군산 국제마라톤대회에 참가하였다. 평소 등산으로 단련된 체력을 믿었기에 느닷없이 풀코스를 신청하였다. ‘에라 모르겠다. 죽기 아니면 완주다. 굴러가든 기어가든 기필코 완주다.’ 매사에 자신감만 앞세우는 것은 나의 장점이자 단점이었다.
대회 전날 숙소에서 일행들과 짐 정리를 하였다. 다른 사람들은 마라톤화와 트레이닝복에 전자시계까지 갖추고 있었다. 내가 준비한 것은 평소에 신던 운동화와 일반 반바지, 대회 티셔츠뿐이었다. 너무 부족한 준비물에 일행들의 웃음거리가 될 정도였다. “남이 장에 간다고 하니 거름 지고 나선다.”라는 말처럼 내가 너무 덤벙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옆에서 애써 웃음을 감추던 한 동료가 “장 쌤! 반드시 러닝 팬츠를 입어야 해요. 반바지를 입으면 피부가 쓸려 상처를 입게 되어 뛸 수가 없어요.”라고 한 수 지도해 주었다. 늦은 밤 상가가 셔터를 막 내릴 때쯤 시내로 부랴부랴 나섰다.
첫 대회 출전의 긴장감 속에서 전주와 군산 간 벚꽃 백릿길 달리기가 시작되었다. 처음으로 배 번호를 부착한 트레이닝복을 입고 달리니 대표선수가 된 기분이었다. 만개한 벚꽃의 호위를 받으면서 멋모르는 초보자의 힘찬 레이스가 펼쳐졌다. 나의 페이스메이커인 동료와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경쟁심도 생겼고 기록까지도 넘보았다.
벚꽃 휘날리는 백릿길 마라톤은 한 편의 인생드라마였다. 거대한 인간 물결이 자연과 어우러져 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거기에는 강한 정신력과 지구력이 있었고, 도전과 꿈, 열정이 용솟음치고 있었다. 모든 참가자가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같은 목표를 향해 뜻을 같이한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답고 숭고한가.
중반 지점을 넘어서고 있었다. 따가운 햇볕 아래서 무리한 탓인지 갑자기 머리가 죄어 오고 가슴이 답답해졌다. 주로에서 쓰러진 출전자를 이송하는 요란한 앰뷸런스 소리에 더 불안해졌다. ‘지난번 대회 때 심장마비로 사람이 죽었다고 하던데, 혹시…….’ 그 풍문은 나에게 진실로 다가오는 것 같았다. “42.195, 물로 보지 마세요.” 직장 동료가 조롱하듯이 한마디 내뱉은 말이 그제야 가슴에 와 닿았다.
30킬로미터 지점에 이르러 후끈 달아오른 머리를 물통에 들이밀었다. 정신이 조금 돌아왔다. 물도 한 잔 마시면서 흐트러진 마음을 가다듬었다. 이런 상황에서 마음의 끈이었던 동료가 중도 포기하고 말았다. 나도 나무 그늘 밑에 쉬고 싶은 유혹에 사로잡혔다.
나는 여기서 멈출 수가 없었다. 흔히 인생을 마라톤에 비유한다. 순탄한 인생행로가 그리 흔할까마는, 달리다 보면 오르막도 있고 내리막도 있게 마련이다. 역경을 극복하면 그 순간부터 그 역경은 오르막의 디딤돌이 되지 않겠는가?
이제는 정신력이다. 조금씩 한 걸음 한 걸음 뛰다가 걷다가를 반복하니 제자리걸음인 듯 더디기만 하였다. 목표를 향한 끈질긴 전진 속에 아득했던 결승점, 전주종합경기장이 시야에 들어왔다. 드디어 경기장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시민의 응원 속에 불끈 솟는 초인적인 힘을 짜내어 힘껏 질주하였다. 결승점을 통과하면서 고개를 들어보니, 전광판 시계는 4시간 6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주먹을 불끈 쥐고 힘차게 두 팔을 번쩍 들어 올렸다. 분명한 완주였다. 나는 울음인지 웃음인지 알 수 없는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나는 지금 내 인생길 30킬로미터쯤에서 달리고 있다. 왜 이렇게 숨이 차고 가슴이 답답할까? 쉴 만한 그늘이라도 있을까 싶어 두리번거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럴 때마다 십여 년 전 마지막 결승점을 통과한 순간을 떠올린다. 주먹을 불끈 쥐고 힘차게 두 팔을 들어 올렸을 때의 감동이 나를 좀 더 나아가도록 재촉한다. 오늘도 황금빛 완주 메달은 나를 보며 환하게 웃고 있다.
장경동 -------------------------------------------------
경북 안동 출생. 대구시청 근무. 대구수필문예대학 수료. 현 수필문예회 사무국장.
당선소감
차디찬 한파를 이겨내고 개울가엔 벌써 버들강아지가 고개를 내밀고 있습니다. 바람에 고개를 내밀다 깜짝 놀랐습니다. 위쪽 산골짜기에서 신인상 수상이라는 또 하나의 기쁜 소식이 봄바람을 타고 찾아 왔습니다.
초등학교 때 부랴부랴 채운 일기장 내용이 좋다는 칭찬을 받았습니다. 며칠 후 조회시간에 교장 선생님께서 낭독해 주셨습니다. 그 순간, 왜 그렇게 가슴이 콩닥콩닥 뛰던지 한참이나 진땀을 흘렸습니다. 어리고 여물지 못한 마음에 온종일 부끄럽기도 들뜨기도 해 얼굴에 불을 놓은 것 같았습니다.
어느덧 지천명이 되었습니다. 어린 시절 콩닥거리던 여운을 가지고 나를 찾고 싶었습니다. 삶의 행로를 글로 남겨 놓을 수 있을까 번민 중에 수필 밭에 씨를 뿌렸습니다. 어쭙잖은 글이라 여기면서도 쓰고 고치고 하며 마음을 졸였습니다. 제 울퉁불퉁한 글이 자리를 잡을 수 있게 도와주신 선생님들 고맙습니다. 문우들의 격려가 정말 힘이 되었습니다. 아직 부족함이 많지만 더욱 정진하라는 채찍으로 여기겠습니다. 영예의 길을 열어주신 심사위원님들께도 깊이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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